여전히 비열한 깡패들의 천국
극에 달한 잔인성, 철거용역업체 적준을 기억한다. 망루에서 농성 중인 철거민들에게 기름에 담근 타이어를 집어던져 불을 질렀던 적준을 기억한다. 망루는 화염에 휩싸였다. 철거민들은 18미터 아래로 뛰어내렸다. 적준은 이미 뼈가 으스러졌을 철거민들에게 달려들어 각목을 휘둘러댔다. 그날 한 여자가 죽었다. 박순덕의 죽음, 1997년 7월 25일, 동대문구 전농3동에서 적준은 박순덕을 죽였다.
비열한 철거깡패업체 적준을 기억한다. 철거민 이범휘(61세 남)씨는 적준에 붙잡혀 두 시간 넘도록 살인적인 폭력을 당했다. 이씨는 전신골절상을 입었다. 철거민 백석호(28세 남)씨는 적준에 붙잡혀 불덩이를 뒤집어쓰는 고문 끝에 전신 3도 화상의 1급 장애인이 됐다. 1998년 4월, 용산구 도원동에서 적준은 그렇게 했다.
적준은 더 이상 적준으로 설칠 수 없게 되자 ‘다원’을 만들었다. ‘호람’을 만들었고, ‘참마루’를 만들었다. 호람과 참마루?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 현장, 호람과 참마루는 거기 있었다. 호람은 남일당 3층에서 타이어에 불을 질러 농성 중인 철거민들을 질식시키고자 했다. 참마루는 경찰에서 빌린 소방호스로 불타는 망루를 향해 끊임없이 물을 뿜어댔다. 기름불덩이에 물을 뿜어댔다? 불은 더욱 활활 타올랐다. 호람과 참마루는 무자비했고 호람과 참마루는 한없이 미련했다.
그런데도 적준은 존재한다. 이번에는 ‘다원’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북아현동 1-3구역, 시공업체인 대림건설은 철거깡패 다원을 앞세웠다. 철판곱창구이집 이선희(49세 남)씨는 아내와 딸과 함께 자신의 가게에서 농성했다. “감정평가를 했다면 감정평가 내역을 공개하라!”, “단 한 차례의 협상도 없이 오직 폭력으로 짓밟는 막개발에 반대한다”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다행히 서부지법 판사는 중재를 하겠다며 이선희씨를 불렀다. 사건은 그 사이에 터졌다. 아내와 딸만 남은 농성장에 다원은 포클레인을 끌고 왔다. 전혀 망설임 없이 포클레인으로 뒷벽을 찍었다. 벽은 무너졌다. 농성장 안에 있던 이선희씨의 아내는 무너지는 벽돌에 맞아 실신했고, 119에 실려 갔다. 2011년 11월 11일 오전 11시경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준은 존재해야 하는가? 다원의 이름으로, 호람과 참마루의 이름으로 적준은 철거판의 거머리처럼 존재해야 하는가? 그 답은 중국에 있다.
2011년 2월 2일, 산시성 재개발지역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용역깡패들이 철거민을 두들겨 패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었다. 그 피의 재개발사건에 대해 인민법원은 단호했다. 인민법원은 용역깡패 가오하이둥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폭행사건을 배후 조종한 용역업체 대표 우루이쥔, 직원 리옌중에게는 사형유예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나머지 용역깡패 13명에게는 2년3개월-16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철거농성은 사람의 길이 아니다
김경민 교수는 우리나라의 재개발 사업이 무작정 돈만 좇는 부나비식 재개발 사업이라고 통탄한다. 재개발 사업에 전문 디벨로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돈이 되는 사업인가만 따질 뿐이라고 한다. 돈이 된다면 기존의 생명들은 알 바가 아니라는 것, 그 같은 사업방식에 그는 절망한다. 『도시개발, 길을 잃다』에서 김 교수는 말한다.
“저소득층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가 새로운 중산층타운으로 바뀌는 것이 재개발 사업이다.” 이 같은 개발 사업을 시청과 구청은 끝없이 조장한다. “구청 입장에서는 중산층이 들어옴으로써 주택 가격이 상승하고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어 자신의 수입인 세금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조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시의 22개 구가 뉴타운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다.”
시청과 구청의 조장과 방관, 돈에 눈먼 건설자본의 조급증, 돈에 휘둘려 물불을 안 가리고 폭력을 일로 삼는 철거업체의 깡패들, 구경꾼으로 전락한 경찰, 그 속에서 철거민들은 치를 떤다. 살아갈 길을 잃은 데다, 하도 억울하고 막막해서 무작정 농성의 길을 택하지만 그건 결코 사람의 길이 아니다. 가정은 파괴됐다. 아이들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눈물의 대상이 됐다. 농성장은 섬뜩하다. 언제 깡패들이 들이닥쳐 가공할 폭력을 일삼을지 몰라 살얼음판을 딛고 선 것만 같다. 농성장이 어떤 곳인지는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씨의 말을 빌면 더욱 실감난다. “언제 경찰력이 투입될지 몰라 자다가 깨는 일이 허다했다. 선잠을 자다가 보통 새벽 5-6시에 눈을 떴다.” 김진숙씨의 말에서 ‘경찰력’을 ‘용역깡패’로 대체하면 철거농성장의 현주소가 된다.
2009년 12월 26일 새벽부터 두리반은 결코 사람의 길이 아니라는 그 같은 철거농성을 시작했다. 졸지에 가정은 파괴됐고, 살길은 막혔다. 죽는 길밖에 없다면 한은 풀고 죽어야 할 게 아닌가. 모욕을 당해 욕스럽게 됐다면 그 분함이라도 알려야 할 게 아닌가. 오직 그 생각이었으니 철거농성의 승리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돈에 눈먼 막개발의 폐해에 대해 알렸다. 강자에겐 법이지만 약자에겐 살인도구일 뿐인 개발악법에 대해 알렸다. 악무한으로 치닫는 사회에 맞서자고 연대를 호소했다. 벗들과 동료작가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지역주민과 진보정당 사람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인디뮤지션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와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두리반은 놀라운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희망은 함께할 때 잡히고, 투쟁은 즐겁게 할 때 승리한다는 정석처럼 두리반은 넘치는 힘으로 즐겁게 굴러갔다.
한때 건설사는 전기를 끊어 연대의 고리를 끊고자 했다.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이 두리반과 함께했다. 건전지촛불을 보내왔고, 태양광 발전기를 보내왔고,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에 의견광고까지 후원해주었다. 두리반은 어두웠으나 더욱 열광적으로 공연했다. 함께하는 이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건설사는 농성을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마침내 대화를 시도했다. 폭력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해볼 수 없다고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두리반대책위원회는 대화에 응했다. 올 초부터 시작해 6월 초까지 무려 여섯 달 동안 협상테이블에서 머리를 맞댔다. 협상타결은 6월8일에 이루어졌다. 두리반 농성을 시작한 지는 531일 만이고, 전기가 끊긴 지는 324일 만이다.
다시 시작하는 두리반
애초 협상 때 요구한 대로 두리반은 홍대 앞에 두리반만한 장소를 마련해서 오픈하기로 했다. 오픈할 장소는 8월부터 알아보았으나 맞춤한 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두리반과 함께한 뮤지션들의 공연, 작가들의 낭독회, 다큐 상영공간을 염두에 둔 오픈 자리는 권리금만 2억이 넘었다.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급기야 지난 11월 7일, 칼국수보쌈전문점으로서의 두리반만이라도 오픈하기로 하고, 마포구 서교동에 둥지를 마련했다. 지금은 한창 내부공사 중이다. 오픈 예정일은 2011년 11월 25일 후가 될 것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일차로는 네 식구의 생계터전이되, 그동안 연대해온 이들에겐 약속의 터전이기도 한 두리반! 농성이 장기화될수록 두리반은 이 땅의 철거민들에겐 상징이 되어갔다. 막개발에 맞서는 상징으로서의 두리반은 반드시 재오픈을 해야만 그 의미를 살릴 수 있었다. 그 약속을 지키게 되어 가슴 벅차지만, 적준의 폭력 앞에 노출돼 있는 북아현동 철거민들을 떠올리면 몹시 쓰리다. 여태도 투쟁 중인 용산 신계, 성남 헌인, 일산 덕이 역시 쓰리게 다가온다. 막개발이 계속되는 한, 다시 문을 여는 두리반은 철거민들과 연대할 것이다. 상징은 보리바쿠에 들어 있을 때가 아니라, 물처럼 흐를 때 힘을 발휘한다. 두리반은 두리반식구들과 함께 쉼 없이 막개발의 급소를 찌를 것이다. 오픈 파티에서 나누게 될 칼국수와 보쌈은 급소를 찌르는 힘이 될 것이다. 오픈 파티에서 하나씩 갖게 될 건전지 촛불은 급소를 찌르는 칼이 될 것이다.
유채림: 소설가
첫댓글 새로운 둥지에서 오픈 한다니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네요. 오픈 하는날 이 잡히면 미리좀 연락좀 주세요. 참석 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