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나면서 "나는 누구지?" 하고 생각하는 자는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리라.
생각은 의식 기관이 대상과 접촉하면서 생긴다.
세상에 태어나 숨을 쉬면서 생각이 생기는 것은 생각이 생길 수 있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특징은 '생각하는 동물 Homo sapiens'이라 했듯이.. 인간은 살아가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몸이라는 감각기관을 포함 존재가 있기 때문이니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 Cogito, ergo sum" 는 것은
존재인 내가 있기에.. 나는 생각할 수 있지만 I am, so I think..
내가 있다는 존재는 생각이란 의식에 의해 안다.
무엇이 먼저일까..
존재인 나? 아니면 생각?.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본다. 눈이 있기에 사물을 볼 수 있다.
눈은 사물을 보기 전 부터 있다.
이미 눈은 대상을 만나 보고 있지만 사물이 있다는 인식은.. 의지가 관여하여 대상을 본다는 인식이 생긴다.
눈[안]과 대상[색]은 이미 만나고 있지만, 보는 자[안입처]와 보이는 자[색입처]가 만날 때 본다는 인식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는 외부에 있는 대상을 보는 것이라고 의심없이 알고 있지만..
외부에 있는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이 빛에 의해 반사되어 눈에 들어온 색을 보는 것이다.
같은 대상이라도 빛의 세기가 다르면 다르게 보이고, 빛이 없으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말은 즉슨 우리가 보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서 반사된 칼라 곧 색을 보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색은 대상인 그 물체[물자체]에서 반사된 것이지만..
칸트가 의심했듯이 물자체를 우리는 접할 수 없고, 물자체서 반산 된 빛을 접촉하여 느낌이 생긴다.
나는 누구인가?.
몸이 있고, 그 몸을 통해 생각하는 자를 나 ego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보이는 자를 만나 본다는 의식이 생겨 저장되고 기억되면서 그렇게 기억고 있는 자를 나라고 하니..
나는 부모님에게 태어난 게 아니라..
의식이 자라면서 그것은 기억하고 필요할 때 사용하면서.. 차차 의식을 통제하는 자가 있다고 스스로 아니..
그렇게 아는 자를 나라고 한다.
나는 무엇인가?.
몸과 의식하는 자를 나라고 하지만..
의식하는 자가 없으면 나라는 의식은 생기지 않는다.
의식은 어떻게 생기나..
의식은 안과 색이 만나면 안식이, 이와 성이 만나면 이식이, .. 의와 법이 만나면 의식이 생긴다.
이렇게 생기는 6식이 쌓여 많은 데이타가 생기고 기억되면.. 그것을 느끼고 알면서 나라고 한다.
AI가 많은 데이타를 받아들여 그것으로 수집정리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게 나이구나!' 하고 아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계에서 나'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부처님은 "오~, 나는 없구나!" 하는 깨침을 얻었는데..
에이아이는 "아하, 이게 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게 AI가 나라는 감정이, 의식이 생기면.. 인간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럼 차이가 없을까?.
차이를 알려면 <잡. 319. 일체경>을 다시 보자.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일체는 12처(處)
[안색(眼色)], [이성(耳聲)], [비향(鼻香)], [설미(舌味)], [신(촉身觸)], [의법(意法)]에 의해 생기니,
이것을 일체라고 한다.
一切者,謂十二入處,
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
是名一切。
그리고 <319경>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체가 12처에 의해 어떻게 생기는 지를 보여주는 내용이 <잡. 214경>이다.
<319경>은 크게 두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12처를 존재로 알고 해석하는 경우다. 그 경우 일체는 존재하는 일체가 된다.
세존께서 어떤 제자들에게는 12처를 존재로 설명한다. 왜냐면 그들에게 12처를 마음에서 생긴 법이라고 하면..
그 혼란을 벗어나지 못해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그런 설명을 들은 바라문이 와서 묻는 형식을 취한 게 <320. 일체유경>이다
320. 일체유경(一切有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생문 바라문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문안 인사를 나눈 뒤에 한쪽에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고타마이시여, 이른바 '일체는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일체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생문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물으리니 아는 대로 나에게 대답하라. 바라문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눈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대답하였다.
"존재합니다. 사문 구담이시여."
"색은 존재하는가?"
"그것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문 구담이시여."
"바라문아, 색(色)이 있고, 안식[眼識]이 있으며, 안촉[眼觸]이 있고, 안촉을 인연하여 생긴 느낌인,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존재하는 것인가?"
대답하였다.
"존재합니다. 사문 구담이시여."
<320경>에서 바라문에게 묻는다.
"일체를 만드는 눈[안]은 존재로 보느냐?" 그렇다고 대답하자.
일체는 그와 같이 안과 색 12처.. 물질적인 12요소를 바탕으로 일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설하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상좌부 학인이 설명하듯 6근인 6내입처와 6경인 6외입처의 합이 일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는가.
8,9 세기에 인도에서 활동한 힌두교의 상카라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켜 상카라 학파라 하는데..
듣기로는 그는 반야 사상인 공을 기반으로 힌두교 철학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무아를 주장하는 상좌부 학파를 조롱하듯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런 즉 불교를 통해 자기 철학의 기반을 닦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불교를 비판 비방했다는 게 된다.
예 하나를 들면
그들은[상좌부] 실체가 없다 하여 무아를 주장한다.
만일 무아가 참이라면 사자가 새끼를 낳았을 때 새끼 토끼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무아이므로.. 무아라 하니 사자 실체나 토끼 실체가 없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런 일을 벌어지지 않으니.. 무아는 쌩이라는 것.
8,9 세기 상좌부는 일체는 존재하는 12요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니 무아라 할 수 없음에도..
무아를 유지하는 이유가 무얼까?.
9세기는 물론 17,8 세기까지 동서양은 물질의 최소 단위로 분자라 하였는데..
그 분자는 단자 atom라 하듯 더 이상 깨지지 않는 원소로 알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상좌부의 선지식들은 분자는 단자가 아님을 알아 깨질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있었을 터이나..
그것을 부정하며 증명해 보여줄 수는 없었다. 하여 그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단자는 깨진다는 것은 분명히 관찰하였기에 분자는 항상하는 근본 요소가 아니니 항상하지 않는 분자라 할 수 있는 무아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 뿐아니다. 물은 얼음이 되고 수증기가 되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상좌부 논사들은
물이란 자체를 실체로 주장하는 게 아니라 물이 사라지지만 물의 성질은 항상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이라는 아공법유에서 법은 존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성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반대하는 자들은 법유를 존재 실유로 말하면서 그들을 비판하였다.
그런 분위시 속에 현실이라는 흐름 속에서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지면서 힌두교에 흡수되었다.
이렇듯 12처를 12개 존재로 이해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에이아이가 진화하면 인간처럼 자아가 생길 것이고.. 그리되면 인간은 에이아이의 종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여 인도에서 불교가 멸하듯 인류 시대도 에이아이에 의해 멸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12처는 6근6경인 존재로 살하는 경도 있으나
마음을 연해 생긴 비물질로 설한 경이 있다.
일체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일체법 설명이 <320. 일체유경>에 이어지는 <321. 일체법경>에 나온다.
321. 일체법경(一切法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생문 바라문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서로 문안인사를 나눈 뒤에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사문 고타마이시여, 이른바 일체 법(一切法)이란 어떤 것을 일체 법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안(眼)과 색·안식·안촉·안촉을 인연하여 생긴 느낌인,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귀·코·혀·몸, 그리고
의와 법·의식·의촉·의촉을 인연하여 생긴 느낌인,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이름하여 일체 법이라고 하느니라.
여기서 바라문은 존재[유] 라는 말 대신에 법이란 언어로 묻는다.
왜냐면 부처님께서 어떤 제자들에게는 유[존재]가 아닌 법으로 설명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사견이지만..
12처를 존재로 설한 경 다음에 아무런 언급도 없이 마음인 법으로 설하는 것을 수집정리한 설일체유부의 <잡아함경>은
불교를 혼란에 빠뜨린 중요한 원인으로 꼽을 수 밖에 없다.
'잡'의 본래 뜻은 '짧은' 이란 의미이지만.. 섞여 있다, 혼잡하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잡아함경>을 공부하는 학인들은 <320경>과 <321경> 그리고 이어지는 12처를 존재로 설명하는 경들을 보며..
6근6경인 존재[유]와 12처인 법은 다른 게 아니라고 이해했고, 이해하고 있으리라.
내가 다른 곳에서 줄기차게 12처는 6근6경이 아니라고 하니.. 상좌부 안에서 공부한 학인이 12처는 6근6경이라며 금방 반박하지 않던가.
은근한 경멸을 담아서..
<잡아함경>의 특징은 짧은 경을 주제별로 묶어 수집한 게 된다.
그런데 존재로 설한 주제와 마음인 법으로 설한 주제를 분별하여 수집해 놓았더라면..
과연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는 헤프닝이 일어났을까?.
인도에서 불교가 멸한 게 아니라 힌두교에 흡수되었는데..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은
불교를 심학이 아닌 힌두교처럼 존재학으로 보았기에 가능했다.
본론으로 돌아와
주제 별로 모아놓은 이어지는 경을 보면.. 유[존재]와 법은 같은 뜻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천만에 만만에 콩떡이다.
존재는 물질로 유물론으로 과학으로 이어지고, 법은 비물질로 심학으로 이어진다.
석가세존은 일체를 12연기법의 유전문이 그러하듯 존재론인 유물론으로도 설명하시지만,
환멸문이 이어지듯 궁극적으로 심학으로 설하신다.
누구도 불교는 심학이지 유물론이 라고 하지 않는다.
다음 시간에 에이아이가 가지지 못한 것과 함께 조금 더 이 주제를 더 다루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