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백년 역사를 알려면 상해로 가고, 천년 역사를 알려면 북경으로 가고, 삼천년 역사를 알려면 서안으로 가고, 오천년 역사를 알려면 하남성 태항산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중국의 8대고도’중 낙양,안양,개봉,정주,이 4곳이 하남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경도 태항산 끝자락에 위치한다.)
이처럼 태항산은 오래전부터 中原의 중심에 위치하여 중추역할을 하여왔다.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세상을 얻는다’라는 말도 있는데,이곳만 방어하면 중원의 모든지역을 막을수 있었기 때문에 춘추전국시대부터 험준한 산세로 인해 군사적인 요충지로 여겨졌던 곳이며 치열한 전투가 많이 벌어졌다. 근세에도 중국 팔로군과 일본군도 이곳 남태항에서 싸웠다.
 
왕망령
전한(前漢)의 외척으로, 황위를 찬탈하여 신(新)나라를 세웠던 인물인 왕망(王莽)이 훗날 후한(後漢)을 건국하는 유수(劉秀, 광무제)를 쫓아 태항산으로 왔을 때, 바로 이곳에 80만 대군으로 진을 쳤다고 하여 '왕망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왕망은 유수에게 패해, 재위 15년만에 막을 내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이 산봉우리에 남아있게 되었다.
 
해발 1665m인 왕망령은 태항산 최고의 전망대이자, 일출과 운해를 볼 수 있는 최고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1년에 100일 정도 운해를 보여준단다.)
그래서 왕망령(王莽嶺)은 남태항의 최고봉으로 불리며 '태항지존(太行至尊)'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2010년초, 태항산의 여러 명소들을 돌아볼 때 가장 인상적인 곳이 왕망령이었다.(그날 그렇게 좋은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아주 멋진 풍경이었다.)
당시 왕망령에 아직 오픈하기전의 호텔이 있어,‘다음에 여기 올때는 저 호텔에서 숙박하여 아침을 맞이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15년9개월만에 다시 여길 오게 되었는데 숙박하여 일출은 커녕 시계가 영 좋지 못해 아쉬운 마음 가득하다.
산 넘어 산, 그 넘어 산,그 넘어 또 산이 첩첩이 보여야 하는데....
왕망령 앞에 보이는 산이 바로 ‘우공이산’의 그 山이라고 한다.
 
만선산
'만선산(万仙山)'은 하남성(河南省) 신향시(新乡市) 가까이에 위치한 태항산맥(太行山脉)의 주요 풍경구 중 하나이다. 
'만 명의 신선이 산다'는 뜻을 가지고 있을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며, 세계지질공원 및 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만선산은 태항산맥 특유의 붉은색 규암층으로 이루어진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깊은 협곡이 특징으로 수억 년에 걸친 지질 형성 과정과 물의 침식 작용으로 인해 독특한 지형이 만들어졌다.
석애구에서 만선산 홍암절벽위의 곽량촌을 본다.
 
아래 사진들은 만선산 입구에서 만선산을 올려다 본 모습.
 
곽량 괘벽공로(절벽장랑)
 
절벽 위에 83가구에 320명 정도가 사는 작은 산골마을이 있다. 바로 곽량촌 이라고 하는 곳이다.
곽량촌 입구에서 보는 주위 풍경들
홍암절벽 가운데 아래 천지폭포,오른편 가운데 절벽장랑(곽량 괘벽공로)이 보인다.
 
곽량촌은 해발 1700M에 자리한 절벽 위 마을로 중국 영화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곽량촌으로 불리는 이유는 왕망의 신왕조에 맞서 농민 봉기를 이끈 영웅 곽량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서한 말 당시 왕망이 건립한 신왕조로 인하여 '곽량'을 중심으로 하여 농민 봉기가 일어 났는 데, 후손들이 그 뜻을 이어 곽량이 싸웠던 지역을 이름으로 지정하여 험준한 산마루에 6백여년간 터전을 일구어 살아왔다. 
절벽장랑이 개통되기 전까지 곽량촌의 사람들은 대대손손 산속에 갇히어 세상과 거의 동떨어져 살았다.
곽량촌에서 절벽장랑 내려가는 길에 예전에 없었던 못이 생겼다.이름하여 천지.
보를 축조하여 물을 모아 천지를 조성하고 이런 폭포를 만들었다.
자연그대로의 옛 모습이 훨씬 좋았는데....아쉽다.(곽량촌 생각하면 저절로 떠오르던 자연 그대로의 암반과 얼어붙은 그 폭포.)
 
곽량촌으로 들어가자면 반드시 홍암절벽 대협곡을 지나야 했는데, 대협곡은 깊이가 300여 m, 너비 500여m, 길이 6,000여 m나 된다.
예로부터 곽량촌에서 외부와 통하는 길은 오직 협곡과 절벽 사이 천제(天梯)라는 좁은 절벽길 뿐이었으니 무척 불편하고 너무 위험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청년 13명이 천제 아래에 모여 반드시 절벽을 뚫어 길을 내겠다고 결의하고 1972년 3월9일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곽량촌 사람들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5년 동안 거대한 절벽에서 돌덩어리를 캐내고 정 12톤을 마모시켰다고 한다
70세 노인부터 10대 소녀까지 공사에 참여하여 마침내 1977년 5월 1일 절벽장랑을 개통하였다
마을 사람 13명이 정, 망치, 곡갱이,삽 등을 사용한 원시적인 방법으로 5년간 공사한 곽량촌의 절벽장랑(绝壁长廊)은 길이 1.25km, 폭 4m, 높이 5m의 규모이다.
괘벽공로 동굴길에 난 구멍은 공사를 하면서 파낸 돌과 흙을 내 버리는
통로가 되었으며 빛이 들어오는 창문 역할을 하였다는데 환기와 채광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외부를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창틀이 되기도 한다.
절벽장랑에서 바라보는 만선산 풍경구
깎아지른 홍암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그 모습이 대단히 웅장하다.
괘벽공로를 걸어 내려와 만선산 입구에서 다시 한번 만선산을 올려다 본다.
 
 
 
 
 
	 					
	
	 
첫댓글 15년 전 그 때의 기억 중 왕망령이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다. 거대한 수직 암릉 위에 있는 어느 마을에 걸어 들어 간 기억이 나는데 그 마을이 곽량촌인 것 같기도 하네.
괘벽공로 동굴길을 내려 가면서 오른 쪽 옆으로 뚫린 창 같은 공간으로 보이던 홍암절벽의 장관도 기억나네.
유서 깊은 정주까지 고속 기차를 타고 갔는데 많은 승객으로 너무 붐벼 불편했던 기억도 나고.
마을 주민들이 정으로 암릉을 5년 동안이나 캐내어 만들었다는 괘법공로를 생각하니 중국인의 우공이산의 정신이 무섭기도 하다.
15년 전이 오래된 옛날 같구나.
박사장 기억력 좋네.
곽량촌에 갔었던 그날 유독 날씨가 좋아서 주변산세의 아름다움에 기분이 좋았었지.
기대를 하고 갔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해 많이 아쉬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