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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1,40-45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명절 잘 지내고 계십니까?
혹시 가족들 오래간만에 만나 서로 마음 상하고 언짢은 일이 없으셨기를 바랍니다.
또 있었던 서운한 것도 이번 만남을 통해 화해가 잘 이루어지셨기를 바랍니다.
오늘 강론하기 전에 제 예전 강론 가운데 수정할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튜브를 보면 내가 매괴 성모 성지 영성에 대해 1시간 반 정도 얘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방송을 보고 감곡성당을 찾아가시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제대 위에 종각 안에 1930년에 임 가밀로 신부님이 루르드에서 모셔 온 6단 묵주를 손에 걸고 계신 루르드 성모님이 계시는데,
6·25 때 인민군들이 성모상을 부수려고 총을 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주요한 급소에 7개의 총알이 박혔는데, 놀랍게도 돌멩이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속이 텅 비어 있는 석고상이 총알 7발을 맞고도 깨지지 않았던 겁니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석고상은 작은 충격에도 금이 가거나 무너지는데?
바위도 뚫는 총알이 7발이나 정확하게 성모님 몸에 꽂혔는데 어떻게 무너져 내리지 않고
총알구멍만 보이는지 정말 신기했습니다.
또 총알은 회전해서 점점 원이 커져, 들어가는 구멍은 작은데 나올 때 구멍은 크게 납니다.
그러니 앞에 7발을 맞으셨다면 분명히 성모님 등과 뒤쪽은 다 깨져 있을 거로 생각했죠.
그래서 우리가 앞모습만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 당시 본당 신자들한테 물어도 정확하게 뒷모습이 어떤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미사 끝나고 사다리 놓고 거울 하나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성모님 뒤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거울을 뒤에 넣어 비스듬히 뒷모습을 보려던 것이죠.
‘어떤 상태로 깨졌을까?’ 하고 거울을 보는 순간 온몸에 그야말로 소름이 돋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등이, 뒤가 하나도 깨져 있질 않았습니다.
물론 앞에 빛이 있었기에 뒤에는 그림자가 굉장히 짙었죠.
그래도 일단 저는 그 당시, 무서운 총알 7발을 맞고도 관통되지 않은 것이 너무 신기했죠.
거울로 봐서 어두워서 그랬는지, 총알이 나간 흔적을 저는 당시에는 잘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등판이 부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워 총알구멍을 자세히 볼 경황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때 당시 거울로 비춰본 성모님의 등판은 컴컴했지만, 총알구멍이 없이 상처 없는 것으로 저는 보았습니다.
뒤에 구멍이 없다면 분명히 성모님의 몸 안에 총알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한 달인가 지나서 내시경을 빌려 사다리 타고 올라가 성모님 몸 총알구멍에 넣어보았습니다.
안이 어두워 내시경 불빛이 선명하질 않았으나,
뒤로 나간 흔적은 없어 탄두가 밑에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고 모니터를 보았죠.
그런데 밑에 정말 뭔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총알로 봤죠.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이렇게 밑으로 떨어져 있구나!
그래서 저는 그 이후 ‘총알이 앞으로 7개가 날아왔어도 성모님은 받아들이기만 하시고 뒤로 내보내시지 않았다.
뒤에도 총알이 나간 흔적이 없다.’라고 순례자들에게 얘기했었죠.
그리고 그 모양을 따라서 앞에만 총알구멍이 있는 매괴 성모상을 보급했습니다.
뒤에는 아무 흔적이 없는 거죠.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 감곡성당에서 정확한 성모님 모습을 보기 위해 3D 촬영했는데,
그 뒤에 구멍이 5개 있었대요. 3D 촬영한 것이니 더 확실하겠죠.
총탄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언제인지는 모르나 성모님 나무 발판을 손보면서 없어진 것 같다고 하십니다.
내가 총알인 줄 알고 봤던 것은 아마 그 석고조각 이런 것들을 잘 못 본 걸로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미사 강론 전에 3D로 촬영한 등에 5개의 총알구멍이 있는 것이 맞는 것이고,
내가 예전에 거울로 비춰보았을 때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을 정정하겠다,
그래야 신자들이 혼란이 오지 않는다고 감곡 신부님께 전화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찾아오는 순례자들 가운데 ‘옛날에 김 신부님 계실 때 뒤에 총알 나간 흔적이 없다고 그러는데 어떤 게 맞습니까?’
하고 물으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혼돈 갖지 마시고 뒤에는 총알구멍이 전혀 없다는 것은 정정하겠습니다.
현재 감곡성당에서는 입체 촬영으로 확인한 새로운 성모님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판매한 성모상은 입체 촬영 같은 확실한 검증을 거치지 않아
등에 다섯 개의 총알구멍이 없는 온전한 뒷모습의 성모상으로 제작되었지만 칠고 성모님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앞에 온몸으로 총알 7발을 맞고도 부서지지 않으신 것, 당신의 몸에 칠고를 새겨줬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뒤에 총알구멍이 4개냐 5개냐 하는 것은 매괴 성모님의 영성에 절대 흠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 석고상으로 당신이 살아생전에 당하셨던 7개의 고통을 온몸으로 안고 계신 성모상은
감국의 매괴 성모님밖에 안 계십니다.
또 매괴 성모님 팔에는 5단 묵주가 아니라 6단 묵주가 걸려 있다고 그랬죠.
6단 묵주의 의미는 성모님이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셨을 때 맨 마지막으로 하신 말이
‘5단까지는 다른 이들을 위해 바치되 한 단을 더 만들어 그 한 단은 너의 영혼 구령을 위해서 바쳐라.’ 하셨다고 그럽니다.
그때부터 벨라뎃다 성녀는 돌아가실 때까지 6단 묵주를 썼고요.
지금도 프랑스 신부님들 또 프랑스 신자들은 루르드 성모님의 메시지대로 6단 묵주를 갖고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물론 저도 6단 묵주를 쓰고 있습니다.
그 6단 묵주도 사실은 제가 있을 때 성물방에서 보급했었는데,
그때 당시 주교님이 ‘어디서 갑자기 6단 묵주가 나왔느냐, 괜히 구설에 오르지 말고 팔지 마라.’ 하시어 판매를 중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5단 하신 후 한 단 더 바치면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영혼 구령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는 한 단입니다.
그리고 나무 발판을 수리하면서 언제인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역사를 거기 가서도 왜 안 봤겠습니까?
수리 기록은 없지만 3D로 봤을 때 뭔가 수리한 흔적 같은 것이 남아 있다고 그럽니다.
여러분들 아무튼 얘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그 강의 내용 수정합니다.
이제 오늘 복음 간단히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나병 환자의 위대한 만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천형이었죠.
몸에 반점이 생기고 썩어 들어가고 고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눈썹이 빠지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손과 발이 썩고 서서히 온몸에 퍼집니다.
진행성 죽음으로 죽어가는 것이 나병이죠.
지금은 약이 좋은 게 있으니까 진행되는 것을 멈출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나병 환자들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격리했습니다.
격리된 이 나병 환자는 분명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만나러 마을까지 내려왔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법에 나병 환자가 사람들 사이에 내려왔을 때는 돌을 던져서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이 되지 않았고요,
또 나병 환자가 성한 사람을 만나며 나병 환자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면서 성한 사람 보러 길을 피하라고 알립니다.
‘내가 나병 환자니 길 피하시오, 길 피하시오.’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그야말로 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 불쌍한 존재가 나병 환자였던 겁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던 이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위대한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신앙적인 메시지를 우리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이 나병 환자의 태도를 우리들이 묵상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병 환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기만 한다면 자기를 깨끗이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죠.
라틴어에서 신앙과 확신은 단어가 같습니다.
피뎀(fidem), 피데스(fides) 같습니다.
바리사이와 동네 사람들이 내게 돌을 던져도 예수님만은 기꺼이 맞아주리라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올 때 너무 더러워서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다.’
‘나는 온몸이 만신창이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은 마귀의 소리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완전히 믿었습니다, 확신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말씀을 들을 때마다 또 말씀을 읽을 때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고해 성사를 볼 때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에 대한 확신?
내 영과 육이 치유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나병 환자의 예수님께 대한 확신은 18k의 반짝거리는 겉만 보기 좋은 신앙이 아니라 순금 신앙이라는 얘기죠.
18K 같은 불순물이 있는 신앙이 아니라 100%짜리 24k 순금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시는 한 신체적으로 불치의 병이 있다거나 내 영혼에 용서받지 못할 것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마귀는 확신을 못 갖게 합니다.
이 나병 환자 태도의 첫 번째는 놀라울 만큼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분은 분명히 나를 치유해 주실 분이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고해 성사를 볼 때마다, 또 자선을 베풀 때마다,
봉헌할 때마다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 나병 환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떼쓰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협박하지 않았다 이 얘기입니다.
성서 구절에 의하면 다만 그는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은 자기가 부족한 것을 알고 있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주님 앞에 서면 우리들은 분명히 작아져야 합니다.
입으로는 작아지는 것처럼 얘기하나 실제로는 예수님보다 훨씬 윗자리에 앉아 있을 때가 많지요.
오늘 이 나병 환자는 무릎을 꿇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이 나병 환자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무릎을 꿇었다’는 그리스어로 프로스키네오(προσκυνέω (proskyneo)), 번역하면 신에게 경배했다는 뜻이죠.
우리는 누군가를 존경하면 존경어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예수님 존경하죠?
예수님 만나러 일주일에 한 번씩, 아니면 몇 번씩 평일 미사나 주일 미사에 참석합니다.
누구를 존경할 때는 분명히 존경어도 나와야 하고 존경스러운 행동과 복장도 나와야 합니다.
비싼 옷을 입고 나오라는 얘기는 아니죠.
예수님 앞에 나갈 때 걸맞은 옷을 우리들이 신경을 쓰고 나와야 합니다.
집에서 일하다 막 대충 나오는 그런 모습이 아니죠.
아무튼 나병 환자는 무릎을 꿇고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청원하기 전에 해야 할 피조물의 첫 번째 태도는 무릎을 꿇는 겁니다.
내가 가끔 얘기하죠, 마귀가 우리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지.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하는 첫 번째 경배 행위인 무릎을 못 꿇게 장궤틀을 다 떼 내고 있죠.
교회가 분별력이 없으면은 이렇게 마귀한테 놀아나는 겁니다.
마귀한테 놀아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편리함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큰 문제죠.
먼저 달라고 하기 전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육신의 무릎만이 아니라 영의 무릎도 같이 꿇어야 합니다.
이러한 나병 환자에 대해서 예수님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첫 번째 섬세하게 치유하십니다.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손을 갖다 대시며 ‘내가 너에게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분명히 예수님은 손 안 대고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자이신데 왜 굳이 상처에도 손을 댔을까?
사실 나병 환자에게는 썩어들어가는 육신의 병보다 더 깊은 병 상처가 있었죠.
그건 뭡니까? 가족과 사람들에게 배반당한 배신감, 절망감, 분노, 미움입니다.
내 가족도 내 아내도 이 저주받을 몸뚱어리에 그 누구도 손을 댄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썩어 문드러지는 몸뚱아리의 상처보다도 내면의 상처가 더 깊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유독 나병 환자에게는 꼭 손을 상처에 대시고 치유해 주셨던 겁니다.
터치 테라피즈(Touch Therapies)!
사실 예수님의 행동은 오늘날 의학 지식이라면 감염될 수 있는 무모한 행동을 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얘기하셨습니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그랬죠.
의사에게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도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다만 의술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죠.
그렇기에 정말 제대로 된 의사는 전염병 환자들이 있는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치료하다가 죽을 수도 있죠.
의사로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뜻을 다하고 아름답게 살다 가는 의사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의사가 왕진을 거부하거나 무섭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을지라도
예수님은 그것보다 더한 환자에게도 분명히 상처에 손을 대셨을 겁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네 몸을 사제에게 보여라.’
세 번째는 봉헌령을 내리십니다.
‘모세가 정해준 대로 예물을 드려라. ’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은총 받은 자들의 첫 번째 태도는 침묵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은총 받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 은총을 시궁창에 떨어뜨리려고 기를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사 후에 또 성지 순례 후나 피정 후에 때로는 일상생활 가운데 은총 받을 일이 있을 때마다
첫 번째 우리는 침묵하면서 그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받은 은총에 대한 증언과 간증은 나중에 영광을 드러내야 할 때 용감하게 하게끔 기회를 분명히 주실 겁니다.
그래서 은총 받은 자들의 첫 번째 태도는 좋아서 길길이 날뛰는 것이 아니라 침묵이죠.
그래서 저는 피정 끝나면서 늘 그러죠.
‘적어도 앞으로 일주일 동안 마귀가 더 들끓을 수 있으니 침묵하면서 성경을 봉독해라.
누가 시비를 걸더라도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지 마라.’
은총 받은 자가 침묵을 지킬 때 마귀는 물러납니다.
두려워서 물러납니다.
침묵은 강한 힘이 있다는 걸 알죠.
침묵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을 마귀가 알기 때문에 마귀는 침묵하는 사람에게서는 물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봉헌하라고 하셨죠.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일러준 대로 예물을 드려라.
축복받은 자의 첫 번째가 침묵이면 두 번째는 봉헌입니다.
그 봉헌은 감사 예물일 수도 있고요. 육신 봉사일 수도 있고요. 또는 자기의 재능을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감사해야 합니다.
봉헌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흔한 말로 화장실 갈 때와 나갈 때 마음이 다르듯이 우리 대부분은 침묵과 봉헌을 안 합니다.
천형인 나병에서 치유해 주시고 부탁하신 단 두 마디 ‘침묵해라. 그리고 봉헌해라.’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영적 워드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것을 이론적으로 외우고 있어도 실제로는 안 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까지 나병 환자에게 침묵과 봉헌을 부탁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나병 환자는 자기 몸이 나았다고 신나서 소리 지르고 온 동네를 떠들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그 소식이 동네에 퍼지면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러 오기까지 그것은 정말 확신에 차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나왔지만,
치유 받은 후에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침묵해라.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헌해라.’
우리도 명심하도록 합시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2024년 연중 제6주일 (2/11)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