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의 서정
김 지 혜
산뜻한 색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리며 얼굴을 간지럽혔다. 아, 기다리던 가을이다. 나는 석양이 넘어가며 금빛으로 물든 들판을 감빛으로 뜨겁게 감싸는 가을 저녁이 좋다. 마른 솔가지와 낙엽 태우는 냄새를 떠올리면 행복해진다. 그 속에서 구수하게 익어가는 고구마와 ‘탁’ 속살을 벌리는 알밤의 기막힌 맛을 기억하니 군침이 절로 난다. 플라타너스 낙엽을 바스락바스락 밟으며 걷고 싶다. 함께 걷고 싶다.
마을 복개천 주차장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요란한 빗소리 배음과 함께 우산 쓴 사나이가 등장했다. 무지개 색 우산을 쓰고 하늘거리는 감색 셔츠, 감색 바지를 입은 사나이는 흐느적거리며 현대적 감각의 춤사위를 시작했다. 사나이는 맨손으로 시멘트 바닥을 짚으며 텀블링하였다.
관객이 꽤 모여있었다. 어떤 이는 반팔 차림이고, 어떤 이는 가벼운 잠바 차림이고, 어떤 이는 겨울 파카 차림이었다. 몇몇은 사나이의 열연에 박수를 보내고, 나는 시멘트 바닥 위에서 열연하는 무용가의 모습이 안쓰러워 가슴을 쓸어내렸다. 같은 시공간에 있음에도 느끼는 온도와 감정은 각기 다르다.
사회자가 다음 순서를 소개하자 마이크에서 ‘삐’하고 고막을 찢는 굉음이 울렸다. 잠시 세상이 정지한 기분이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자 무용수들은 미소를 지은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연주복을 입은 어린이 합창단은 귀를 틀어막고 있고, 하얀 셔츠에 하얀 면바지를 차려입은 시니어 하모니카 팀은 일동 차렷 자세로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일고여덟 출연 팀이 어두운 저녁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문득 일본의 서예가인 ‘오노노 도후’의 유명한 일화가 떠올랐다. 슬럼프에 빠진 도후가 비 오는 날 필사적으로 수양버들에 오르려는 개구리의 모습을 보고, ‘나는 저 개구리만큼 필사적으로 붓글씨에 매달려 보았던가?’라는 깨달음을 얻고 서예 공부에 더 정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도후의 깨달음과 반대로 다들 너무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산길이 좋아서 숲을 자주 찾았던 때가 있었다. 숲속에 사는 나무와 꽃 이름을 알지 못해도 모두가 친구가 된다. 숲이 대답하지 않아도 종알종알 꿋꿋하게 말을 건다. 노래도 부르고, 낭송도 하고, 까마귀가 깍깍 울어대면 나도 똑같이 깍깍 울어댄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직 끝나지 않은 가을밤의 작은 음악회를 뒤로하고 어두운 저녁 거리를 홀로 걸었다.
큰아이가 학업으로 타지로 떠나면서 빈방이 하나 생겼다. 얼른 아이의 책상을 내 책으로 채우고 작업실로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책상 책꽂이 옆에 내가 아끼는 시가 적힌 종이를 옮겨왔다. 벌써 10년 전에 붙여 놓은 것이라 누렇게 바랜 모습이 유물처럼 애틋하다.
그 시 중 하나의 주인은 여러 해 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더니 추락을 한 시인이 되었다. 또 다른 시의 주인은 해금 조치로 1987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되었다. 그렇게 십 년이 흐른 뒤, 나는 그 시 중 하나를 외고 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상념에 빠져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외며 거리를 걷다가, 지인의 화실을 지나쳤다. 올해 이 화실의 주인인 오래된 지인을 떠나보냈다. 향년 57세로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부인을 보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좋았던 추억이 많아서, 그동안 너무 야속했던 내가 미워서 미안했다. 부인은 그가 그동안 내 이야기, 내 가족들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사랑방 같은 화실에서 수묵화를 배우던 시기에 가족들과 함께 어울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해 가을 우리는 그가 살던 시골집 마당에서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굽고,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어린 내 아이들은 마당을 뛰어다니면서 제비 새끼처럼 고기를 받아먹었다. 우리 가족에게만 특별한 경험이었겠거니 생각했었는데, 그도 그때를 그리워했다니 더 울컥해졌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던 분이었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으면서 내게 주어진 인생이 길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열심히 살기 시작했는데, 다 허무했다. 흐르는 시간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산 시간에 회의가 느껴졌다. 작은 음악회의 경쾌한 색소폰 연주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저들은 자신을 위해 춤을 추고, 연주를 할까?
먹의 진한 향기가 온몸을 감싸고 손끝의 감각이 살아나는 듯 느껴진다. 몸으로 익힌 기술은 몸이 기억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책장 제일 아래 칸 깊숙이 넣어둔 먹과 붓을 꺼냈다. 한구석에서 버림받았던 둘둘 말린 묵은 한지도 한 묶음 찾아내었다. 습작했던 종이도 그대로였다. 나만 변한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나의 노년을 마음속으로 그려왔었다. 철모르던 시절, 쉰 살이 되면 귀한 부인이 되어 있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인자하게 담아내는 얼굴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목표를 세웠다. 그것이 나의 꿈이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멀었나 보다. 나는 이제야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깊은 산골로 떠나고 싶은 겨울이 오기 전에 이 가을을 온전히 다 만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