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나해 사순 1주간 화요일 - 주님의 기도
신자들 중에서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하고 싶지만 앉아있으면 잡념만 들고 시간만 허비한다는 생각도 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혼자 자주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하라고 그 방법을 그르쳐주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가 전부입니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사람이 데이트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나서 밥을 먹기도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대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시간을 허비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만남으로 충분히 시간을 버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과 함께 있다면 그 함께 있다는 느낌으로 기도는 충분합니다. 피곤하면 그 분 앞에서 잠을 자도 됩니다.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고 휴식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형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둘이 만나서 싸운다면 그건 올바른 데이트가 아닙니다. 또 무엇을 해달라고 떼만 쓴다면 그런 만남도 사랑을 증가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만난다면 서로의 사랑을 나누고 증가시키기 위한 어떤 틀 안에서 만나야 하는데 주님의 기도가 바로 이 틀입니다. 이 내용 안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어떤 형식으로 만나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럼 주님과의 만남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기도를 통해 살펴봅시다.
하늘에 계신: 태초에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좋은 것이었지만 아담과 하와의 죄로 땅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 이후로 땅은 사막이 되었고 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이제 죄의 땅이 아니라 하늘에만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기도드리기 이전이 나의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한지 먼저 성찰해야 합니다. 우선 하느님을 만나기에 적당한 상태여야지 온 마음이 땅처럼 더럽다면 그 분은 그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먼저 내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하여 그 분을 모시기에 적당한지 살펴보고 아니면 통회하고 죄를 먼저 뉘우쳐야합니다.
우리 아버지: 내가 누구이고 누구와 만나는지 알아야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는지 예수님을 만나는지 성모님을 만나는지 성인들 중 누구 하나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지 상대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면 이것도 올바른 데이트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이유는 바로 당신과 하나 되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도 외엔 없습니다. 그 분이 독생성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그 분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그분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관계가 가장 중요함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한 명의 구체적인 하와이고 이는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기도하고 있음도 나타내줍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영광을 추구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분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버려야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나의 영광을 버리는 것이 결국 한 몸이 되어 그 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사랑하는 사람이 더 사랑하여 한 몸이 되기 위한 것이 만남의 목적이라면 기도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랑과 온전히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그 목적이고 희망입니다. 무엇을 위해 만나는지도 모르면 배가 산으로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곧 그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기도해서 더 평온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힘이 나지 않는다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하나하나 되짚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목적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될 것이다.’에 집결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늘은 주님이고 땅은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시어 땅을 하늘과 맞닿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도 하늘까지 닿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신의 뜻을 죽이는 삶을 본받아야합니다.
이는 기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뜻이 내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 자신이 변화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나의 의무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서로간의 희생 안에서 성장합니다. 따라서 나의 의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은 결국 성령님입니다. 인간이 음식으로 살듯이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삽니다. 특별히 ‘오늘’이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음식을 하루에 세끼를 먹듯이 성령님을 채우는 노력도 매일매일 규칙적이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음식이 에너지가 되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소진되는 것처럼 영적인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사랑의 양식을 위해 구체적이고 규칙적인 기도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 부분만 다시 반복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이것만 공부하면 통과는 할 수 있을 거야.’라고 가르쳐주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나라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바로 ‘용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면 우리도 그분과 조금이라도 비슷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하는 것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닮고 싶다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면서 기도한다고 한다면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유혹을 이길 힘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혹을 이길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쯤이야 이겨낼 수 있겠지.’하며 유혹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피하지 않는 것 자체가 교만이고 죄의 시작입니다. 하와가 뱀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부터 죄가 시작 된 것과 같습니다. 이 기도를 하면서 정말 겸손해 질 것을 다짐하고 그 은총을 청해야합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의심하여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구원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 손을 잡습니다. 이 이야기는 손을 내밀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구해주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교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도 다시 그 분께 손을 내밀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끝까지 손을 내밀지 않고 목을 매어 자살한 유다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어떤 죄든 손만 내밀면 그 분은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잊게 되면서부터 하느님과 남남이 되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너무나 자주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만 외우고 그 교훈을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이니만큼 그 기도 안엔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의미를 새기며 기도하려고 노력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로마 유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