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시간이다. 시청각교재가 전무했던 그 시절 판서를 하며 설명하는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 필기하는 것으로 수업은 진행된다. 영어선생님이 들어왔다. 총각 선생님으로 인기 최고다.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온 선생님은 교탁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회화 공부를 할 것이다. 녹음테이프를 잘 듣고 따라 하기 바란다." 교탁에 올려놓은 것은 카세트였다. 고가여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 비품이 아니라 영어선생님의 개인용 가세트를 들고 온 것이다.
버튼을 누르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회화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혹여 테이프를 잘못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처음 들어보는 노래다. 음질 또한 라디오에서 듣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신기했다. 노래는 느리게 시작해서 고음으로 이어지며 최고조를 이루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노래가 끝났지만 그 여운은 한참을 머물러 공부를 방해했다.
그날 이후 유행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80년대 초 많은 가수들이 해금되어 가수 활동을 재개했다. 그중 조용필이 대표적이다. 발표하는 족족 히트하는 바람에 라디오를 틀면 으레 조용필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를 배워야 했다. 가사를 외어야 한다. 녹음기가 있어야 가능했다. 시골에서 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곡식을 바꾸지 않으면 마련할 수가 없다.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라디오로는 가사를 옮겨 적기에 역부족이다. 사고 싶은 욕망만 앞섰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애가 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군대 가기에 앞서 잠깐 객지에 나간 형님께서 야외 전축을 사 오셨다. 레코드판으로 재생되는 전축은 음질이 카세트테이프보다 더 좋았다. 레코드판이 문제였다. 읍내에 나가 전파사를 기웃거리며 구경을 했다. 학생이 사기에는 벅찼다. 참고서를 산다는 핑계로 용돈을 받아 레코드판을 샀다. 와일드 캐츠가 부른 '마음 약해서', '오동동 타령', '십오야'의 신나는 반주는 저절로 어깨춤을 추게 했다.
시골에서 놀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다. 춤을 출수 있는 공간은 더욱더 없다. 뒷동산에 오르면 무덤이 있다. 그곳은 잔디로 되어 있어 앉아 놀기에 금상첨화다. 새우깡에 환타, 사이다를 사들고 올라가서 놀다 보면 여학생들도 슬그머니 다가와 합류했다. 과자를 나누어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놀다 보면 해 넘어가는 것도 모를 때가 많았다. 소리통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고고춤을 추었다. 어디서 배운 것도 없이 그저 흔들기만 하면 춤이 되는 것이다. 그 이후 디스코 음악이 대중가요를 독차지했다. 템포가 아주 빨라 미친 듯이 춤을 추다 보면 땀이 흠뻑, 무아지경에 이르러 잠시 행복감에 젖어 들기도 했다.
조용필 노래를 즐겨 부르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1집에서부터 4집까지 사다 듣곤 했던 테이프는 온데간데없다. 이제 불편한 레코드판은 사라지고 테이프, CD를 거쳐 USB, 지금은 휴대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노래를 들을 수가 있다. 참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노래방도 한물간 것 같은 느낌이다. 코로나가 원흉이다. '일편단심 민들레'를 즐겨 부르곤 했었는데 목청 높여 부를 곳이 없다. 넉넉하지 못했지만 행복했던 80년대 그 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