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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아마 유튜브 강론 들으시는 분들은 오늘 복음이 이상하다 그러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대림 복음은 원래 세례자 요한 얘기죠. 지난주 대림 제1주 수요일 혼자 미사 드리며 복음을 봉독하며 여러 가지 묵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일에 그 묵상을 좀 전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그대로 읽고 복음만 바꿔 읽어드린 것입니다. 사실 오늘같이 날이 따뜻할 줄 알았으면 한 150명 이상 야외미사를 해도 아주 훌륭한 날씨였는데 날씨 속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잘 모르죠. 아무튼 12월부터 내년 3월까지는 실내에서 최대 30명, 3월 초부터 10월까지는 최대로 150명까지 생각하고 있지만 방장들한테는 130명으로 맞춰야 할 것이라 했어요. 왜냐하면 150명이 넘어가면 화장실 문제가 좀 생겨요. 물론 저 밑에 힐링피스 가든에는 300명이 미사를 드려도 공간은 남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여러 가지 소소한 문제들이 있기에 그렇게 정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 말 가운데 시선(視線)이라는 말이 있죠? 시선. 시선이라는 말을 사진에서 찾아보니까 이런 뜻이에요. 관찰자와 특정 사물 간의 눈길. 특정 사물은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무슨 자연 풍경일 수도 있어요. 이 시선은 굉장히 종류가 많겠죠. 어떤 시선이 있을까요? 그렇죠. 따뜻한 시선이 있고, 반대인 싸늘한 시선, 분노가 꽉 차 있는 시선. 내 속에 미움과 상처가 있을 때는 당연히 그 시선이 관찰자가 볼 때는 따뜻하게 보이질 않아요. 피정할 때 보면 앞에 수백 명이 앉아 있겠죠. 저는 그 수백 명이 하는 짓을 다 봐요. 강의 시간 내내 저 사람이 코를 몇 번 후볐는지 몇 번 꼬박꼬박 졸았는지. 그 대신에 제 강의는 맨 앞자리에 앉을수록 좋다고 그랬죠. 그 이유는 뭐예요? 내 시선이 가까운 데 있을수록 잘 보이지만, 기둥에 숨어 있거나 머리 큰 사람 뒤에 숨어 있거나 하면 보고 싶어도 보이지 않죠. 저는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시선이 다를까!’ 나를 쳐다보는 눈길, 물론 피정에 온 것 하나로 공통적인 시선은 있어요. 뭐겠습니까? 그렇죠, 말씀을 들으러, 사제를 가까이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하지만 그 공통적인 시선 밑에 깔려 있는 그 사람의 본 시선이 있죠. 저 자매는 정말 상처가 많다 느껴지고, 저 사람이 어디가 아픈 것 같다고 느껴지죠. 육신이 어디가 아프면 내가 그 사람을 봤을 때 그 아픔이 저한테 와요. 어느 형제를 보면 심장이 답답해요. 그러면 그 형제는 심장 쪽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선을 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피정 지도 신부들이 하느님께 청해야 할 중요한 은사 중 하나예요. 본당 신부들도 마찬가지죠. 제가 늘 얘기하죠. 예수님은 정말 섬세하셨다. 그냥 도매금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대할 때마다 그 사람의 상황까지도 이해했어요. 그래서 귀먹은 반벙어리 고쳐줄 때 어떻게 했다고 그랬습니까? 왁자지껄한 그 군중 사이에서 귀를 열게 한 것이 아니라 따로 불러내어서 한적한 곳으로 갔다고 나와 있어요. 그 바쁜 양반이 ‘귀 열려라.’ 해도 그냥 될 겁니다. 하지만 그 바쁜 양반이 가던 길을 멈추고 왜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내서 사람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치유했을까요? 귀먹은 반벙어리는 소리라는 걸 들어본 적이 없겠죠. 그런데 그 왁자지껄한 사람들 사이에서 귀가 열리면, 이 세상 태어나서 처음 듣는 그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을 거예요.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무서웠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따로 불러내서 침을 발라서 귀에다 대서 귀가 열리게 한 다음, ‘들리니? 이게 바람 소리야, 들리니? 이게 시냇물 흐르는 소리야.’ 하면서 소리에 하나하나 익숙해지고 난 다음에 다시 군중들 사이로 돌려보내셨죠. 아마 제일 먼저 선물로 주신 것은 주님의 목소리였을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선이에요. 예수님은 절대로 도매금으로 사람을 취급한 적이 없으세요. 그 양반 스케일이야 바다보다 넓고 우주보다 넓은 분이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 그분의 시선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자상하고 섬세하셨다는 얘기죠.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가족들에게도 많은 시선을 보냅니다. 나는 아침에 눈 뜨면 우리 고양이 둘, 초코랑 루비한테 시선을 보냅니다. ‘초코야 잘 잤어? 우리 루비 노 할머니는 편안하셨습니까?’ 그런데 애들이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그런 따뜻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애들 표정이 달라져요. 고양이들조차도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일어나자마자 자기들을 쳐다봐 주기 바라죠. 그래서 일어나면서 내 시선이 닿는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요. 그렇게 영리해요. ‘산보 가자’ 하면 좋아하고 내가 바빠서 쳐다보는 둥 마는 둥 하면 온종일 우울해 있어요. 이렇게 시선이라는 것은 중요하죠. 아버지의 경우는, 사회생활 하며,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들어오면서 집에 있는 식구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때 식구들은 너무너무 행복한 거죠. 또 아이들에게도 허그하며 눈을 바라보면서 ‘너 오늘 행복해야 해, 엄마도 행복 할게.’ 이런 시선은 정말 기가 막힌 시선 같아요. 그래서 시선은 차가운 시선이 있고. 따뜻한 시선이 있고. 분노에 찬 시선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을 치유시키는 시선이 있어요. 여기 부활한 예수님 옷 입은 거 보셨죠? 어제 입혀드렸어요. 목도리는 일주일 전에 해드렸고 이제 내일 예수님 털신도 하나 신겨 드릴 거예요. 성모님도 원래는 긴 망토 해드리려고 하고 임시로 하나 걸쳐드렸는데 괜찮아요. 그리고 돈 쓰지 말래요. 이것으로 충분히 따뜻하고 너무 행복하시대요. 보통 우리들이 성당에 가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행복한 것보다는 그분의 고통이 느껴져요. 그런데 여기 있는 부활 예수님을 보면 환하게 웃고 있잖아요. ‘얘들아 나 부활했어. 너희들도 부활해야지, 오늘 내가 너희들 부활시키려고 부른 거야 ’ 그런 시선으로 여러분들을 대하고 있죠. 여러분들도 각자의 시선이 상황에 따라 많이 바뀐다는 것을 거울을 보면 아마 아실 거예요. 누구랑 한바탕 싸우고 난 다음에 거울 앞에 딱 앉으면 어때요? 마귀 한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죠. 독사눈을 하고 있죠. 그런데 말씀 듣고, 열심히 기도하고, 또 성체를 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에 집에 돌아와서 거울을 보면 ‘아유 참 이쁘다.’ 거울에서 나를 쳐다보는 이쁜 천사의 시선을 느낄 수가 있겠죠. 그러면 내가 여러분들을 보는 시선은 어때요? 아마 다 다를 것 같아요. 저는 사제의 시선은 종합비타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요. 가르칠 때는 어떤 타협하지 말고 정확하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 천둥과 같은 시선도 있어야 하고, 정말 따뜻하게 사랑해야 하는 시선도 있어야 하죠. 사제들의 강론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신부님들의 강론은 혼 내키는 걸로 시작해서 혼 내키는 걸로 끝나, 이건 아니야. 신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제들은 열려 있어야 해요. 열린 시선을 갖고 묵상할 수 있고 그 묵상에서 나온 것을 액기스로 만들어 신자들한테 주고, 치유의 시선, 구마의 시선 그 믿음을 던져주는 그 시선으로 바뀌어 나갈 수 있다는 얘기죠. 내가 오늘 특별히 대림 제2주일 복음 대신 대림 제1주 수요일의 복음으로 따로 정한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시선이 어떤지가 참 명확히 나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인간 영의 문제만이 아니라 육신의 문제도 얼마나 따뜻한 시선으로 보셨는지, 다른 사람 배고픈 것을 예수님은 못 참으시죠. 그래서 오늘 어떤 기적이 일어났어요? 오늘 복음은 기적 아주 많이 일어나는 복음이죠. 7천 명을 먹였다고 그랬어요. 그죠? 빵 7개 가지고 많은 기적이 일어났잖아요. 그리고 그전에도 보면 또 많은 기적이 일어났죠.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오늘 복음에는 흘러넘쳐요. 그리고 당신에게 오는 다리 저는 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를 고쳐주심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신체적인 장애와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절대 무관심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십니다. 여러분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뭔지 아시죠? 선진국은 핸디캡이 있는 사람들을 위주로 사회를 만들어 가요. 한 30년 전에 캐나다에 갔을 때 깜짝 놀랐어요. 어느 건물이든 어마어마하게 큰 빌딩에도 출입구에 사람 앉은키 높이에 단추가 있어요. 휠체어를 탄 사람이 누르는 단추로 그것을 누르면, 그 육중한 문이 쉽게 쫙 돌아가 휠체어가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원상복구를 안 해요. 깜짝 놀랐죠. 그리고 캐나다에서는 나이가 들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분이 전화하면 다섯 사람이 와서 수영장으로 데려가요. 그러면 전문가들이 다리 움직일 수 있도록 물속에서 훈련 시켜요. 그것을 보면서 이것이 선진국이구나 생각했죠. GOP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인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간에 턱이 하나도 없어. 한국은 아직도 문턱이 높지 않습니까? 저는 이 정원을 설계하다가 ‘아차’ 하고 중간에 수정한 것이 있어요. 무엇이냐 하면 장애인들 들어오는 길이에요. 원래 설계를 가만히 보다 보니 장애인들이 들어올 수가 없네. 계단으로 업고 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문을 트고 slope를 완만하게 만들어 장애인들이 자연스럽게 올 수 있게 하자 했죠. 유럽 쪽에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다시 말하면 크리스천 문화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나라에서는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서 정말 힘든 사람들, 장애적인 핸디캡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걸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의 치유자로 나오시죠. 병든 몸을 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병든 몸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여러분들 사실 몸이 아프면 기도 안 되잖아요. 몸이 아파 죽겠는데 그냥 한숨만 나오죠. 그래서 여러분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제일 첫 번째로 한 것이 구마예요. 마귀랑 싸웠잖아요. 두 번째가 치유예요. 그리고 난 다음이 회당에서 설교하신 거예요. 영과 육이 병들어 있고 마귀한테 사로잡혀 있을 때는 말씀을 전해도 들어오질 않아요. 그 걸림돌을 걷어내는 작업이 먼저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구마와 치유시키어 그릇을 만들어 놓고, 그 빈 그릇에다 말씀을 던져놓기 시작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늘 말씀의 설교자보다도 더 강하게 와닿는 것이 영과 육의 치유자로 성경에는 등장이 됩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복음에는 영의 치유자로서 위로해 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만일에 되돌아가다 보면 쓰러질 수가 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뭐 좀 가진 거 없냐 물었더니, 여기는 외딴곳이라 없다 하죠. 그래도 한번 찾아보라 하니 간신히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찾아내지요. 이것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먹였잖아요. 먼 길에서 온 사람들이 지쳐 있음을 알아주시며 험한 길을 되돌아 걸어갈 수 있게 힘을 주시는 모습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인생에서 나그네 된 사람, 세상일로 시달리는 사람들, 피곤한 사람의 그 고단함을 알아주시면서 삶의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시는 분, 그런 분이 바로 예수님이죠. 세 번째로 오늘 예수님은 배고픔을 해결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주린 자를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영혼 구령에 크게 관심을 가지신 것만큼 인간 육신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깊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지금부터예요. 오늘 복음의 주제는 ‘시선’이에요. 얘기하고 싶은 건 뭐냐?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단계를 보면 크게 세 단계예요. 첫 번째 단계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전파하시고, 두 번째로는 이방인들, 팔레스티나 국경 넘어서 띠로와 시돈 지방에 있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전교하시고 세 번째는 다락방이었어요. 이렇게 예수님의 복음 전파 생활을 세 단계로 구분해 볼 때, 놀랍게도 각 단계가 끝날 때마다 항상 음식을 베풀었다는 거예요. 제가 성경을 이렇게 읽고 연구하다가 깜짝 놀랐어. 어느 주석서에서도 내가 들은 적이 없었는데, 세 단계가 끝날 때마다 음식을 주셨어요. 첫 번째 5천 명을 먹이신 사건. 갈릴래아 지방 전교 생활을 끝마치실 때 일이었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잖아. 그 후에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다시 가르치시거나 설교하거나 병을 고쳐주시는 적이 없어요. 두 번째는 4천 명 먹이신 기적이었죠. 팔레스티나 국경을 넘어서 띠로와 시돈지방, 데카폴리스 지방에서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끝맺으실 때 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베푸실 때의 일이었죠.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라.’ 예수님의 3대 유언이 있어요. 첫 번째 유언, ‘이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선포하여라.’ 두 번째 유언,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세 번째 유언,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거죠.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이 세 번째 유언을 증명하는 성서 구절은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57절’ 거기에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라는 얘기가 무려 7번 반복이 됩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서 이렇게 똑같은 단어와 똑같은 문장을 써서 7번을 반복한 곳은 유일하게 요한복음 6장 51절 이하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유언 중에서 제일 첫 번째 유언이 ‘내 살과의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왜냐? 그분의 공생활 세 단계 가운데서 세 단계가 끝날 때마다 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단계, 두 번째 단계 빵은 단순히 육을 살리는 빵이었죠. 하지만 세 번째 다락방에서 주셨던 빵은 육만이 아니라 영혼 구령을 위해서 주셨던 빵이죠. 그래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 성체가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자부심이면서 동시에 큰 축복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개신교의 창시자인 마르틴 루터는 성 어거스틴 수도회의 수사 신부였습니다. 저명한 성서학자였습니다. 그 양반이 당시 가톨릭의 여러 가지 모순에 계속해서 반박했어요. 하지만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성장하며 유아기 때가 있고 아이 때가 있고 청년기가 있듯이 교회도 그렇게 성장해요. 청소년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듯이 교회도 2천 년 동안 그런 과정을 겪어 왔죠. 소위 중세 암흑시대, 그렇지만 암흑이라고 하는 것은 빛이 옆에 가까이 있기에 암흑이 되는 거예요. 빛이 있으면 절대로 암흑을 우리 못 봐요. 암흑의 시기가 우리는 쉴 수가 있는 시기고 자기를 뒤돌아보는 자성의 시기가 될 수 있죠.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한 인간이 성장하듯이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이 얘기한 것처럼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를 향하여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온 예수님이 직접 만드시고 성령께서 지켜주시는 교회의 모습이죠. 마르틴 루터가 사제로 살았기 때문에 그 양반이 후계자들한테 유언이 뭐냐? 가톨릭의 다른 형식은 없애도 된다. 하지만 절대로 이것만큼은 없애지 말라고 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어요. 7 성사, 그중에서도 특히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는 절대 없애면 안 된다고 했어요. 왜? 마르틴 루터도 사제로서 성체성사가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신적인 것을 알고 있었죠. 예수님이 마지막 떠나면서, 또 요한복음에 나와 있듯이, 더군다나 그 양반은 세계적인 성서학자였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나온 6장 51절을 안 읽을 수가 없었죠. 하지만 후계자들이 성사 자체를 없애고 유일하게 딱 하나, 세례 성사만 남겨두었죠. 감리교에서는 하나를 더 남겨놨어. 견진 성사. 감리교의 뿌리는 성공회에요. 그래서 감리교 목사들도 사제처럼 가끔 로만칼라를 하고 다녀요. 하여튼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는 개신교에서 없어졌죠. 성체성사는 어떻게 대신합니까? 1년에 빵 몇 번 사다 나누어 먹고 마트에서 포도주 몇 병 사다 한잔씩 마시자 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고해성사는 어떻게 바뀌었죠? 혼자서 다락방에서 통성기도 하면서 ‘이 죄인을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울고불고하면서 죄의 사함을 청할 때는 성령이 막 내려와서 진홍색 같은 내 죄도 싹 해결해 주시는 것 같아.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진짜 그 죄를 내가 용서받은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요. 예수님은 얼마나 기가 막힌 심리학자였는지 몰라요. 심리학자들도 예수님을 연구할 때 혀를 둘러요. 왜? 사람은 오관을 통해서 뭐가 들어와야만 확신해요. 사제의 입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형제의 죄를 사하노라.’ 하는 감각적인 소리가 신자의 귀에 들어가죠. ‘그래 주님은 나를 사해줬구나’ 그걸 확실히 느껴요. 어느 개신교 정신과 의사가 있었어요. 그분은 장로였어요. 그런데 학회에 가톨릭의 고백성사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하는 대목에서 딱 걸려버렸어요. 자기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니까 고해성사를 알 수가 없잖아. 천주교 서점에 가서 천주교 교리서 사서 읽어봐도 학술적으로 쓸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했냐? 명동 성당에 가면 상설 고백소 있죠? 거기서 6개월 동안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했대요. 줄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고통스러운 거예요. ‘아 저 사람은 내가 1년은 치료해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그 조그만 골방에 들어갔다 10분도 안 되어 나오는데, 세상에! 얼굴이 천사가 돼서 나오더래. 도대체 저 안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지길래?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궁금해 미치겠더래요. 6개월 동안 관찰하다 해결이 안 돼서 결국엔 어떻게 했느냐?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개종하게끔 마음을 먹게 한 것도 성령의 역사였겠죠. 6개월 동안을 성당에서 점심도 굶어가면서 지켜봤대요. 그리로 부른 것 자체가 성령이 부르신 거야. 그 정신과 의사를 나중에 몽당 연필로라도 쓰고 싶으셨던 거죠. 개종해서 교리반에 들어갔더니 성사편에 이르러 수녀님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더래요. 그리고 그때 마침 우연히 김웅열 신부의 테이프를 누가 줬대요. 그래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얘기를 듣고 정말 눈물을 펑펑 흘렸대. 회개한 사울이 바오로가 되듯이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너무너무 행복했대요. 한 달 딱 지나니까 엽서가 오더래요. ‘한 달 되셨으니까 첫 고해 성사하십시오.’ 자기도 하루에 사람을 여러 명 만나는 의사잖아요. 그런데 얼마나 떨리던지 앞에 네 사람이 있는데 그냥 돌아갈까 말까. 자기 차례가 딱 됐대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어두컴컴한데 장궤틀이 있었겠죠. 무릎을 꿇고 보니 희미한 천에 신부님이 앉아 있는 옆모습이 보이더래요. 그런데 그 순간, 옆에 누가 한 사람이 더 서 있더래. 예수님을 본 거야. (아멘) 사제 옆에 예수님이 서 계신 걸 본 거야. 그때부터 막 울음이 쏟아지면서, 세례받기 전 죄는 고백 안 해도 되는데, 어릴 때 남의 집 장독이 깨뜨린 것부터 초등학교 때 여자애들 고무줄놀이할 때 고무줄 끊은 것까지 울면서 다 했대요. 그러니까 신부님이 ‘첫 고백이니 그전 것은 그만 하세요.’ 그다음부터 그 양반은 한 달에 한 번씩 고백성사를 어김없이 봐요. 날짜 정해 놓고 내가 일러준 방법 그대로 실행해요. 내가 성사 볼 때 어떻게 성사 본다고 그랬어요? 그렇죠, 영적 노트를 가지라고 그랬죠. 저녁 기도하면서 오늘 나를 힘들게 했던 부분이 무엇인가, 나를 걸려 넘어지게 했던 부분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적어요. 그다음에 이틀째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죠. 그래서 성사 보기 바로 전날 30장을 보면 제일 횟수가 많이 나오는 걸려 넘어진 적이 제일 많은 것이 성사 거리 1번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회개하는 거죠. 그리고 성사를 보는 거예요. 매일 저녁마다 성사 준비를 30일 동안 하고 매달 성사를 보는 거죠. 그분은 지금은 서울의 어느 본당 총회장으로 계세요. 내 테이프 쪽 얘기니까 한 25년 전 30년 전 초창기 때 얘기죠. 그 양반 여기도 한 번 왔다 갔어요. 내가 소개를 안 해서 그렇지 서울방 미사 할 때 명단에 있었어요. 이제 프리랜서처럼 종합병원에 의사 노릇을 하면서 지금도 정말 봉사하러 많이 다니시죠. 우리 신자들이 고백 성사에서 예수님의 시선을 느끼려면 준비를 잘해야 해요. 내가 하는 얘기가 있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다고 하면서 후회만 한다. 고백소에 있다가 보면 이 양반은 회개하는 게 아니라 후회하는 거예요. 후회하는 것과 회개하는 것에 차이가 뭐라 그랬어요? 수도 없이 얘기했어요. 후회는 자기중심적인 거예요. 죄에 떨어진 자기 자신이 꼴 보기 싫은 거예요. ‘등신아, 한 달 전에 그거 성사 보고 또 떨어졌냐? 넌 어떻게 그렇게 의지도 약하니?’ 그냥 한마디로 쪽팔린 거고 부끄러운 거야. 후회만 하다가 결국에 자기 목숨까지 끊은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라고요? 유다스. 유다는 처음부터 자기중심적이었어요. 돈주머니 맡고 있는, 지금으로 따지면 총무죠. 그때는 지금처럼 예수님 돕기 후원에 만 명 천사 이런 것이 있던 게 아니었잖아요. 끼니마다 밥 걱정해야 하는 건 예수님이 아니었어요. 누구? 유다스. 장정 12, 성모님까지 13, 거기에 또 같이 따라붙은 이름 모를 제자들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유다스였어요. 미칠 노릇이죠. 예수님은 방랑 선생이었죠. 이슬 맞고 자던 그런 분이었어요. 그렇게 늘 돈에 쪼들리던 참에 사제들이 유혹합니다. ‘은전 30냥 줄 테니까 네 선생 넘겨라.’ 은전 30냥이면 장정 12명 6개월 빵을 살 수 있는 값이에요. 그 당시 건장한 노예 한 사람을 사고파는 값이기도 했죠. 예수님을 노예로 취급한 거예요. 유다스는 처음엔 고민했겠죠. 그런데 ‘맞아, 예수님을 내가 넘겨도 그렇게 호락호락 쉽게 잡혀갈 분 아냐. 아마 잡혀가는 척하다가 도술을 부려 그냥 다다다다 다 쓰러뜨리고 우리 앞에 나타나실 거야. 그러면 돈은 돈대로 있는 거고 예수님은 살아오실 거고. 말 타고 종 부리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방 쓸다가 5백 원짜리 발견하고.’ 이것이 유다스의 처음 자기 위주의 생각이었죠. 그런데 예수님이 끌려가면서 저항을 안 해. 매를 맞으면서도 저항을 안 해. 그냥 등에 있는 살이 다 찢겨나가고 맞은 자리가 다 피범벅이 됐는데도,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냥 가만히 계신 거야. 저분 왜 저래? 이제 보여줄 때가 안 됐어? 웬걸,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면서도 저항조차 안 하고 원망조차 안 하잖아요. 나중에 못 박혀 돌아가셨잖아요. 그때 제일 충격받은 건 유다스였어요. ‘아닌데, 내 계획이 이게 아닌데, 내 계획이 이게 아닌데.’ 유다스는 그다음에도 또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구원 못 받아.’ 구원받고 못 받고까지도 자기가 결정했어요. 그래서 결국에 선택한 건 뭡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밖에 없었어요. 유다스가 ‘그래 내가 맞아 죽어도 형제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자.’ 하고 다락방을 찾아갔다면 아마 다른 제자들이 몽둥이를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가 가로막았을 거예요? 성모님. ‘얘들아, 너희도 잘한 거 없잖아. 다 도망갔잖아. 아무도 없었잖아. 네 눈에 있는 들보부터 생각해. 유다스야, 이제는 네가 예수님 몫까지 살아야 한다.’ 하셨을 겁니다. 아마 그렇게 살았다면 성 유다가 됐겠죠. 그래서 후회란 결국에는 자기가 죄를 지어서 자기 가슴 아픈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는 뭐냐?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회개예요. ‘내가 그 죄를 지었을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내가 냉담하는 동안 성모님이 얼마나 피눈물 흘리며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을까?’ ‘내가 함부로 입으로 죄지을 때마다 내 수호천사가 얼마나 애가 닳았을까?’ 아픈 하느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유다스는 한 번 배반했어요. 그렇지만 베드로는 몇 번 배반했어요? 세 번. 그런데도 불구하고 1대 교황이 됐어요. ‘첫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세 번 배반할 것이다.’ 그랬죠. 그대로 됐죠. 세 번 딱 배반하고 났을 때 닭이 울고, 닭이 울면서 베드로는 땅을 치고 통곡했어. 왜, 뭐가 생각이 난 거야? 예수님의 그 연민 어린 눈이 생각이 난 거야. ‘나 저 사람 모르오’ 할 때 차라리 ‘야 이놈이 미쳤냐? 네가 왜 나 몰라?’ 차라리 혼이라도 내고 욕이라도 했으면 덜 미안했을 텐데요. 정말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하면 욕도 안 나와요. 깊은 한숨만 저 밑에서 올라오는 고통스러운 한숨만 나와요. 나도 사제하면서 참 배반을 많이 당했어요, 교우들한테. ‘어떻게 저놈이 군종신부가 구걸해 온 돈을 가져갈 수 있을까?’ 허한 생각 욕도 안 나옵디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첫닭이 울면서 자기를 쳐다봤던 예수님의 눈이 생각이 난 거예요.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으면 말 한마디 못 하셨을까? 예수님의 그 눈을 보면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한 거예요. 그것이 회개예요. 옛날에 고백 성사할 때 그런 구절이 있었어요. ‘남이 나로 인하여 지은 죄가 있을 것이니, 신부는 이 죄인을 도무지 벌하고 사하소서.’ 참 아름다운 기도문이에요. 그런데 정말 고백소에 앉아 있으면 고백이 아니라 고발만 하다 나가는 사람이 많아요. 시어머니도 고발하고, 까탈스러운 마누라도 고발하고, 속 썩이는 남편도 고발하고. ‘자매님, 며느리 욕은 그만하시고 할머니 죄를 고백하세요.’ 하면, ‘신부님, 며느리 얘기를 해야만 내 죄가 나와요.’ ‘과정은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니 할머니가 지은 죄만 고백하세요.’ 후회는 자기중심으로 자기가 가슴 아픈 것만 생각하는 것이고, 회개는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내가 그 죄에 떨어질 때마다 예수 성심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교우들은 고백소에 들어가 성호경하고 첫마디가 뭐냐? 이렇게 고백했어요. ‘제가 이러이러한 죄로 인하여 예수 성심을 괴롭혔습니다.’ ‘제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어서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것이 옛날 천주교 신자들이 고백 성사 보는 말투였어요. ‘이러이러하여 내가 예수 성심, 성모 성심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백소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내가 이 죄를 지어서 하느님 마음 아프게 했다는 말 거의 못 들었어요. 그냥 죄만 나열하다 가든지 고발만 하다 가요.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유튜브 듣는 교우분들. 판공 보실 때 미리 좀 이렇게 준비해서 적으세요. 들어가서 횡설수설하지 마시고 성찰 거리를 쫙 한번 살피세요. 그 성찰 거리는 내 카페에 어느 자매가 요약해서 올려놨습니다. 베티성지에서 강론했던 6가지인가 그것이 제일 핵심이에요. 죄는 소극적인 죄가 있고 적극적인 죄가 있어요. 소극적인 죄는 뭐냐? 죄를 지으면 죄지은 거 당연히 알죠. 간음했으면, 도둑질했으면 대죄 지은 거 알아요. 이건 소극적인 죄죠. 조금만 생각해도 바로 죄라는 걸 알 수 있는 것. 적극적인 죄는 무엇인가? 생각을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죄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죄예요. 무관심의 죄 같은 것. 내가 악행은 행하지 않았어도 적극적인 선을 못 베푼 것도 적극적인 죄요. 사실은 소극적인 죄보다도 더 앞서서 고백해야 할 내용이 적극적인 죄의 성찰 거리예요. 지난 1년 뒤돌아보니까 난 도둑질한 적도 없어, 가늠한 적도 없어. 주일 미사도 꼬박꼬박 참석했고, 묵주 기도도 드렸고. 뭐야? 나 성사 볼 게 아무것도 없네. 나 입도 무겁게 하고, 누구 험담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이것은 소극적인 성찰이에요. 적극적인 성찰은 뭐라고요? 올 1년 동안 내 것을 나누어서 힘든 사람에게 나누어 준 적이 있는가. 나한테 찾아온 성경의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으로 대했던가, 따뜻한 말 한마디하고 산 적이 있었던가. 나한테 ‘나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은 안 해도 내가 볼 때 도와줘야 할 사람인데도 외면한 적은 얼마나 많았는가 이런 것들이 적극적인 성찰 거리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성사 생활 잘하고 살 수 있는 그 힘은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예요. 이 밀떡 지금은 축성이 안 됐잖아요. 그냥 밀가루죠. 이것 3분의 1만 이따 떼어드리면 오늘 점심 이것으로 땔 수 있어요? 밥도 먹어야 하잖아. 다락방에서 주신 이 음식은 배불러지라고 주신 음식이 아니에요. 영혼 구령을 위해서 주신 천상의 음식이죠. 유대인들을 위해서 전교하시고 마지막에 베푸신 빵의 기적, 이방인들을 위해서 전교한 다음에 베푸신 이방인들을 위한 빵의 기적, 그다음 세 번째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베푸신 최후 만찬 때 베푸신 이 빵, 성체성사. 비오 신부님은 ‘태양이 없이는 살아도 성체가 없이는 못 삽니다.’라고 하셨죠. 여러분 그 얘기 아시잖아요? 비오 신부님이 몸에서 오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신부들이 시기 질투하며 마귀 들렸다 했죠. 원래 사제의 적은 사제들이에요. 신자의 적은 신자들이듯. 하도 비오 신부님을 몰아가니 그 수도원 원장은 분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에는 수도회 총회에서 어떻게 결정이 내렸느냐, 성무 집행이 금지됐어요. 미사를 못 드리게 하고 골방에다 가뒀어. 무려 10년 동안. 10년 동안 비오 신부님은 미사를 못 드린 거예요. 그냥 속으로만 미사 하는 거예요. 빈손으로 드리는 신령 미사. 그 10년 동안 성체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위대한 것은 나와서 단 한마디도 장상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자기를 시기 질투하고 10년 동안 고통에 몰아넣었던 다른 사제들한테 어떤 말도 한 적이 없어요. 그렇기에 그분은 성인이에요. 그분은 오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에요. 저도 언젠가 오상을 달라고 기도했다가 취소했어요. 너무 아플 것 같고, 비오 신부님은 수도회 소속이니 하루 종일 성사만 주면 되지만 난 할 일이 많잖아? 3일 만에 취소했죠. 잘했죠?(웃음) 우리 가톨릭에는 이런 성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성체의 힘으로 고해성사를 우리는 올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아니면 그전에 있었던 부끄럽고 창피하고 때로는 기억 안 났던 것들을 조용한 시간에 노트에다 적어보세요. 소극적인 죄와 적극적인 죄 구분해서 성찰하세요. 겉으로 보면 죄는 아니나, 분명히 주님 보실 때 죄인 것이 있죠. 복음에도 보면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에서도 나왔죠. 부자는 라자로를 괴롭힌 적 없고 지나가면서 발로 찬 적도 없어요. 하지만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잖아요. 그 원인은 뭐냐? 부자가 악행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못 베풀었기 때문이죠. 그만큼 무관심의 죄는 우리 영혼 구령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쳐요.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무관심의 죄는 죄가 아닌 것처럼 만들어 놓죠. 여러분들 이번 대림 기간 주님의 따뜻한 시선 느끼시고, 예수님 탄생하실 때 여러분들도 같이 새롭게 탄생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2023년 대림 제2주일 (12/10)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
첫댓글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아멘~~🙏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