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건조기
서미숙
뜨겁다 못해 따갑던 햇볕이 따사로워졌다. 맑게 씻어낸 베란다에 잔바람이 드나든다. 뽀얗게 삶아서 손빨래한 행주들은 햇볕과 바람을 맘껏 즐기며 수분을 날려 보낸다. 말끔한 햇빛이 새하얀 행주를 해사하게 투과한다. 가을 햇살 아래에서 모래 놀이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양 오며 가며 행주에 눈길을 준다.
며칠 전, 친구와 담소 중에 빨래 건조기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그녀는 섬세한 세탁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건조기를 사용한다고 한다. 나는 습한 날씨이거나 빨리 건조해야 할 때 외에는 자연 건조를 선호한다고 했다. 그녀는 건조기에서 말리면 옷감에 남아 있는 먼지가 제거되고 고온으로 살균까지 된다고 한다. 나는 빨래를 탈탈 털 때의 개운함과 자외선의 살균 효과를 상기시켰다. 그녀는 건조기로 말린 빨래의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좋다고 한다. 나는 햇볕 좋은 날 바싹 말린 빨래의 뽀송뽀송하고 빠사삭거리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건조기에 대한 요즘 주부들의 생각은 친구와 비슷한 듯하다. 일손을 줄여주는 편리함만이 아니라 나와 가족의 옷이 더 깔끔하고 부드럽게 건조된다는 정서적인 안정감까지 느끼는 것 같다. 나보다 여덟 살 어린 동생은 건조기에서 꺼내 온 옷들을 볼에 대기도 하면서 따뜻하고 뽀송뽀송하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막내의 귀여운 재롱으로 웃어넘겼는데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에 나는 건조기를 샀다.
오래전부터 건조기가 얼마나 편리하고 위생적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꿋꿋하게 버텼다. 일하는 주부로서 살림을 쉽고 편리하게 해주는 물건을 별생각 없이 샀는데 수명이 다 된 덩치 큰 가전제품을 버릴 때마다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지구의 아픔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는 중에도 건조기는 사지 않았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여유 시간이 많음에도 사고 만 것이다.
흐린 날, 특히 장마철에는 온종일 말려도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풍겼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불쾌하고 불편한 마음이 크게 느껴졌다. 나와 가족의 위생과 건강을 위해서 지구의 건강에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건조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나 자신을 설득했다.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하자고 약속하며 양심을 달랬다. 다행히 그 약속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지킬 수 있었다. 건조기를 산 이후에 햇볕과 바람에 빨래 말리는 일을 오히려 더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면 소재의 옷감은 기계 건조와 자연 건조의 차이가 확연하다. 탈탈 털고 솔기의 매무시를 반듯하게 해서 널어 말리면 빠사삭하고 탄탄한 촉감이 생긴다. 주부로서 행복감을 느끼는 일상 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 집은 남향에 가까운 남동향이며 베란다가 넓다. 해가 머무는 시간이 많아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일 수도 있겠다. 마당 넓은 주택에 비할 수는 없지만 베란다가 있어서 항상 문을 활짝 열고 자연을 받아들인다. 햇빛과 바람과 비와 그리고….
언젠가부터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에는 베란다가 작아지거나 사라졌다. 남향으로 지어지는 아파트는 찾아보기 어렵다. 건조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더구나, 낮에는 집에 머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 안에서 찾아가는 행복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자연과 점점 멀어지게 하는 주택의 구조 변화를 마주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류시화 작가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서문에서 ‘인디언의 혼’으로서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 질문에 나는 건조기를 사용하는 주부로서 답해 본다. ‘나무에게 허락을 구했는가?’ 지구에게 허락을 구하기 위해 오랜 시간 묻고 답하기는 했지만, 지구의 허락을 받았다는 확신은 없다. ‘꼭 필요한 만큼만 잘랐는가?’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하여 에너지 사용은 최소화하겠지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다. ‘나무에게 선물을 바쳐 감사 표시를 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선물은 환경보호단체에 하는 소정의 후원이라 생각하고 실천했지만 충분하지 않은 선에서 나 자신과 타협했다.
연노랑 홑이불 자락이 살랑거린다. 햇빛이 비스듬히 통과하며 앞자락에 뒷자락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 없는 앞자락으로 스며 나오는 빛이 눈부시게 은은하다. 그 어떤 염료로도 만들 수 없는 그 빛깔, 햇빛과 천이 투명하게 만나서 만들어지는 그 색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