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9년(2024) 10월 27일 일요정례법회에서
무타원님께서 '산도 물도 내마음도 물들다'란 주제로 설법하신 것을
법회사진과 함께 기록으로 남깁니다.
둘째 주는 교화단 법회였고 셋째 주는 보은장터로 기도식만 했기에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좀 오래된 것 같아요.
요사이 자연을 보면 아름답게 물들어가고 있죠.
올해는 너무나 더워서 좀 늦은 감도 있겠지만
빠르게 물들어가는 것도 있고
이제 서서히 시작을 하는 나무도 있죠.
산도 물도 내 마음도 물든다. 싯귀처럼 아름답죠.
'산도 물도 내 마음도 물든다'라는 그런 제목의 글이 제 눈에 띄었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싯귀여서 교도님들께 이렇게 서정적인 주제를 가지고
우리 공부로 풀어볼까 합니다.
산도 물도 계곡도 물들고 이를 보는 내 마음마져 붉게 물든다.
산도 물도 계곡도 아름답게 물들고
이 물들어가는 자연을 보는 내 마음도 붉게 물들어간다.
물속에 비치는 단풍이 단풍일까요? 그림자죠.
그런데 그 단풍을 보고 뭐라고 얘기해요? 단풍 나오네. 그러죠.
물속에 비치는 단풍도 곧 그 물을 들이고 있죠.
물도 단풍에 물들어가는 거예요. 물에다 빨간 물감을 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물속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비쳐서 그 물도 빨갛게 물들어가는 거에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 마음도 붉게 물들어 간다.
그렇다면 온 천지가 물들어가는데 내 마음엔 어떤 물이 들어가고 있을까?
한번 생각해 봤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이 가을을 과연 나는
내 마음에 어떤 물을 지금 들이고 있을까 생각해 보셨어요?
어떤 물을 들이고 계세요?
1월부터 지금까지 어떤 물을 들이고 계셨어요?
단풍은 내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죠. 영양분이 다 빠져가지고 이제 내가 아파요~
나는 지금 이제 사라지고 있어요. 입을 잘 떨고 와야 돼요.
근데 우리는 그걸 보면서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그걸 보러 가고 그 밑에서 사진을 찍잖아요.
내 몸이 이제 1년을 다 마치면서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주면서
본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치를, 우리가 이 계절을 느끼고 있는가?
그냥 아름답다고만 생각하면서 구경을 하고 그 단풍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그 단풍나무가 올 한 해를 마감하는 그 아픔을 느끼셨나요?
사생이 일신(四生一身)인데 한번 느껴보자는 거예요.
그 아름다움에 숨어 있는 그 아픔을, 우리가 한번 느껴보자.
우리가 각자 살아가면서 무엇에 물들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물을 들여 주면서 살고 있지요?
잔잔한 물에 비치는 단풍이 붉은색이면 물도 붉은 물이 될 것이고,
잔잔한 물에 초록색 소나무가 비치면 그 물은 초록색으로 변할 것이고
은행나무가 비치면 그 물은 노란색으로 비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색깔의 물을 들이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색깔의 물을 들이고 계십니까? 아니면 흙탕물을 만들고 계십니까?
어떤 물을 들이고 계세요?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동작하면서, 세상과 대화를 하면서
내 주위의 사람들과 사랑하면서 나는 물을 들이고 살고 있습니다.
내 남편에게 물들이고, 내 아내에게 물들이고, 내 자식에게 물들이고, 내 지인에게 물들이고
내가 사는 이 공간에서 내가 물을 들이고 살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좋은 환경, 좋은 인연을 만나서 좋은 물이 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환경, 나쁜 형제를 만나서 나쁜 물이 들기도 하고,
교도님들 자식들 키워봤지만 교육하면서 저 애하고는 놀지 말아라. 너 물든다 그 말씀하시죠?
다 하셨죠? 저도 어머니 아버지한테 그 말을 들었어요.
저 애 가까이하지 말아라 너 물든다.
물든다는 게 뭐예요? 그것을 배운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 자식으로 인해서 남의 자식도 물들어 가는 것을 왜 모를까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아시죠? 맹자의 어머니가 3번을 이사 갔어요.
첫 번째는 묘지 근처에서 사니까 애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만 했어요.
두 번째는 어디로 이사 갔어요? 시전근처로 갔죠.
시장으로 오니 아이가 사세요. 사세요~ 하는 거에요.
안되겠다며 다시 이사를 갔는데 서당이 있는 곳으로 갔죠.
이곳으로 오니 아이가 천자문을 읽어요.
물들어가는 것, 맹모삼천지교에서
그 어린 아이도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서 어떤 아이들하고 노느냐에 따라서 물들어가요.
물들어간다는 것은 저는 닮아간다라고 생각합니다.
배우면서 그대로 닮아가는 것.
아버지가 하는 대로 자식이 하죠. 물들어가는 거에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면서 그 환경에 나도 모르게 젖어가면서
내가 물들어가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물들어가는 거예요.
나는 몰라요. 점점 스펀지에 물이 들어가듯이 물이 꽉 들어가는 것이 닮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물들어가고 싶은, 닮아가고 싶은 인연이 있거나
그 사람을 닮아가고 싶은 스승님이 있거나
내가 닮아가고 싶은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형제, 내 지인, 내 법동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인생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닮아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내가 잘못 살았다고 생각해요.
닮아가고 싶은 스승님, 닮아가고 싶은 법동지가 여기 교당에 있어야 돼요.
근데 닮아가고 싶은 법동지가 없다는 것은 인천교당 60년 역사에
이건 정말 너무나 애통한 일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대산종사님께서 경계를 따라 다양한 물을 들이고 살지만
세 가지 표준을 생활 표준으로 말씀을 하셨어요.
공부인은 욕심에 물들지 말고 삽시다.
욕심이라는 것이 뭐냐면 내 마음에 아만심, 이기심, 질투심, 시기심, 자존심 이게 다 욕심이에요.
아상이죠.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잘해, 쏙 올라와, 꼴을 못 봐줘요, 이것도 욕심이에요.
내 자식이 우리 가족중에서 제일 공부를 못해
다른 학생보다도 못하면 그게 쏙 올라와요. 그게 질투심이에요.
이러한 아만심, 시기심, 질투심, 자만심, 자존심 이것이 나의 욕심이에요.
이것을 놓아버리면 욕심이 없어지는 거예요.
경계를 따라 물들게 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유형인지 잘 한번 살펴보세요.
나는 경계에 쉽게 물드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말하면 그래 그래 나도 그런 것 같애
저 사람이 말하면 그래 맞아 그래 그런 것 같아
이렇게 물 들어가는 사람, 귀가 얇은 사람이죠.
두 번째, 내가 물들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 피경이죠.
서로 험담을 하거나 서로 구설을 할 때
내가 여기에 있으면 나도 구업을 짓는구나 하고 그 경계를 피하는 사람이 두 번째예요.
세 번째, 그 경계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나의 공부심이, 나를 움직여 주질 않아요. 부동심이 있어요.
무관사에, 모든 옆의 일에 내가 동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 세 번째예요.
부동심으로 경계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
네 번째는 그 경계를 내가 은혜롭게 만들어주는 사람
나만 부동심으로 그 경계에 구업을 짓지 않고, 내가 죄업을 짓지 않는 사람, 위에 승한 사람.
그 자리에서 내가 모든 사람을 은혜롭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네 번째입니다.
나는 어떤 유형입니까? 어떤 유형이세요?
귀가 얇은 사람이십니까?
그러면 보통급으로 다 내려가셔야 돼요.
우리 교도님들은 그 이상, 피경까지는 오셔야죠.
그러나 지금도 보통급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몇 십 년을 공부해서도 그래 맞아 그런가 저런가 그 말에 혹하고
자기가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데는 말하지 마세요. 이게 물들지 않는 거예요.
내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내가 실질적으로 그 사람하고 같이 일하지 않았는데
말을 하는 것은 첫 번째 사람이에요. 첫 번째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치 그래 맞아 그건 결코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동조해서 그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절대 아니에요.
네 번째 경계를 넘어서 은혜로 주위를 물들이는 네 번째 경지는 못 가더라도 세 번째는 되셔야죠.
그 경계에서 내가 무관사에, 그 모든 경계에 내가 동하지 않아야 되는 실력을 갖춰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대종사님의 제자고, 대종사님께서 이법을 내놓으시고 기뻐하시겠죠.
네 번째까지 수승을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까지는 제가 바라지 않고 세 번째까지라도 보리심으로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미국의 큰 바위 얼굴을 참 좋아합니다. 큰 바위 얼굴 아시죠?
큰 바위 얼굴에 미국 대통령 네명의 얼굴이 크게 있어요.
누구누구 있을까요?
에브라함링컨 루스벨트 토머스제퍼슨 조지워싱턴
4명의 대통령 얼굴이 큰바위 얼굴로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큰바위 얼굴을 수업시간에 배웠죠.
저는 얼마나 그곳에 가고 싶었는지 몰라요.
왜 큰 바위 얼굴을 해놨을까요?
그 분들이 대통령이 정치를 잘했냐, 그건 아니었잖아요.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큰 바위 얼굴을 해놓고
존경하고 닮아 가고 싶은 얼굴로 그 바위에 조각을 해 놓았어요.
미국 역사상 대통령으로, 인성으로 모든 사람들이 닮아 가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그 조그마한 유명하지도 않는 시골마을 큰 바위에 네 사람의 얼굴을 조각해 놓은게 큰 바위얼굴이에요.
닮아가고 싶은 사람이 꼭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업취사의 목적을 보면 인류가 선이 좋은 줄은 알되 선을 행하기는 어렵다.
시비는, 옳고 그른 것을 안다고 할지언정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취사를 잘 할 수가 없다.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이 아만심, 시기심, 질투심
이런 것들이 불같이 일어나는 것
자존심, 내가 왜 이걸 해야 돼 하는 그런 마음이 일어남
내가 손해 볼 것 같아, 나만 이 일을 해야 되나, 이러한 마음
이러한 여러 가지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시비를 안다 할지라도
내가 이 일에 대한 시비, 이게 옳고 그른 걸 안다 하더라도 내 습관에 따라서,
내가 어떻게 물들어 가느냐에 따라서 확 나올 수도 있고
내가 어떻게 물들었느냐에 얼굴이 확 변할 수도 있어요.
얼굴이 순간적으로 변할 수 있게 지금까지 물을 들여왔어요.
언어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몇십 평생을 살면서 내가 그렇게 물들어 왔어요.
근데 자기가 그렇게 언어를 물들어 온 줄도 모르고
자기가 경계에 따라서 말을 뱉으면, 물들어 왔다는 거예요.
물들어온 것은 내 생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습관에 젖어 온 것이 물들어 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이런 마음, 이런 나의 보이기 싫은 이런 마음.
이런 마음을 하얗게 만드는 것이 뭐냐. 이것을 얼룩이라고 그랬어요.
얼룩이지면 잘 보이지 않잖아요.
내 본연의 성품, 부처의 마음이 얼룩이지면, 부처의 말을 할 수도 없고 부처의 행동을 할 수가 없잖아요.
중생의 마음이 얼룩이져버리는데 어떻게 부처의 말을 하고 부처의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럴 때 이 얼룩을 제거하는 방법은 기도와 참회입니다.
기도와 참회의 방법으로써 내 마음에 얼룩을 빼라 그러셨어요.
옷에 묻은 얼룩은 눈에 보이니까, 남들이 보기 흉하니까, 세탁세제로 빨죠.
마음의 얼룩은 어떻습니까? 뭐로 빠시나요?
기도와 참회로서 빨아야 해요.
참회는 반성이에요. 아차! 하는 마음.
그 마음을 보면서 다시 내가 거기에 물들지 않고,
내가 본연의 마음을 내야 되겠다, 그 순간이 나의 반성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의 얼룩이 제거되는 거예요.
마음에 물든 얼룩은 기도와 참회로서 지워야 한다고 대종사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는 중생의 물을 빼고 즉 욕심의 물을 빼고 부처의 물을 들이는 방법입니다.
참회는 내가 물들었던 마음을 다시 세탁하면서
좋은 물을 드릴 수 있도록 내가 하얀 도화지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아셨죠?
자신의 욕심 얼굴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삶에 어떤 물이 들고 있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산다면
우리는 빈 껍데기예요.
공부인이 빈 껍데기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욕심에 물들지 말아라.
모든 내 마음에 한 마음을 놓아라. 비워라. 놓아라.
인천교당 교도님들께서 이 아름다운 계절 가을에
21일간 정진기도도 끝났으니 단풍놀이도 가실 거 아닙니까?
산으로 들로 가실 때 제가 오늘 여러분들께 드린 말씀을 한 번쯤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지금 어떻게 물들어 왔을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어떤 물을 들이고 살아갈 것인가
그런 생각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교당에 와서 어떤 세탁 방법으로 욕심을 빼고 있는지 법동지들과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첫째, 남의 험담과 예아닌 얘기를 하지 마시고
나는 내 마음에 있는 내 얼룩을 지금 어떻게 빼고 있는가?
이런 법담을 하는 인천교당이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이 그거예요.
중생의 얼룩 얘기를 나누지 마시고
부처의 물을 들이는 법담을 하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아셨죠?
하실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