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그리스어로는 psychí로 읽는다. 라틴어로는 ANIMA(아니마)로 쓴지만 로마인들도 이 인물을 이를 때에는 ANIMA보다는 '프시케'(Psyche)를 더 많이 썼다.
일반 명사로서의 프시케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
프쉬케 (Ψυχή/Psyche) 고전 그리스어로 본래 숨으로 쓰인 단어로 마음과 영혼, 나비라는 뜻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프시케를 영양 섭취, 생식의 능력, 감각 능력, 욕구 능력, 장소적 이동의 능력, 표상 능력, 이성능력 등 신진대사와 사고활동 전반의 생명작용 그 자체로 설명하려 했다.
신약 성서에서 이 단어는 생명, 영혼, 심혼으로 다양하게 응용된다.
비슷한 쓰임으로 프네우마, 또는 뉴마(πνεύμα/Pneuma)가 있다. 역시 숨, 호흡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 단어이며, 그리스도교 신학에선 영(靈)으로 번역하여 영혼(프시케)과는 구분한다. 플라톤의 이분법적 인간학에선 사람을 몸(소마)과 영혼(프시케)으로 구분하지만, 신약 성경의 일부 텍스트는 인간이 나뉠 수 없는 단일체로서, 어떤 면에서는 몸(소마), 어떤 면에서는 영혼(프시케), 어떤 면에서는 영(프네우마)이라고 본다. 프네우마는 또한 성령(거룩한 프네우마)을 일컫는데 쓰인다.
제우스는 헤르메스에게 명해 신들을 모이게 한 뒤 자신이 공식적으로 에로스와 프시케의 결혼을 지지한다 선언했다.
프시케는 제우스의 주관 하에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신들의 술인 넥타르를 마셔 영생과 신의 자격을 얻고 새로운 여신인 마음과 영혼의 여신으로 각성해서 에로스와 정식 부부로 인정받는다.
이후 둘의 사이에서는 기쁨과 환희, 쾌락의 여신 헤도네(Hedone)가 태어난다. 헤도네는 기쁨, 쾌락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환희'. 로마의 볼룹타스(Voluptas)에 해당한다. 어찌 보면 신분을 극복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은 프시케에게 어울린다.
의도치 않게 신들을 상대로 불경죄를 지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앞으로만 나아가며 주어진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영웅이다. 새드엔딩과 배드엔딩이 일상다반사인 신화 속에서도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여신의 반열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 프시케
인간 시절에도 여신으로 칭송 받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과 착하면서도 결단력 있고 강직한 인품을 겸비한 절세미녀였고, 사랑의 성취와 여신이 된 인간이라는 고진감래에 걸맞는 감동적이고 완벽한 해피엔딩에 이르기까지 서사와 이미지가 굉장히 매력적이고 긍정적인 호감형이다. 선악의 잣대로 나눌 수 없는 극단적인 양면성과 입체적인 면모를 보이는 신화 속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드물게 결점과 하자가 없는 깨끗하고 선량한 인간이라 오늘날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캐릭터이다.
시어머니 아프로디테와의 관계 서사만 봐도 일목요연하지만, 한편으로는 신화 속에 최초로 기록된 악독하고 성질 더러운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당한 대표적인 네임드 며느리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이다. 또한 이 이야기가 로마 시인에 의한 작품이어서 그렇지 사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프시케처럼 신을 상대로 불경죄를 저지르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 인간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해밀턴은 1740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크로우 스트리트에서 페루크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불행히도 그의 초기 삶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자신의 그림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그는 더블린 소사이어티 하우스(Dublin Society House)에서 로버트 웨스트(Robert West)와 제임스 매닌(James Mannin) 밑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크레용과 파스텔 초상화로 일찍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아일랜드 은행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더블린의 유명한 La Touche 은행 가문과 함께 초창기부터 고객과 관계를 구축하는 데 매우 능숙했다.
해밀턴이 런던으로 이주한 1756년에서 1764년 사이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더블린 거리 행상인 해밀턴이 1760년에 그린 그림 앨범이 2002년 호주에서 재발견되었다. 해밀턴은 런던에서 파스텔 톤의 타원형 초상화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매체를 통해 당대의 왕족, 정치인, 유명인을 묘사했다. 해밀턴은 샬럿 여왕 (1764)과 현재 영국 왕실 컬렉션에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영국 왕실의 의뢰를 포함하여 종종 주문에 압도되었다. 그는 1760 년대 중반부터 1770 년대 중반까지 예술가 협회 (Society of Artists)와 자유 예술가 협회 (Free Society of Artists)와 함께 전시했다. 1770년대 중반부터 해밀턴은 파스텔 톤의 "프레스코화"에 더 부드럽고 질감이 있는 형태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크레용과 분필을 혼합하여 파스텔의 살을 모방할 수 있는 능력을 더욱 발전시켰다.
1779년 그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12년 동안 머물렀고, 가끔 피렌체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주로 로마에 머물렀고, 안토니오 카노바를 알고 지냈다. 예술가 존 플랙스먼(John Flaxman)의 조언에 따라 해밀턴은 유화로 눈을 돌렸고, 아일랜드와 영국 방문객의 작은 타원형 초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수잔 프랜시스 엘리자베스(앤) 버틀러(née Wandesford), 오몬드 백작 부인의 초상화는 킬케니 성에서 볼 수 있다.
1791년 해밀턴은 더블린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사망했다. 1796년에 그는 아일랜드 혁명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경을 그렸다. 그의 마지막 초상화 중 하나 (c.1804)는 윌리엄 다운스 (William Downes), 제 1 남작 다운스 (Baron Downes), 아일랜드 대법원장 (Lord Chief Justice of Ireland)의 최고 중 하나로 간주된다.
해밀턴은 시터의 머리와 어깨를 묘사한 파스텔 타원형 초상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파스텔은 활기차고 저렴했으며 가격은 한 개에 약 6기니였다. 그들은 유럽 전역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다. 이 타원형 초상화를 위해 해밀턴은 젤라틴 접착제로 마감한 수제 크림 또는 미색 종이(보통 중간 두께)를 사용했다. 해밀턴이 파스텔 톤을 위해 어떻게 종이를 준비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는 예비 그림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초상화는 일반적으로 한 번에 완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속도와 기술은 꾸준한 고객 유입을 보장하는 데 필요했는데, 해밀턴은 이 초상화에 대한 의뢰로 인해 매우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해밀턴의 파스텔 기법에 대한 다큐멘터리 증거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작품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연구자와 보존가들은 그의 기법 중 일부를 식별할 수 있었다. 해밀턴은 이미지가 흐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블렌딩하기 전에 각 톤을 인물 사진에 개별적으로 적용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습식 및 건식 파스텔 스틱을 모두 사용했다. 얼굴을 그릴 때 먼저 머리와 어깨를 밝은 톤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얼굴의 특징을 "희미한 카민 톤"으로 추가했다. 그런 다음 손가락을 사용하여 얼굴의 톤을 블렌딩했다. 그런 다음 얼굴의 윤곽을 피하고 파스텔의 넓은 면을 사용하여 배경을 채웠다. 그런 다음 파스텔의 마지막 획을 사용하여 느슨한 머리카락과 기타 세부 사항을 채우고 흑연을 사용하여 속눈썹과 같은 작은 세부 사항을 그렸다. 해밀턴의 테크닉은 유럽의 전통과 시장의 욕구에 영향을 받아 커리어 내내 일정하게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