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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편안하셨습니까?
저는 며칠 전에 대구 이곡 성당에 이제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오후 두 번째 강의하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한 4년 만에 성가를 몇 곡을 불렀었는데,
그래도 생각 외로 코로나 후유증 때문에 망가졌던 성대가 많이 좀 회복이 된 것 같아서,
이제는 좀 노래를 불러도 되겠다는 생각,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서 같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창세기 22장으로 건너뜁니다.
어느 본당에선가 가정 방문을 갔었습니다.
그 집 십자가 밑에 형제가 직접 붓글씨로 쓴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나오는 성경 구절이 아니라 저는 못 보던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밑에 장 절을 보니 창세기 22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수도 없이 그 구절을 읽고 지나갔지만, 이렇게 제가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구절이었던 거죠.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그리고 화선지를 보니 근래에 쓴 글씨가 아니고 꽤 시간이 지난 종이였어요.
그래서 언제부터 저 밑에 걸어 놓았나 물으니, 15년 이상 저 자리에 걸려 있다고 해요.
종이가 바래 누렇게 될 때까지, 꽤 오랜 세월을 십자가 밑에 걸고 그 성경 구절을 늘 봤겠죠.
그리고 재밌었던 것이 부인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집안의 어려운 일 해결하기 곤란한 일이 일어나도, 남편은 항상 ‘야훼의 산에 준비되어 있어,
이미 다 준비되어 있어 걱정하지 말게.’ 늘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들만이 아니라 자식들의 좌우명이 저절로 되었다 합니다.
그 후에 성서 주해서를 찾아보니 나만 몰랐지, 많은 해석이 있는 유명한 말씀이었습니다.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야훼께서 우리 가정 안에서 마련해 주신다.
야훼께서 우리 성당 안에서 마련해 주신다.
아브라함의 신앙 이야기를 시작하며, 그때 그 교우 집 십자가 고상 밑에 걸려 있었던 창세기 22장 14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100세고요. 부인인 사라가 90세 때 독자 이사악이 세상에 나옵니다.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천사에게 예고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순순히 인정했습니까?
아니죠.
100살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그리고 아내 사라도 나이가 90세인데 어떻게 자식을 생산할 수 있을까 하고 웃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조차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거였죠.
아브라함이 이러했을진대 우리 같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이런 말을 들렸다면 어땠을까?
정말 100세 아브라함과 90세 사라가 애를 낳는 것이 생리적으로 가능할까?
그러면서 저는 또 엉뚱하게도 생각해 봤습니다.
혹시 옛날에는 1년에 두 번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사라는 90이 아니라 45살, 우리 어머니도 막내를 40이 훌쩍 넘어서 나셨으니, 가능했을 거야.
이렇게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펼쳐봤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도 않는 이런 혼자만의 생각을 하면서,
90세 때 사라가 이사악을 낳았다는 것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던 적도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무튼 그것은 저 혼자 생각이었었고요. 사라는 9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 부부 자신조차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뭐라고요? 이사악.
‘이사악’은 히브리말로 ‘웃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웃다’
가까스로 100살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의 기쁨과 감사가 아들 이름에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 외아들이 소년이 되었을 무렵 아브라함은 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정말로 큰 시험대에 오릅니다.
‘순명’이라고 하는 시험대에 아브라함은 오릅니다.
그게 뭡니까?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번제’라는 것은 온전한 봉헌의 표시로써 양이나 소들을 한마디로 통구이 하는 겁니다.
배를 갈라 속에 있는 창자와 겉의 몸뚱아리를 좀 속된 말로 바비큐 하듯 바치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기도 안 찰 노릇이었습니다.
차라리 자식을 애초부터 주지나 말지, 눈에도 안 아플 자식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다니!
하느님은 끔찍하게도 이사악을 통구이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성경에는 그 명령에 대하여 반항하거나, 궁시렁거리거나, 나 못하겠어, 이런 얘기는 단 한마디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도 인간이지요.
‘어찌 하느님이 나에게 이렇게 모진 명령을 내리실까?
차라리 팔자에 아들이 없는 걸로 알고 그냥 아들 없이 살았으면 더 좋았을 터인데,
이 귀여운 내 아들을 어찌 내가 내 손으로 죽여서 불을 지를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갈등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마음을 정리했겠죠.
‘귀한 아들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라면 그 아들을 달라고 하니 내가 무슨 권리가 있단 말인가?
다시 도로 돌려달라고 하면 도로 돌려줘야지.’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절대 순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3, 4절에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라고 나옵니다.
하느님 말씀에 놀라 허둥대거나, 처인 사라에게 이 엄청난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마 우리들이라면 ‘하느님 나한테 말한 것 말도 안 된다. 나 절대 순종할 수 없어.
이런 무자비한 하느님이라면 나 차라리 믿지 않겠다.’
아마 별의별 소리를 다 하면서 하느님에게 삿대질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문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한 일을 당할 때가 있지요.
병원에 가서 아무렇지 않게 검사했는데 암이라고 선고받을 때도 있고,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잔혹한 일이 벌어질 수 있나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인생에는 생각지도 못한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웃으며 갔던 아이가 몇 분 후에 차에 치여 즉사했다든지,
화장실에 들어간 아버지가 나오지 않아 문 열고 들어갔더니 돌아가셨다든지,
기쁘게 여행을 떠났던 친구가 여행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든지 이런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아주 드문 얘기는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는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 또 반려자들의 오열이 터져 나옵니다.
또 그것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은 정말 안타까워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이 왜 이렇게 잔인한 일이 벌어집니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 사람들 참 착한 사람인데 왜 저렇게 죽어야 합니까?’
지금도 우크라이나 또 예루살렘에서는 전쟁이 한창입니다.
요즘은 아예 TV에도 잘 나오지 않지만, 유튜브를 보면 지금도 많은 사람이 매일 죽어갑니다.
아이들이 죽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저럴까?
더군다나 이슬람 족속과 유대인 족속은 사실 따지고 보면 한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복형제들의 후손들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아브라함의 경우는 이사악을 누가 뺏어간 것이 아닙니다.
누가 와서 이사악을 죽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기 손으로 자기의 외동아들을 불태워야만 한다는
상상도 못 할 명령을 받은 겁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요구가 있었겠습니까?
이사악이 큰 죄를 범한 것도 아니고, 통구이가 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었죠.
아브라함에게 불신앙의 행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배반한 적도 없는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에 배반에 대한 벌도 아니었던 겁니다.
그냥 무조건 ‘아브라함아, 들어라.’
‘예, 말씀하십시오.’
‘네 아들 나한테 바쳐라.’
앞과 뒤도 없이 무조건 자식을 죽이라니 여러분 같으면 이것을 따르겠냐는 겁니다.
따라 할 사람 있습니까? 여러분 자식 죽이라 하는데?
미쳤냐면서 아마 뒤도 안 돌아보고 하느님을 멀리 떠날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감정이 있는 인간처럼 행동하질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히 순종하여 묵묵히 하느님 말씀에 따를 뿐이었습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분명히 갈등은 있었을 겁니다.
인간인데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성경에는 그것이 단 한 줄도 나오질 않습니다.
성경에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아브라함이 나올 뿐입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맹종, 혹은 노예적인 순종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는 내용이 뭐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공의로우시기에 그 공의로움을 믿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 냉혹할 수가 있는가? 하느님이 이것은 억지 부리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절대로 틀림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보다 절대로 공의로우시다.’
이 절대적인 신뢰, 이것이 바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말보다는 내 말이 맞아. 내 말이 훨씬 더 합리적이야. 인간의 말이 옳다.’
인간 쪽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말은 하느님을 부정하게 보고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라 주장하고 있다는 얘기겠죠.
우리 인생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그 긴 계획 중에는 분명히 옳은 일인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저도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고,
돌아가신 부친도 늘 그 성경 구절을 읽으시면서 인생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헤쳐 나가셨던 구절, 로마서 8장 28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고 나쁜 일이 상호작용하여 선한 결과를 맺게 합니다.’
하느님에게 뿌리를 내리고 산다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죠.
나쁜 일도 많이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그 좋고 나쁜 일이 상호작용하여 결과만큼은 선하게 예비하신다는 성경 구절이죠. 바오로 사도의 신앙입니다.
‘야훼이레’ 그 뜻이지요. 주님은 내 앞길 선하게 예비하신다.
아브라함은 이성으로는 야훼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감정으로는 자식을 통구이로 만들라고 하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저분은 나에게 내 자식에게 선한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믿었죠.
우리 인간은 한 치 앞을 못 봅니다.
시편에 우리는 눈 한 번 깜빡거릴 때 1초도 안 걸리지만, 그분은 눈 한 번 껌뻑거리는 데 천년이 걸린다고 나옵니다.
천년도 그분 눈에는 하루입니다.
한 치 앞을 못 보고 바로 뒤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우리 악한 인간들이 하느님의 그 섭리 그 계획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도 사제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순명입니다.
그렇지만 사제 되는 날 순명 서약을 했기 때문에 순명하고 살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순명하고 살 때가 많았습니다.
동료 사제들은 제게 누구보다도 개성과 성격이 강한 사람인데 주교님에게 저렇게 순명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고 합니다.
교구에서도 신부들 사이에서 순명 잘하는 사제라고 얘기들을 한다고 합니다.
정말 사지로 많이 발령받아 갔었죠.
그렇지만 믿는 것은 하느님께 순명하면 성경에도 나와 있고 교회의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순명의 결과는 분명히 좋은 쪽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저는 한 평생을 ‘싫어요, 못해요.’ 소리를 안 하고 무조건 순명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기적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일어났죠.
이렇게 저는 제 체험을 통해서 느낀 거였기 때문에
‘하느님과 양심과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세요. 순명하면 그때 당시는 알아들을 수 없고
내 합리적인 이성과 충돌하는 명령이지만 결과만큼은 나에게 선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저는 강론과 피정 때 강조하고 삽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이야기는 1편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깊어도 아브라함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도 아무 조건 없이 순명할 수 있을지,
또 순명하고 살아왔는지, 또 앞으로 엄청난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순명할 수 있을지.
‘아브라함의 신앙’하면 떠오르는 것이 ‘순명’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모범’이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닉네임이 붙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브라함이 번제물을 바치는 과정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