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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25절~37절 (요한이 25~27절을 먼저 기록하고 나사로사건을 뒤에 기록한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 들어보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하더라
오늘은 믿음에 관하여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믿음이 다 같은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제자들을 향하여서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자들을 가르켜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말씀하시고 가나안 여인에게는 믿음이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보시기에 믿음의 차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딤후1:5절에서는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약2:26절)이라고도 합니다. 고전3:1절 말씀에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믿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21~28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저는 현재 믿음의 상태에 대해서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라는 본질의 문제부터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에는 주님의 택함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이 되어주셨습니다. (히7:20절)
우리의 모든 죄를 아뢸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때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감사한 일인 것임을 확실히 알고 이제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오직 주님께만 두고 맡기는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시작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준다는 퇴보적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이란? 내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하면서 나머지는 주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의탁하는 신앙이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내 믿음에 대해서 만족하다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목사가 되어서 어느정도 세력을 갖추고 설교도 이정도면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장로가 되어서 권사가 되어서 안수집사가 되어서 이정도 헌신하면 주님께서 어느정도는 끄덕여 줄 거라 여기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안티 기독교인입니다. 이단에 빠져버린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인이 생겨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핏대를 세워가며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온전히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초가 아직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전부가 무엇입니까? 부활신앙입니다. 이것에 자꾸만 다른 것이 첨가 되어지기 때문에 믿음이 희미해져 버린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제대로 비추지 못한 게으름을 우리는 스스로 질책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바른 복음을 전함으로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셔서 그 얼었던 마음 딱딱한 냉냉한 마음을 주님의 은혜로 녹일 때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질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원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후에는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사도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비판하고 모르기 때문에 핍박자가 되고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바른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과 부활신앙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부분의 믿음이 있습니다. 이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믿음은 구체적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믿음이 아니라 내 삶과 관련되어진 구체적인 개념을 가진 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성경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이론으로만 알뿐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설명되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믿음은 용기입니다.
매사에 말씀에 순종하고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사는 것은 용기가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면 무엇합니까? 처녀가 자녀를 낳으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수 있습니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주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며 순종합니다. 목숨을 건 용기 없이는 예수님을 못 낳을 것입니다.
지금 거짓말 한번 하면 백원생기는 것을 뻔히 알지만 그 거짓말을 하지 않고 오십원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용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용기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신실함입니다. 믿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스 피스티스의 의미는 신실입니다. 말씀을 읽다가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신실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읽으면 믿음이 의미하는 바를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마 21:22절” 이것을 바꿔 읽으면 신실해지고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는 말씀이 되어집니다. 즉 내 입맞에 맞게 무조건 구하고 매달리고 싶은 것 그 것이 잘 못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해져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것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신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라고 합니다. 참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시대로 비유한다면 일본군 장교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한 조선의 무명 청년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 집에 있는 조선인 종의 병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스라엘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말씀하였습니다. 사람도 내색만 하지 않을 뿐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다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신앙도 보이는 대로 다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은 어떠하겠습니까? 이제는 보여지는 믿음까지도 신실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 사건은 박형철 목사님을 통하여서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마리아의 순종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미 예언하시고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한치의 실수도 없이 정확무오하게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즉 마리아의 용기있는 믿음을 찾기보다는 저는 우리 신랑되신 주님의 신실하심과 그 말씀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짐을 바라보는 것이 더 정확하게 바라보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에 너무나도 멋지게 도구로 일꾼으로 귀하게 사용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음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도 동일합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보다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지 주님의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게 되고 주님으로 인하여서 부활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리아를 이야기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싶습니다. 백부장을 이야기 하면서 주님의 신실하심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고후4:7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인간은 히브리어로 에노스라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뜻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고 두 번째 뜻은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질그릇 입니다. 엄청 잘 깨집니다. 작은 유혹에도 깨어지고, 시련의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무너지는 우리는 영락없는 질그릇입니다. 이런 질그릇에게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마리아만한 용기를요? 아니면 백부장처럼 모든 명예마저도 아니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도 이겨내는 결단력을요? 우리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 내 속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질그릇에게는 그 어느것도 희망도 소망도 기댈 것도 없음을 우리는 쉽게 경험을 통하여서 알게 됩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시 146:3절
우리는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용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백부장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을 각오한 신실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에게도 생명을 주시며 신랑이 되어주시며 그늘이 되어주시며 싸매주시며 산성이 되어주시며 피할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주님만 증거할 것입니다.
너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서 예수님이 우리 인류의 구원자임을 깨닫고 오직 그분을 믿고 죄사함으로 이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마음자세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지내고 예수님이 방문하였을때 마리아가 문안을 나옵니다. 그들의 요구조건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여기 계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황적으로는 마르다를 위한 말씀이지만 그 내용은 이시대의 우리를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시켜 주실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믿느냐? 주님께서 물어보실때에 우리는 대답할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인 부활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승리를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오직 주님은 주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고 사역자가 필요하고 성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아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시킬 수 있는 주님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족식 사건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씻겨 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죄사함의 은혜를 가르치기 위해서 발을 씻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오직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만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를 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올바른 복음을 증거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부활신앙을 증거하는 오직 예수님만 증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직 예수 믿음, 예수 소망, 예수 사랑을 우리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