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덕담
박은주
오월의 신랑 신부 앞에 남편이 서 있다. 먼저 하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운을 뗀다. 정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며느리를 부르는 대목에서 결혼식장은 일순 웃음꽃이 피어난다.
“지금 모습 이대로, 눈부신 5월의 신록처럼 풋풋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기분 좋은 5월의 훈풍처럼 영원토록 서로를 따듯이 감싸 안아라…….” 사랑과 축복을 듬뿍 담은 아빠의 덕담, 말로 다 건네지 못한 그 마음도 가닿았을까. 나란히 어깨를 겯고 선 아들과 며느리가 뒷모습으로도 환하게 웃고 있다.
결혼식 한 달 전, 친지들에 청첩장을 보내고 나니 하루하루 시간은 더 빨리 흘러갔다. 요즘은 혼주가 따로 할 일이 없더라는 말대로 나는 아이들에게 건넬 덕담을 준비하는 남편 옆에서 훈수를 두거나, 어지러운 세상사는 잊고 그저 좋은 생각만 하자며 시간을 보냈다. 새록새록 떠올라오는 아들의 어린 시절 모습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부부가 함께 파안대소할 때가 많았다. 점차 짙어가는 5월의 녹음 속에 달큼한 꽃향기를 실은 바람은 부모님 생각을 함께 불어왔다. 친손, 외손 중에 가장 막내인 아들을 유난히 귀여워하신 양가의 부모님들.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남편은 몇 날 며칠 고치고 덧붙여 써가며 결혼식 축사를 준비했다. 빠듯한 예식 일정으로 주어진 시간이 반으로 줄었지만, 가끔 내게 보낸 단문의 쪽지 외에 써본 적 없던 그에게 A4용지 한 장의 글은 난제가 틀림없다. 게다가 30년 부모 둥지에 있던 자식을 이제 자신의 보금자리로 떠나보내는 소회를 단 3분 내로 끝마쳐야 한다니.
결혼식 하루 전날 밤, 새 와이셔츠와 새 양복 그리고 가족들의 의견으로 최종 낙점된 넥타이까지 매고서, 남편은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쓴 축사를 들여다본다. 몇 번이고 리허설하는 신랑의 아버지,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 종이 한 장 무게로 다 싣지 못할 부모의 마음이 보인다. 그런 남편 모습은 아스라한 시간 저편, 아버지가 내게 건네신 곡진한 사랑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는 내 결혼식에 오지 못하셨다. 아버지 대신 큰 작은아버지 손을 잡고 나는 신부 입장을 했다. 내 위로 언니 여섯이 모두 그랬고 외동아들인 오빠 결혼식에도 아버지는 혼주석에 앉지 못하셨다. 마흔이라는 한창나이에 갑작스레 닥친 병을 앓고 난 후유증으로 아버지는 30년 가까이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방에 누워 계실 때가 많았다.
결혼식 후에 대구 시내 한 레스토랑에서 열린 친구들과의 피로연을 마치고 남편과 나는 서둘러 친정으로 향했다. 결혼식에 오느라 식구들이 비운 텅 빈 집에 홀로 계셨을 아버지께 우리 모습을 보여드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기 위해서였다. 늦은 오후, 친정집은 일가친척들로 북적이고 엄마는 손님들 접대로 분주하셨다. 아버지 방으로 들어서니 연보랏빛 저고리에 녹두색 마고자 차림의 아버지가 우리를 맞아주신다. 결혼식 때 못 드린 큰절을 하고 앉으니 “아직 세상에 남아 막내까지 혼인하는 것을 보게 된 일이 기적 같구나.” 하신다. 나를 바라보시던 애잔한 눈빛, 잔잔히 미소 짓던 야윈 얼굴은 ‘아버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당신 모습이다.
아버지를 뵙고 난 후 동대구역으로 갔을 때 부산행 기차는 막 떠나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티가 물씬 나는 빨간 재킷에 빨간 구두를 신고 남편의 손을 잡고 나는 정신없이 뛰었다. 지금도 가끔 부부간 무게중심이 내 쪽으로 많이 기운다 싶으면 “빨간 구두 또각거리며 당신이 얼마나 날 열심히 쫓아왔는데!”라 우기지만, 어쨌든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올라 부산과 제주도에서 3박 4일 신혼여행을 마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친정을 떠날 시간이 되어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신접살림을 막 시작하게 될 남편과 나를 앞에 앉히시고 그때 하신 말씀을 우리는 후일 ‘장인어른의 어록 1호’, ‘아버지의 연탄학 개론’으로 이름 붙였다.
“공기가 잘 통해야 불이 꺼지지 않고 살아있다네. 그러려면 위아래 연탄구멍을 잘 맞추어야 하지. 너무 과열되어 연탄이 위아래로 활활 타며 붙어버릴 때는 연탄집게로 끄집어올려 살살 떼어내고….” 아버지는 연탄불 가는 요령을 어리벙벙해 하는 사위에게 상세하고도 자상하게 설명하셨다. 심지어 번개탄으로 꺼진 불을 다시 살려내는 법까지!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되어 온갖 고생을 하시던 엄마의 일손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십수 년 동안 우리 집 연탄불 파수꾼 역할을 자처하신 당신이셨다. 추운 겨울, 식구들을 포근히 재우려고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하루 몇 번을 연탄불을 갈기 위해 집안을 오가셨을까. 엄마가 시장에서 팔고 남은 김장배추 푸성귀를 넣어 끓여주신 진 국수로 끼니를 때우는 날에도 항시 따스한 훈기, 뜨끈했던 아랫목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었는데…….
그런 아버지의 연탄불 사랑은 막내딸에게 이어져, 1년 후 도시가스 난방이 되는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 작은 신혼집을 따뜻이 데워 주었다. 주방 옆 연탄 보일러실에서 연기가 가끔 피어오르고 번개탄으로 꺼진 불을 살리려 분주했지만, 연탄불 갈기의 명수인 장인에게 전수한 역할을 남편은 꽤 충실하게 해냈던 것 같다.
和 信 愛 敬, 한문으로 쓰인 네 글자로 된 액자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건넨 마지막 선물이었다. 돌아가시기 2, 3년 전쯤 친정에 들르면 아버지 방에서는 은은한 묵향이 배어 나오곤 했는데, 몸 상태가 좋으실 때 틈틈이 자식들에게 줄 붓글씨를 아버지는 쓰고 계셨다. 막 첫딸을 낳은 나와 남편에게 써주신 그 글씨는 둘째 아이가 태어나 한창 자랄 때까지 우리 집 가훈으로 오랫동안 거실 중앙에 붙어 있었다. 기도하듯 마음 모아 쓰셨을 반듯한 네 글자는 지금도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려온다. “서로 소중히 여기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믿고 화목하게 살아가거라.”
먼 남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아들과 며느리가 사진을 보내왔다. 꽃목걸이를 하나씩 목에 걸고 다정히 손잡은 모습이 티 없이 환하다. 그래. 아빠의 덕담처럼 꼭 잡은 두 손 놓지 말고, 알콩달콩 행복한 너희들의 둥지를 만들어가렴. 삼십여 년 전. 내 아버지가 내게 건네신 말씀, ‘활활 타고 난 검은 연탄이 하얘지듯,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아낌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