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느티신부님> ■요한 1,6-8.19-28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대림 제3주일 미사 봉헌하고 있습니다. 날이 무척 추워졌습니다. 추위가 다음 주에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하니 특히 건강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장자 말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심재허이대물(心齋虛而待物)’ 풀이하면 ‘마음을 비우고 상대방을 기다려라.’라는 뜻입니다. 대림절은 마음을 비우고 누구를 기다려야 되는 시기입니까? 예수님이죠. 벌써 대림 3주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도 그야말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면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례를 주는 요한을 보면서 메시아로 알았던 겁니다. 바리사이뿐만이 아니라 많은 유대인이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알았죠. 그래서 메시아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강으로 갑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을 보내서 묻습니다. ‘당신이 누구요?’ 그때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말뜻은 머리 굴리지 않았다는 얘기죠. 자기 자신을 더 위대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든지 더 아름답게 미화시키려고 머리를 굴리지 않고 즉시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또 물으니 ‘엘리야도 아니다.’ 또 ‘그 예언자도 아니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에게 가서 말을 전해야 하는데 뭐라고 전하면 됩니까?’ 그때 세례자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전하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소위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 출발은 좋죠. 교회 봉사자들은 평신도만이 아니라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심은 전부 ‘예수님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정말 세례자 요한처럼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비천한 존재다’라는 아름다운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변에서 나를 칭찬해 주는 말과 존경하는 말을 들으면 우쭐거려집니다. 그래서 반대로 그분은 갈수록 작아지고 나는 그분의 이름을 빌려서 갈수록 커져 교만이 꽉 차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교만을 가득 채우고 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되겠죠. 이렇게 바뀌는 것이 사실 한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씩 또 특별히 잠자기 전에, 오늘 내가 얼마나 마음을 비우고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았는가, 주님을 기다리고 살았는가를 냉철하게 통렬하게 하루를 뒤돌아보면서 반성해야 할 겁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교만’이라고 그럽니다. 교만은 주제 파악을 못 하고 푼수를 떨 때 교만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요한이 위대한 것은 본인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요한은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그분의 신발 끈도 풀기 어려운 처지라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내적인 근거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과 자기 자신과의 엄청난 차이를 요한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던 거죠.
어떤 차이를 느꼈을까? 첫 번째는 자기가 주는 세례와 장차 메시아가 줄 세례의 차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세례를 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줬죠. 사실 요한의 물세례는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보다는 새로운 생활로 나가기 위한 상징적인 예식이었죠. 노아의 홍수 방주 이야기에 나오는 그 물처럼, 또 홍해 바다, 이집트 병사들을 수장시켰던 그 홍해처럼 물은 회개의 표시였던 겁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물세례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회개를 표시하는 세례’를 주었던 겁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준비시키는 세례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세례입니다. 이 성령세례는 우리 신약의 인간들이 받은 세례죠. 성령세례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개조시킵니다. 그리고 영혼을 개조시킵니다. 영적 기쁨과 평화 속에 살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를 받는 그 순간 죄와 벌과 원죄의 사함까지 받게 됩니다. 또한 이 예수님의 성령세례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엇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또 성사 생활을 통해서, 또 용서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령세례는 계속해서 완성을 향하여 진화합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주는 물세례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의 차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어떤 엄청난 차이를 느꼈을까요? 길을 예비하는 자와 그 예비 된 길을 행차하는 왕의 차이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나 왕이 어디를 방문할 때는 미리 점검합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왕이나 대통령이 지나갈 동선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합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또 혹시라도 불순한 짓을 하는 사람이 없는지 구석구석 경호원도 배치해 놓죠.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장차 오실 분의 길을 닦는 자다, 예비하는 자다’라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 메시아가 올 길을 미리 닦아놓는 자다.
세 번째로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의 설교, 또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있었으나 온전한 변화를 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회개의 물세례는 한계점이 있었던 겁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이런 말이 나오죠.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입니다. (공동 번역)’ 우리는 거울 앞에 서면 어디가 더러운지,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압니다. 율법 앞에 서면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거울이 우리 얼굴을 닦아줄 수 없듯이 율법은 단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요한은 구약의 참다운 의미의 율법이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거울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도행전 19장 3절에서 6절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당신들은 세례를 받았습니까?’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한 표시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예수를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바오로가 손을 얹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하기 시작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난 다음에 세례 받은 사람 중에 이상한 언어로 얘기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들이 세례를 베풀고 난 다음에는 이상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물세례와 신약의 성령세례와의 차이점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의 잘못은 지적은 할 수 있지만 변화시킬 수 없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죠.
겸손과 자기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신은 주제 파악을 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예수님과 자신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한 남자 중의 남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인 겁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우리가 대림절 동안 묵상할 수 있는 교훈은 몇 가지가 됩니다.
첫 번째로 세례자 요한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외모상으로는 낙타 털옷을 걸치고 거칠게 산 것처럼 보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백성들의 완악한 마음을 회개로 촉구하는 일에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행실도 꾸짖었고 결국에는 그것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게 절대로 악과의 타협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고 악을 멀리했습니다. 그리고 선을 사랑했습니다. 지금 시대는 악이 선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독성 죄가 퍼져나갑니다. 이럴 때 분별력을 갖는 방법은 초심 전통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라는 얘기입니다.
두 번째로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를 증거하고 전파한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명은 그분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오, 진실하게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표양을 보이십니다.
세 번째로 대림절을 통하여 세례자 요한의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들의 머릿속에 꼭 담아두는 정도가 아니라 확 박혀야 할 것은 뭐냐? ‘예수님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이 말, 이 말이 우리 신앙 고백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교만하게 건방 떠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을 가려버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에 예수님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 행세할 수 있었고. 예언자 행세를 할 수도 있었지만, 세례자 요한은 단호하게 그리고 머뭇거리지도 않으면서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도 없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만큼 강한 신앙 고백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 번째로 묵상할 것이 있다면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점은 공적으로는 백성들과 예수님을 만나게 준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모르는 내 남편과 예수님을 만나게끔 준비시켜야 합니다. 냉담 중인 사람과 예수님을 만나게 준비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삶을 본받는 거죠. 세례자 요한은 분명히 백성들과 예수님을 만나게 준비시켰던 사람이죠. 지난 한 해 동안 아니면 살아가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얼마나 준비시키려 애썼던가를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겁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점은 사적으로는 자신을 기꺼이 예수님 신발 끈을 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악과 연약성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그분 앞에 내려놓고 낮아지는 모습으로 변화돼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예수님이 구유가 아니라 내 마음 안에 탄생하실 겁니다.
지금 말씀드렸던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대림절 동안 묵상할 수 있는 네 가지의 교훈 되씹어 보면서 판공 잘 준비하고 대림절 성실하게 보내도록 애씁시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2023년 대림 제3주일 (12/17)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첫댓글
아멘~~
아멘 신부님 마리아 님 고맙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내 마음을 비우고 그곳에 예수님을 모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