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교구의 첫 본당이자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발상지 산정동 성당
광주대교구 최초의 본당. 전남 목포시 산정2동 74 소재.
1897년 5월 8일 수류(水流)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전남 순창군 쌍치면 아천리(阿川里, 현 五龍村)에서
이듬해 7월 2일 목포로 이전하였다. 주보는 대천사 성 미카엘.
복음의 전파와 본당 설립
전라남도 지역에 복음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온 다른 지역의 교우들이
노령산맥 줄기를 따라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이들은 1872년의 ‘나주 무학당(武學堂) 사건’으로
새로운 순교자를 탄생시키면서도 꾸준히 복음 전파에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새로 이주해 오는 신자들로 인해
전라남도 지역의 교우촌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82년 이후에는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에 의해
장성 · 순창 · 담양의 20여 개 교우촌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성당 마당의 예수성심상.1896년까지도 전라도 지역은
전주 본당 · 되재[升峙] 본당 · 수류 본당 등
북부 지역에만 본당 소재지가 있었으며, 남부 지역의 공소들은
라크루(Lacrouts, 具馬瑟) 신부가 사목하는 수류 본당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바로 그 해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전라도 지역을 순방하면서
나바위[羅岩] 본당과 목포 본당의 신설을 결정하였다.
목포 본당 설립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남부 지역의 공소들이
수류 본당과 너무 멀어 사목에 어려움이 있었던데다가
1898년에 개항 예정인 목포 지역의 발전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1897년 5월 8일 데예(Deshayes, 曹有道) 신부가
목포 본당 초대 주임으로,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신부는
나바위 본당 초대 주임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당시 목포 지역에는 100호도 안되는 마을이 있었을 뿐
신자는 한 명도 없었으므로 데예 신부는 우선 아천리 공소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목포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기로 하고,
라크루 신부로부터 순창 · 정읍 · 장성 지역의 공소들을 인수받아
공소 순방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봄 판공을 끝낼 때까지
데예 신부가 순방한 공소는 순창 · 정읍 · 장성 · 담양 · 함평 ·
태인 · 무안 등지의 26개소였다. 한편 1897년 9월부터 아천리 신자들을
목포로 보내 쌍교(雙橋, 현 남교동과 북교동 사이)의 토지와
가옥을 매입하기 시작한 데예 신부는, 이듬해 목포항에서 무안으로 가는
길목(현 목포 산정동)에 있는 산을 매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그 안에 있는 가옥을 수리하여
1898년 7월 2일 목포로 거처를 옮겼다.
초기 현황과 성당 건립
목포로 진출한 데예 신부는 즉시 제물포(현 답동) 성당을 모방하여
성당을 설계했는데, 이를 전후하여 제물포나 경상도 등지에서
목포로 이주해 오는 교우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곧 이어 같은 해 8월부터 비로소 현재의 산정동 성당 부지 위에서
성당 건축을 시작한 그는, 비록 처음의 설계대로는 아니었을지라도
1899년 초에는 아담한 연와제 성당을 완공할 수 있었다.
당시 목포 신자수는 22개 공소에 1,238명이었다.
이 무렵 뮈텔 주교는 1897년 12월에 서품되었으나 병으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이내수(李迺秀,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요양차 데예 신부의 보좌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98년 8월에
목포로 와서 데예 신부와 함께 거처하다가 이듬해 7월에는
무안 우적동(현 몽탄면 사천리 牛跡洞)에 새 거처를 마련한 뒤
그곳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00년에 다시 병이 악화되어 목포로 돌아가야만 하였으며,
데예 신부의 간호를 받다가 12월 20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우적동 본당은 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 신부,
드뇌(Deneux, 全學俊) 신부에 이어 1904년부터
투르뇌(Tourneux, 呂東宣) 신부가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1907-1908년에 투르뇌 신부가 본당을 나주군의 남산(南山, 노안면 용산리)과
계량(桂良, 현 노안 본당)으로 이전하면서 목포 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됨으로써 ‘계량 본당’은 목포의 첫 번째 자 본당이 되었다.
성당 제대.데예 신부는 1898년부터 이미 본당 신자들로
매괴회 · 성의회 · 성모회 · 성모 통고회 · 예수 성심회 등을 조직하여
신심 함양과 봉사 활동에 노력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을 건립한 이듬해부터는 도서 지방 전교를 시작하여
지도군(智島郡) 지역의 안창도 · 도초도 · 비금도 ·
자은도 · 압해도 등지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1년 이후에는 육지 공소의 순방을 우적동 본당 신부에게 맡기고
자신은 주로 도서 지방을 순방하였는데, 이 와중에 그는
1901년에 일어난 ‘지도교안’과 이후의 잦은
교·민(敎民) 사이의 충돌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목포 본당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던 데예 신부가
1909년 5월 1일 뮈텔 주교를 돕기 위해 서울 주교관으로 전임되면서
나주 계량 본당에 재임하던 투르뇌 신부가 목포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계량 본당 주임으로는 카다스(Cadars, 姜達淳) 신부가 임명되었다.
당시 전라남도 지역 중에서 목포 인근과 도서 지역은 목포 본당(18개 공소, 916명),
장성과 나주 일대는 계량 본당(9개 공소, 291명), 그리고 장성과
순창 일부 지역은 정읍의 신성리(新城里) 본당과 수류 본당에 속해 있었다.
1911년에 대구교구가 조선교구에서 분리 ·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이듬해 5월 인사 이동을 단행하여 목포 본당의 투르뇌 신부를
경북 칠곡의 가실 본당으로 전임시키는 대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내정되어 있던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를
임시로 목포 본당에 임명하였다. 당시 샤르즈뵈프 신부는
신학교 교사가 완공되자마자 교수로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건축이 늦어지면서 3대 주임으로 눌러앉게 되었다.
그러자 데예 신부가 매입해 두었던 산정동 97번지(현 성 골롬반 병원 구역)에
새 성당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으며, 1913년 8월 4일에는
드망즈 주교의 집전으로 정초식을 갖는 동시에 언덕 위에 세운
높이 5.5m의 대형 십자가와 성 파트리치오를 주보로 한 종의 축성식도 거행하였다.
이후 성당은 그 해 말에 완공되어 12월 25일
‘성가 광영’(성 십자가 현양)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는데,
이렇게 주보를 정한 이유는 그 해가
‘밀라노 관용령’ 반포 1,6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
시련과 변모
1914년 5월 3일 샤르즈뵈프 신부가 예정대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장으로
전임되면서 마산포에 있던 카넬(Canelle, 間弘模) 신부가
4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그는 그 해 10월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동원되어 귀국하였다.
이후 본당은 제주 한논 본당(서귀포 본당의 전신)에 재임하던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가 겸하여 사목하다가 1915년 6월 7일자로
그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신자수는 2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타케 신부의 전교 노력에 힘입어 1920년대 초에는
약 400명으로 증가하게 되었으며,
1916년 이래로 타케 신부는 제주의 홍로 본당 주임을 겸하였다.
타케 신부의 뒤를 이어 1922년 9월 24일에는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제주 본당 주임을 겸하여 부임하였다.
그는 1926년 5월부터 산정동 본당만을 맡았는데,
이해에 85평 규모의 교실 2개를 신축하여 성심 소학교(聖心小學校)를 설립하였고,
초대 교장으로 새 보좌인 이성만(李性萬, 이냐시오)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 학교는 그 후 1944년 5월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스파이를 양성했다는 죄목으로 폐교되었고,
8·15 광복 후에는 공민학교로 존속하다가 6·25 한국 전쟁으로 완전히 폐교되었다.
주재용 신부는 1931년까지 본당에 재임하면서 교리 교사회와
복사회 등 평신도 단체를 활성화하고 전교에 노력하여
1926년경에는 신자수가 700여명에 이르렀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기념비.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는 1953년
산정동 본당에서 처음 시작되었다.1931년 5월 10일에 드망즈 주교는
전라도 지역을 ‘감목 대리구’(초대 감목 대리 : 김양홍 신부)로 설정하였고,
1933년 7월 6일에는 교황청 포교성성에서 전라남북도 감목
대리구 분리를 승인하면서 전라남도와 제주 지역의 사목을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하였다. 이때 초대 전라남도 감목 대리로는
맥폴린(Owen McPolin, 林) 신부가 임명되었으며,
1937년 4월 13일 광주 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지목으로 임명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1931년 5월 10일 본당에 부임하여 사목하던
7대 주임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는 대구 주교관으로 전임되었다가
1935년 2월에 서울 소신학교로 전임되었으며,
1934년 3월 8일자로 모나간(Monaghan, 牟) 신부가
8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이 무렵 본당 신자수는 921명이었다.
모나간 신부는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 발발과 동시에
총독부에 의해 체포 · 감금되기까지 7년여 동안 재임하면서
무엇보다도 전교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신자수는 1,800여 명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성체회 · 청년회 · 학생회 등의 활동도 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5년에는 산정동 97번지에 400평의 강당 겸 교리실을 신축하였고
가톨릭 문고도 설치하였다. 모나간 신부가 체포된 후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 박문규(朴文奎, 미카엘) 신부,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 등이 차례로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1945년 5월 28일에는 성당이 일본군 사령부로 징발되면서
남교동에 있는 건물을 임시로 빌려 미사를 봉헌해야만 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총독부에 징발당했던 성당을 되찾고
이듬해 8월 24일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본당에 파견되었으나 이후 6·25 한국 전쟁으로 인해
본당은 다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성당은 인민군 막사로 징발되었고,
본당 주임 쿠삭(Cusak, 高) 신부와 보좌 오브라이언(J. O'Brien, 吳) 신부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그해 8월경 대전에서 피살되고 말았다.
목포 수복 후 14대 주임으로 부임한 모란(Moran, 安) 신부는
1951년 4월 9일 ‘경동(京洞) 본당’을 분할함과 동시에
목포 남쪽 지역 및 자은도 공소와 하의도 공소를 이관하고,
목포시로부터 577평을 새 본당 부지로 매입하였다.
이로써 목포 본당은 비로소 2개로 분리되었는데,
경동 본당 초대 주임으로는 김성환(金成煥, 빅토리오) 신부가 임명되었다.
또 모란 신부는 1952년 12월 15일에 ‘성심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이듬해 3월 31일에는 한국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여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였다.
경동 본당을 분할하기 이전의 본당 신자수는 4,262명이었지만
본당 분할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하여 1958년 초에는 6,264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17대 주임 둔(Dunne, 도) 신부는 또다시 본당 분할을 계획하여
북교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그 해 5월 성당을 완공한 뒤 9월 3일자로
‘북교동(北橋洞) 본당’을 두 번째 자 본당으로 분할하였다.
한편 1957년에는 흑산도 진리에 새 부지를 매입하여 사제관을 건립하였고,
다음해에는 그 이웃에 10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11월 11일 봉헌식을 갖는 동시에 세 번째 자 본당으로 ‘흑산동 본당’을 분할하였다.
이로써 산정동 본당의 신자수는 1959년 7월 5일에는
본당 이웃에 ‘성 골롬반 병원’을 개원하였으며, 1957년 1월 21일에는
광주 지목구가 대목구(초대 교구장 : 헨리 주교)로 승격되었다.
그 후 신안군 도서 지역에는 여러 공소들이 설립되었는데,
18대 주임 휴그(Hughes, 유) 신부 때에는 신안군 안좌읍 공소,
19대 주임 모리시(Morrissey, 牟) 신부 때에는 안좌 대리 공소,
20대 주임 브라질(Brazil, 진) 신부 때에는 도초면 도락 공소가 각각 설립되었다.
흑산도 본당 재임 시절에 이미 도초 외남 공소를 설립하기도 한 브라질 신부는,
산정동 본당에 부임한 뒤에도 신축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1966년 5월 29일에 현재의 성당(166평)과 사제관(45평)을 완공하고,
‘대천사 성 미카엘’을 주보로 하여 헨리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본당 신자수는 다시 5,000명을 넘어서고 있었으므로
본당에서는 계속 본당 분할을 교구에 건의하였다.
그 결과 브라질 신부 재임기인 1968년 3월 14일에 ‘연동 본당’이,
21대 주임 캐롤란(Carolan, 車) 신부 재임기인 1971년 10월 25일에는
‘대성동 본당’이 분리되면서 동시에 압해도 · 비금도가 본당에서 분리되었다.
이로 인해 신자수가 크게 줄어 1972년에는 2,254명을 기록하였고
주변 신시가지로 신자들이 이전하면서 1979년에는 2,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가 이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다시 2,000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한편 24대 주임 이재흥(李載興, 힐라리오) 신부는 1978년 10월 27일에
한국 전쟁 때 희생된 광주 지목 브렌난(Brennan, 安) 몬시뇰과
본당 신부였던 쿠삭 신부, 오브라이언 신부의 순교비를
성모상 옆에 건립하여 이들을 추모하였다.
이어 25대 주임 박영웅(朴英雄, 가브리엘) 신부는 1984년 1월 1일자로
신안군의 안좌 공소를 용당동 본당으로 이관하였고,
26대 주임 김성용(金成鏞, 프란치스코) 신부는
1989년 11월 18일에 양로원을 개원하였다.
1986년 10월 19일에는 본당의 ‘매괴의 모후’ 꾸리아가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고,
1988년 4월 5일에는 레지오 마리애 한국 도입 기념비 축성식이 본당에서 거행되었다.
또 28대 주임 김양회(金良會, 요한 보스코) 신부가 부임한 뒤인
1994년에는 산정동 본당 100주년 기념 사업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11월 15일에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기공식을 가졌으며,
1년 6개월 동안의 공사 기간을 거쳐 전시관이 포함된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431평 규모의 기념관을 완공하고
1998년 5월 23일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대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 [출처 : 차기진, 한국가톨릭대사전 제6권] -
-사진은 1953년 5월 31일 레지오마리애가 처음으로 시작된 목포 산정동본당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회합 장면.
레지오 마리애 한국도입 50돌 발자취
"사회복음화 - 교회발전 누룩으로 반세기" 레지오 마리애는 한국에 도입된 지 50년 만에
단원 60만명이라는 거대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성장했다.
레지오 마리애는 한국에 도입된 지 50년 만에 단원 60만명이라는
거대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성장했다굨 사진은 지난 91년
서울 잠실종합체육관에서 열린 '레지오 마리애 창설 70주년 기념 행사'에서
레지오 선서문을 낭독하고 있는 단원들.2. 지난 2월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열린 모자보건법 폐지를 위한 '생명 31' 운동에 참가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촛불을 켜들고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회복되는 사회를 기원하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 도입 50주년 기념 전국 신앙대회가 8일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레지오 단원을 비롯한 5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다.
지난 50년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간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지천명(知天命)의 연륜에 걸맞게 성모의 군대로서
새롭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행사다. 레지오 마리애는 그 동안
한국 사회의 복음화와 교회 발전을 위한 '최첨병'으로서
교회정신에 입각한 공동선 실현에 누구보다 앞장서왔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반세기 여정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짚어본다.
레지오 마리애 도입 전사
'마리아의 군단'이라는 뜻을 지닌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가 창설된 것은
지난 1921년. 빈첸시오회원으로 활동하던 아일랜드의 젊은 청년
프랭크 더프(1889∼1980)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빈첸시오회 활동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영혼을 구하는 복음선교'에 투신할 목적으로 모임을 만든 것이 시작이다.
첫 모임 이름은 '자비로운 성모회'였으나
'성모님 도움에 힘입어 교회가 벌이는 싸움의 최전방에 서는
복음화 첨병이 되자'는 뜻에서 이후에는 '레지오 마리애'라고 개칭했다.
설립 첫해 4개의 쁘레시디움에 불과했던 레지오 마리애는
현재 전세계 2700여 교구 중 2300여 교구에 33만여개의
쁘레시디움이 결성, 1300여만명이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교회 레지오 마리애 도입과 발전 과정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첫걸음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53년 5월 31일.
당시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원이자 광주교구장 서리였던
현(玄) 하롤드 헨리(제5대 광주교구장 역임) 신부는 일본 방문 중
레지오 마리애 한 단원을 만나 주회를 참관한 후 한국교회에 도입을 결심했다.
한국전쟁의 상처로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는 한국교회와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레지오 마리애를
'선교사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이에 현 신부는 입국, 목포 산정동 · 경동본당 신자들과 함께
'치명자의 모후'와 '평화의 모후', '죄인의 의탁'이라는
3개의 쁘레시디움을 만들고, 첫 까떼나를 바쳤다.
이후 레지오 마리애는 선교사의 도구답게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업에 박차를 가해 창단 이듬해인
54년 청주에서 또 하나의 쁘레시디움을 창단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 교구로 확산된다. 창단 후 불과 6년 만인 58년에는
첫 3개의 쁘레시디움을 모태로 성장한 '광주 꼬미시움'이
국가 최상급 평의회인 '한국 세나뚜스'로 승격했으며,
모든 교구 안에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활동할 정도였다.
도입 25돌을 맞은 78년에는 전국에 1830개 쁘레시디움에
7만여명의 단원이 활동하는 단체로 성장, 서울 세나뚜스를 분리 신설했다.
이후 광주와 서울 양대 세나뚜스는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돌을 맞이하는
84년 교세 200만명 달성을 목표로 선교활동을 전개,
85년 목표를 달성했고, 90년에도 교세 300만명을 목표로
'민족 복음화 활동'에 돌입,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 결과 현재 광주와 서울의 2개 세나뚜스,
12개 레지아(서울 · 광주 · 군종교구 제외), 186개 꼬미시움, 1967개 꾸리아,
3만 557개 쁘레시디움, 단원 60여만명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신심 사도직 단체로 성장했다. 이는 전세계 쁘레시디움의
10%를 차지하는 것으로, 세계교회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성장을
'성모님의 기적'으로 평가한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향후 전망과 과제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교회가 벌이는 싸움의 최전방에 서야 한다'는
창립 정신에 따라 입교권면, 방문 선교, 복지시설 자원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 복음선교의 최일선에 선
'병정개미와 일개미' 역할에 충실했다.
한국교회의 괄목한 성장이 단원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레지오 마리애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기도와 봉사활동에 머무는 것에서 한발 나아가 교회 안팎의
현안 해결에 적극 참여하는 등 새로운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교회 최대의 신심단체로 성장했지만
내적 성숙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지적이 그간 제기되었기 때문.
이에 따라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앞으로 '선교의 도구'뿐 아니라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감시자 또는 견제기구'로서
다양한 사회참여 활동을 전개, 사회 공동선 실현의 도구 역할에 더욱 충실할 계획이다.
최근 주교회의가 전개한 모자보건법 폐지를 촉구하는 '생명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 사회정의 구현 △ 생명문화 정착 △ 환경 보전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마련하려는 것도 이같은 연유다.
한국교회 레지오 마리애가 반세기를 넘어
참다운 내적 성숙과 쇄신을 거듭,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가톨릭교회의 '준비된 병정개미'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평화신문, 2003년 5월 4일, 박주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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