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사마르칸트는 상인 민족으로 유명한 소그드인들의 중심지였으며 실크로드의 가장 중요한 중간 기착지 중 하나였다. 소그드인들은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기도 했지만 대부분 주변의 여러 민족들에 의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각축장 아래에 놓여 있었다. 사마르칸트는 뛰어난 입지 조건과 소그드인들의 탁월한 상업 능력 덕분에 여러 지배 세력들을 거치면서도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무역 도시로 자리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오래된 도시로서 고대·중세에는 중국과 인도로부터 연결되는 교역로의 교차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오던 사마르칸트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중앙아시아의 중요한 경제·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1500년 우즈베크인들이 점령하여 부하라 칸국의 영토가 되었다. 1887년 러시아 제국의 지방 행정 및 철도 중심지가 되었고, 1924~30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였다가 1938년에 사마르칸트 주의 주도가 되었다.
1. 레기스탄 광장
레기스탄 광장은 과거 실크로드의 주요 교차점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다. 다양한 문화와 종교, 상업이 융합된 이곳은 학자, 상인, 여행자들이 모이는 국제적인 중심지였으며,사마르칸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특히, 티무르 왕조시대에 학문과 건축의 꽃을 피운 도시로 발전하며, 현재까지도 이슬람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관광지이자 사마르칸트의 상징이다. 2001년에 다른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포함되게 되었다.
레기스탄 광장의 가장 큰 특징은 세 개의 웅장한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신학교)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각기 다른 시대에 건설되었지만 조화를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광장 왼쪽에는 울루그베그 마드라사(Ulugh Beg, 1417년 ~ 1420년),
오른쪽에는 셰르도르 마드라사(Sher-Dor, 1619년 ~ 1636년),
가운데에는 틸랴코리 마드라사(Tilya-Kori, 1646년 ~ 1660년)가 있다.
레기스탄 광장의 마드라사들은 각각의 독특한 건축적 특징을 가지면서도, 공통적으로 푸른색 타일과 정교한 아랍어 문양, 기하학적 패턴이 조화를 이루는 화려한 장식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중앙아시아의 전통과 이슬람 건축의 영향을 동시에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래 사진들은 레기스탄광장의 야경
2. 샤히진다(Shahi Zinda)
이슬람 종교지도자, 티무르 왕족, 천문학자 등 중요인물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
이 공동묘지는 특별히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형인 쿠삼 이븐압바스영묘가 있기 때문에 사마르칸트 제일의 성지로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곳이라고 한다.
11세기에 작은 돔 영묘가 세워졌고 티무르가 현재의 아름다운 영묘로 증축하였다고 한다.
영묘 옆에 일반인들의 무덤이 있는 것은 그들도 성인이나 선지자의 무덤 옆에 묻히면 천국에서도 역시 성인과 성자 옆에 자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울루그벡 천문대
티무르 제국의 과학 발전은 울루그 베그 시대에 정점을 찍었다.
티무르의 손자 울루그 베그는 직경이 46m에 이르는 원통형 천문대를 건설했으며, 천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37년 천문표를 만들고 이를 계속 수정하여 1449년에 최종 완성했다. 이 표는 당시 이슬람권은 물론이고 그 후 오랫동안 유럽권 또한 능가하지 못했을 정도로 정확한 관측 결과를 담고 있었다.
울루그 벡의 동상 뒤 언덕에 울루그 벡이 건설한 천문대의 기초와 천체의 고도를 측정하는 대형 '육분의' 일부가 남아 있고 울루그 벡의 공적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있다. 울루그 벡이 죽자 당시 종교가 과학을 우선 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이슬람 지도자들과 광신도들이 천문대를 파괴해 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1908년에 지하에 파묻혀 있던 거대한 대리석으로 된 천체 측정기 육분의, 해시계, 비례컴퍼스 등이 발견되어 사마르칸트에 주요한 관광 자원이 되었고, 1964년에 (발견된 육분의 옆에) 박물관을 지어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저 건물 지하에 천문대의 기초인 '육분의'가 있다
길이가 11미터이었던 육분의는 지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하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살아남게 되었고 지상에는 건물을 지었던 기초가 남아 있어서 3층 원통형 건물로 지름이 46m 높이는 30m이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울루그 백 천문대의 박물관내부
4. 아프라시압 박물관
1965년 사마르칸트 동북쪽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도성터에서 도로 설치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를 하던 중 상부가 잘려나간 벽화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전체 발굴 조사 후 드러난 벽화의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7세기 번영했던 소그디아나의 모습을 각 11미터씩 4개 벽면에 나눠 그린 총 44미터 길이의 초대형 벽화였기 때문이다. 소그드 시대의 종교, 의례, 정치, 외교, 문화, 신화 등을 담은 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던 7세기 소그드 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외교를 묘사한 서벽에는 차가니안, 차치, 티벳(추정), 튀르크, 당, 고구려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그려져 있어 이 지역이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란 듯이 증명했는데 이 중 고구려인의 존재는 한국인들보다도 먼저 러시아와 일본의 학자들이 증명하면서 한국 학계와 언론에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중앙홀 가운데벽(서벽) 벽화 부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에 위치한 소그디아나 궁에 그려진 벽화(바흐만 왕의 즉위식에 참석한 외국 사절단을 그린 것)인데, 여기에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과 접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 조우관과 환두대도를 찬 남자 두 명이 보이는데, 이들을 고구려의 사신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학계의 지지를 얻고 있다. 이 무렵은 당나라의 대 고구려 압박이 심해지던 때이기 때문에, 벽화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 사신들이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후방을 흔들고자 연개소문이 보낸 밀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연개소문이 오족루라는 사람을 돌궐의 여러 나라에 보내 당나라의 배후를 치게끔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이 벽화는 복제품으로만 볼 수 있다. 원본은 풍화로 거의 소실되었다.
백과사전에서 빌린 사진 3장을 올려본다.(가장 또렸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