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 17,22-24; 2코린 5,6-10; 마태 4,26-34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어요? 2002년도에 ‘틱낫한’이라는 베트남 스님의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였던 적이 있는데요, 어느 월요일에 제가 혼자 대청댐에 가서 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책에서 스님은 나무를 끌어안는 명상을 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사람 사이에 포옹을 하면, 자기 보호 본능이 작동해서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을 조금 밀어낸다고 하는데요, 나무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끌어안으며, 자기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명상을 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어서서 옆에 있는 나무를 끌어안아 보았습니다. 스님의 말대로 나무는 저를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나무가 저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더 잘 느끼기 위해 눈을 감았습니다. 한참 만에 눈을 떠보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멈추어 서서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묵상은 사람들 없는 데서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자리를 옮겼습니다.
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데요, 가장 큰 가르침은 ‘수동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왜 여기 심겨있지? 다른 데로 가면 안되나? 이런 불평 없이 자기가 심긴 곳에서 한 해 두 해, 고난의 시간에 나이테를 새겨가며 성장합니다. 새들이 오면 가지를 내주고, 사람이 기대면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1독서에서 우리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을 들었는데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인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기 10년 전에, 이미 에제키엘은 바빌론으로 압송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에제키엘은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나와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것을 환시를 통해 보았고(에제 11,22.23), 주님의 성전이 결국 이방인에 의해 짓밟혔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가 이러한 시련을 가져왔다며 회개를 선포하는 한편,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희망 또한 예언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제1독서의 말씀입니다.
“주 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절망의 한가운데서, 에제키엘은 새로운 희망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나무를 비유로 든 것은 아마 (나무가) 바빌론과 이스라엘에 공통적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이고, 유배지에서도 그 희망의 씨앗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교부들은 에제키엘이 예언한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이 예수 그리스도 또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 비유를 드시는데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 역시 로마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유다의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취해 서민들을 착취하고 있던 그 시기에 이렇듯 새롭고 결정적인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그 희망의 표상은 나무였습니다. 우리 주위에, 강 주변이나 산 위에, 누가 심었는지도 모를 나무들이 저절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절로 자라는 나무가 어디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라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처럼, 예수님도 그 나무에 온갖 새들이 깃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는 여러 민족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당신의 씨앗을 심어주셨고, 이 씨앗을 세상에도 심으셨습니다. 내 안에 심으신 씨앗은 자라나, 내가 지금 하느님 앞에 나와 있게 하였고, 세상에 심으신 씨앗은 교회가 되어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두 번의 회심 체험을 했는데요, 첫 번째 회심은 열다섯 살에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온 두 의사의 정성과 그들이 전해 준 교리에 감동하여 신앙에 귀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물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신앙에 회의를 품고 하느님을 멀리했습니다. 사치스럽고 세속적인 생활에 빠졌고, 수녀원에 간 누이동생이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하려 하자 맹렬히 반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파스칼은 어느 날 밤 갑자기 달라졌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왔습니다. 서른아홉 살 때, 자기 집을 병든 한 아이에게 물려주었고 자신은 누이의 집으로 옮겨가 투병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음을 참회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신앙적인 글이 ‘팡세’라는 이름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은 그의 외투에서 메모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파스칼은 이 메모지가 자신의 심장 가까운 데에 위치하도록 외투 안쪽에 바느질을 하여 꿰매어 놓았습니다. 그가 서른한 살이던 해에 쓴 글이었는데, 8년간 그 글을 간직하고 다녔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밤 10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와 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니시라,
확신, 확신, 감격,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이 세상을, 그리고 하느님 아닌 모든 것을 잊어버림…
인간 영혼의 위대함.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저는 당신에게서 떠나있었습니다.
생명의 물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저는 그분을 저버리고, 피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제가 그분을 절대로 떠나지 않기를…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저의 지도자에게 전적인 순명.
지상에서의 잠시의 노력을 통해 얻는 영원한 기쁨.
저는 당신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파스칼은 이날 밤 무엇을 체험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다만 짐작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마음 안에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날 밤 싹을 틔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도 어느 날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례를 청한 날일 수도 있고, 내가 방황을 끝내고 다시 성당을 찾은 어느 날일 수 있고, 부모님 손에 이끌려 유아세례를 받은 날일 수도 있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 씨앗은 싹을 틔우며 자라나고 있고, 나는 지금 하느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심으신 씨앗은 자라나 교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의 모습에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아니라, 수많은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하늘의 새들처럼 깃든 교회,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이역만리 선교지에서 목숨을 바치며, 자신의 임지에서 청춘을 바치며,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 희생하고 봉헌하고 있는 교회, 지금 이 순간 여러분과 제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이 교회를, 하느님은 이 세상에 심으셨고, 교회는 2천 년 동안 자라나 이제 우리가 그 가지에 깃들여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나무를 끌어안는 묵상을 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내가 나무가 되어, 나를 끌어안으시는 하느님을 묵상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해 드립니다. “신앙은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신앙에 대한 보상은 당신이 믿는 바를 보게 되는 것이다.”
파스칼의 메모
출처: Mémorial (Blaise Pascal) — Wikipédia (wikipedia.org)
첫댓글 파스칼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 좋은가? 그렇지 않는 것이 좋은가를 확률론을 써서 계산해 보니, 갖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결론에 얻어 신앙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파스칼 류의 신앙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보니 굉장히 신심 깊은 사람이었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파스카의 내기'라고도 불리는 이 주장은, 파스칼이 신앙을 갖게 된 계기인 것 같지는 않고요, 자신은 이미 하느님을 믿고 있던 상태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유리하다'라고, 비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내세운 주장이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