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커스커팅 청산
최고봉은 1574m 고산으로 k-블카 길이가 1230m (소요시간 20분)
산 형태는 제4빙하기 지각운동으로 인하여 화강암으로 된 암석군과
여러개의 절구모양의 빙구 등이 볼거리다.
6) 따리호수
몽골초원에서 4번째로 큰 호수로 주변에 평지초원인 궁거얼초원이 있다.
호수 전망대까지 소형 관광차로 올라 호수까지 1시간 정도 걸으며
눈 아래 펼쳐진 경치는 정말 환상적이다.
7) 궁거얼 초원
평지초원으로 차로 몇시간을 달려도 지평선만 보이는
정말 끝없는 초원을 맘껏 달려볼 수 있다.
밤에는 정말 맑고 아름다운 벽들을 구경할 수 있다.
8) 아스허투 석림
중국의 사진명소 100개 중 가장 아름다운 산천 아스하투(阿斯哈圖)는 험준한 바위산이 푸른 초원에 솟아 비경을 이룬다.
얼음이 빙하를 덮어 빙하가 녹으면서 형성된 물의 힘에 의해 형성된 아스하투석림은 얼음에 의한 돌의 숲이다.
오랜 세월동안 얼음물에 씻겨 기이한 모양이 형성되고 그 뒤에는 또 오랜 세월동안 모래와 바람의 영향으로 아스하투 석림은 오늘날 뒤에
끝간데 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숲을 업고 넓은 초원에 자리잡아 장관을 형성한다.
9) 우단사막(옥룡사호)
사막에서 자연을 벗 삼아 달려본다. 자연이 만드는 교훈은 서두르지 않고 바람결을 따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가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 익지 않은 과일을 억지로 열매 맺어 맛이 없듯 삶은 자연과 함께 더불어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
자연이 만든 그림이 아닐까 한다.
옥룡사호는 국가 AAA급 관광지로서 사막, 초원, 호수를 모두 갖추고 있고, 사막에 있는 신비한 바위들과 곱고 부드러운
모래로 유명한 뛰어난 관광지이다. 이곳은 "중화제일용"이 출토된 곳으로 "중화제일용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아름다운 사막과 맑은 물, 파란 하늘, 푸른 초원을 모두 관람할 수 있다.
사막에서는 모래 썰매와 낙타 타기가 가능하다
내몽골과 외몽골(몽골 공화국) 차이 (1)원나라가 물러간 중국 대륙엔 명나라가 세워졌고, 몽골인은 원래 자신들이 살던 몽골 지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몽골인들은 각 세력으로 분열됐다. 명나라는 건국된 지 약 300년 후 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에 세워졌다.
(2) 당시 몽골 세력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몽골은 만주족이 정복 전쟁을 할 때부터 합류하여 청 태종(홍타이지)때 일찌감치 청나라에 일체화했고, 외몽골은 청나라에 대항하다 18세기 중반에서야 건륭제에 의해 청나라에 완전 복속되었다.
(3) 청나라 치하에서 복속의 삶을 살던 몽골인들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며 청나라 힘이 급격히 사라져갈 때, 독립을 선포했다. 몽골 민족 전체가 독립을 선포한 건 아니었다. 오직 외몽골만이 독립을 선포했고,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1921년에서야 중국으로부터 온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4) 일본이 만주로 침략하여 만주국 괴뢰정부를 수립한다. 소련군이 독일과 전쟁을 끝내고 일본 만주관동군 공격할때 몽골이 같이 동행참전. 2차대전 종료 후 몽골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중국과 러시아간에 협의를 하였는데, 그때 두 나라는 몽골을 둘로 나누고 (외몽고와 내몽골), 외몽고는 몽고인민공화국을 만들어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두도록 하고, 내몽골을 중국에 편입시켜 중국의 자치구가 되도록 하기로 한다.
(5) 외몽골은 내몽골과 같이 독립하여 하나의 국가를 이루려 하였으나 내몽골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중국에 남기를 원했다.
내몽골이 중국에 남기로 했던 이유로는, 첫째, 국가라는 공동체의 개념이 희박했다 둘째, 내몽골 영주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다.
내몽골 내의 몽골족 인구는 약 430~440만 정도. 외몽골 약 340만 명 |
첫댓글 따리호수 다시가싶다 ᆢ
기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