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이 되면 풀벌레 소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창문을 빠끔히 열면 온 방 안에 풀벌레 소리가 가득 차오른다. “찌르르응 찌루찌루 피이이링 휘루루루” 눈을 감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숲에 누워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편안해 진다. 그렇게 잠드는 밤이 좋다.
경남 합천 가회면 작은 산골 마을에서 맞이하는 여섯 번째 가을이다. 하지만 풀벌레 소리가 좋아서 밤마다 창문을 여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늘 곁에 있어도 무심코 지나치는 것이 많다. ‘아! 내 곁에 너도 있었구나.’하고 작은 생명들을 알아차릴 때마다 ‘나’와 ‘내 곁’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참 고맙다.
우리 식구는 내가 열아홉이 되던 겨울부터 산골 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농사지으며 삶을 일구어 갈 수 있는 곳을 찾아 여러 지역을 다녔다. 다섯 식구가 살만한 빈 집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어디든 찾아가 보았다. 그러다 우연한 인연이 닿아 합천까지 오게 되었다. 합천에 오기 전에 경북 청송과 경남 산청에서 몇 달씩을 살았다. 그곳에서 조그만 텃밭을 일군 것이 우리 식구의 첫 농사였다. 합천에 오면서 해마다 밭 평수가 조금씩 늘었다. 고구마 농사 이백 평을 시작으로 지금은 천 평이 조금 넘는 밭에서 다양한 작물을 심고 거두며 농사를 짓고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젊은 나이에 농사지을 생각을 했어요?”하는 질문을 많이 한다. 부모님을 따라 어쩔 수 없이 시골에 온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자연과 가까이 살기 바라는 마음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마음이다.
십 대 때, 친구들과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서 농사일을 했다. 흙을 만지고 있으면 저절로 ‘나도 자연이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하고 둥글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좋았다. 그렇게 스스로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그 경험이 내 삶에 ‘농사’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생명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라면 내 삶을 들여 해 볼 만한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를 짓는다면 사람과 자연을 병들게 하는 농약과 화학비료, 비닐 따위를 쓰지 않고, 땅을 살리는 농민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상추 씨 한 번 뿌려본 일 없던 내가 지금까지 청년 농부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만남 덕분이다. 지금 살고 있는 합천 가회면에서 청년 농부를 귀하게 생각해 주시는 어른들을 만났다. 가톨릭 농민회 ‘열매지기 분회’에 있는 농부들이다. 도시에 살다가 농촌에 오니 작은 일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몸을 써서 일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열매지기 식구들은 농사를 짓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셨다.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농사법도 아낌없이 꺼내어 알려 주셨다. 곁에서 보는 것만큼 진한 배움이 또 있을까. 그뿐만 아니다. 초보 농사꾼들이 때를 놓칠까 “예슬아, 지금쯤 풀 한 번 매는 것이 좋겠더라.” “예슬아, 장마 오기 전에 감자 캐는 게 좋겠다.” 하고 전화를 해 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듬뿍 나누어 받으며 여섯 해가 지나고 나니 농사일이 꽤 몸에 익었다. 언제 무얼 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인다. 일을 할 때에도 여유가 생겼다. 우리 식구들은 “밭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참 신기해.”하고 말한다.
농사일이 익숙해진 만큼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농촌이라고 농사만 짓고 살기 바란 것이 아니다. 꼭 도시에 가지 않아도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산골 마을에서도 누릴 수 있으면 싶었다. 그래서 식구들과 힘을 모아 집 옆에 작은 산골 마을 카페를 열었다. 멀리 가지 않고 갓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 즐거움이 크다. 카페 공간이 생기니 이곳에서 다양한 일이 벌어졌다. 달마다 <담쟁이 인문학교>와 <삶을 가꾸는 글쓰기반>이 열린다. 일요일마다 남동생 수연이가 여는 <기타반>도 있다. 일요일 1시가 되면 마을 아이들이 기타를 메고 기타를 배우러 온다. 이따금 일상을 떠나 자연에서 쉬어 가려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며칠씩 묵어가기도 한다. 이런 작은 일과 만남들이 산골 마을에서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산골 마을에서 이웃들과 추억을 만들어 가다 보면 이따금씩 글과 노래가 덤으로 나온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나에게는 스스로 지은 ‘서와’라는 이름이 있다. 글 서(書)를 써서 ‘글과 함께’라는 뜻이다. 이웃 마을에 사는 봄날샘(서정홍 농부시인)은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아름다워진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한 번 더 ‘농부가 되기를 잘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에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또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괭이질, 호미질 하며 농사를 짓다 보니 어느새 내 손바닥에 굳은살이 생겼다. 울룩불룩 작은 언덕이 생긴 손바닥을 보고 있으면 가슴에 뿌듯함이 차오른다. 농민이 되고서 내 글에 담기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다. 내가 쓴 글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함께 농사짓는 남동생 수연이는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 짓기를 좋아한다. 좋은 음률이 떠오르면 녹음을 해 두었다가 곡을 쓰고, 어울리는 노랫말을 붙여 노래를 만든다. 요즘은 한 번씩 ‘노래하는 농부 남매’로 소개 받으며 공연을 다닌다. 대단한 가창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산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로 쓴 노랫말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힘이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때마다 이름 없는 산골 청년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마웠다. 우리 노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무대는 ‘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0월에 ‘배추밭 콘서트’를 열려고 한다. 조용한 산골 마을에 시원한 가을바람 같은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득 오래 전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동대 마을에 사는 농부 상평님은 우리에게, 다른 젊은이들이 시골로 올 수 있는 길이 넓어질 수 있도록 청년 농부로 잘 살아주길 바란다고 하셨다. 상평님 말씀처럼 조금 먼저 농촌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이 ‘여기도 길이 있구나!’ 하는 작은 불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농사로 돈을 버는 일은 더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산골 마을에 살면서 내 삶에 ‘내’가 있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내 곁’이 채워지고 있다고 느낀다. 낯선 길로 내딛은 걸음이지만 늘 내 곁에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자연과 사람들이 있다. 농촌에서 자립을 고민할수록 ‘자립’이라는 말에는 스스로 돈을 벌어먹고 산다는 것 말고 더 커다란 뜻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스스로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 가운데 ‘그냥’이라는 낱말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있는 그대로, 아무 조건 없이’라는 뜻풀이가 나온다. 있는 그대로 내 이야기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다. 꾸미지 않아도 그냥 아름다운 존재들과 함께 하고 싶다. 내가 나누어 받은 것처럼 아무 조건 없이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 식구가 먹을 농작물을 가꾸고, 토종 씨앗을 지키고,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냥 좋아서 하는 일을 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산골 마을에서 삶을 일구어 갈 수 있기를 꿈꾼다.
#농민의소리110호 #청년농부
안녕하세요 전국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박선아 스텔라라고 합니다. 이번 농민의 소리에 실린 예슬씨의 글을 공유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