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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판놀이 원문보기 글쓴이: 출판놀이
격월간 웹진 『비평공간』 5호
청소년 시집 깊이 읽기 - <동시빵가게> 비평모임
<도넛을 나누는 기분> (김소형 외. 창비교육. 2025)
<이제 호랑이가 온다> (남호섭. 창비교육. 2022)
2025년 8월 17일 발행 / 출판놀이
참석자 1 : 지금부터 청소년 시집 읽기,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다룰 작품은 『도넛을 나누는 기분』과 『이제 호랑이가 온다』 두 작품집인데요. 엄청 더웠죠. 주말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먼 걸음 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편안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청소년 시집 읽기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먼저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도넛을 나누는 기분』 21페이지에 보시면 김현 시인의 작품이 있거든요. 「다음에 이어질 말을 쓰시오」라는 시인데요. 선생님들이 이 시에 뒤에 이어질 말을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시작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쓰시오 / 김현
아침 일찍 일어나 한 방 눈을 맞으며 걸었다.
토끼처럼 노루처럼 개처럼 산이나 해변을 뛰어다니면
좋을 텐데
아파트 단지 벗어나 도로 건너 복개천 따라 다리를 움
직였다.
눈이란 대단해
세상의 높음을 이토록 낮아지게 하다니
세상의 빠름을 이토록 느려지게 하다니
춤을 췄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두 어깨 속에, 팔 다리 안으
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슬픔은 흘러넘치고 기쁨은 흘러나오지
그래서 눈이 오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시 전문은 여기까지거든요.
다음에 이어질 말을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돌아가시면서 해 주실까요? 생각나시는 대로 직관적으로요.
참석자 2 : 인간이란 동물은 아이가 되지
참석자 1 : ‘아이가 되지’좋습니다. 네 이런 식으로 그냥 해 주시면 됩니다.
참석자 3 : 눈을 바라보지
참석자 4 : 눈 쌓인 산을 찾아가요.
참석자 5 : 그래서 눈이 오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참석자 6 : 내일 출근길을 걱정하지, 녹아내리지
참석자 1 : 녹아내리지 사라지지 네, 철학적인 그런 생각을 해 주셨네요. 또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참석자 3 : 같이 춤출 누군가를 찾아가지. 화를 내지.
참석자 6 : 재밌네요. 인간이라는 거
참석자 1 : 저는 모두 지구 밖으로 나가지 라고 생각해보았는데요. 마지막으로 한 분만 더 말씀해주실까요?
참석자 8 : 저는 개처럼 네 발로 뛰어다녔어요. 라고 해 보았어요. 사실 이게 두 번째로 든 생각이었어요. 첫 번째는 너무 우울해서 비밀로 할게요.
참석자 9 : 슬픔은 흘러넘치고
참석자 8 : 죽음은 흘러나오지 그래서 눈이 오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죽어가지.
참석자 1 : (늦은 참가자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인간이란 동물은 늦기도 하지 (모두 웃음)
네 지금까지 본격적인 발언 시간 전에 시 한 편으로 즐겁게 놀아보았습니다.
처음에 『도넛을 나누는 기분』을 먼저 얘기를 하고, 『이제 호랑이가 온다』로 넘어가면 어떨까 싶어요.
먼저 선생님들께서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들 얘기를 나누어보고, 문제가 되는 작품들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도넛을 나누는 기분』이 지금 판형이 다른데요. 페이지가 1페이지에서 2페이지 정도 차이가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시집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 마음에 와 닿은 시는 어떤 시였는지 전체적인 얘기를 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청소년 시’라는 장르만으로 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자리가 매우 의미 있지 않을까 싶어요. 『도넛을 나누는 기분』을 읽으시면서 어떠셨는지요?
참석자 2 : 청소년의 특징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가고 있구나.’ 그렇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좀 많았어요. 잘 나가다가 갑자기 어느 중간을 떼고 휙 가버렸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 좀 많이 보였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집중이 안 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엉뚱한 생각을 하나, 그러면서 찬찬히 보았는데요. 시인들의 시작 노트를 보면 자신의 청소년 시기를 떠올렸다고 했잖아요. 저도 청소년 시기가 있었고 나도 이랬었지 그러면서 조금씩 공감도 됐어요. 개인적으로는 너무 길고 산만한 것보다 짧지만 확 눈에 들어오는 그런 작품을 읽을 때 좀 편안함을 느꼈어요.
참석자 1 : 이 청소년 시집은 모두 성인시를 쓰시는 분들에게 일일이 청탁 과정을 거쳐 모은 작품으로 알고 있거든요. 독자의 특징을 감안해서 썼을 테고, 읽을 때도 청소년들의 이해도나 집중력 같은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 의견도 좀 들어볼까요?
참석자 4 : 앞부분에서는 이게 좀 성인시처럼 애매모호하게 읽혔는데 서윤후 시인부터는 청소년들의 마음에 가깝게 느껴졌어요. 청소년들이 읽으면 공감할 부분들이 보이기도 했고요.
새장과 어항 / 서윤후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대
새를 기르는 사람과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
그렇다면 너는?
우리는 하늘과 바다 그 사이의 평지를
험준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어항이 출렁거려 넘치지 않게
새장이 쏟아져 문 열리지 않게
그렇게 조심히 걸어 나가는 게 삶이래
그동안 잃어버린 새와 물고기는
모두 어디에 모여 살고 있는지
그곳의 도로명 주소는 내 이름이 아닌지
하늘을 모두 읽을 수가 없어서
새장을 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바다를 모두 받아 적을 수가 없어서
어항을 쏟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 대신 살아가는 말들이 있어서
종이를 펼쳐 편지를 쓴다
둥지를 떠난 하늘에게
도착한 적 없는 바다에게
넘어지지 않고 걷는 너에게
<새장과 어항> 페이지 64쪽인데요. 여기서 보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하늘을 모두 읽을 수가 없어서/ 새장을 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부분과 ‘새를 기르는 사람과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그렇다면 너는?’ 하고 묻잖아요. 우리는 그 중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면서요.
그래서 인간으로서 하늘과 땅, 바다 그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과연 나는 어떻게 사는 건가 되돌아보기도 했어요. 마지막 연에서 ‘넘어지지 않고 걷는 너에게’로 마무리가 되는데요. 저도 그랬지만 청소년들에게도 공감이 되겠다 싶었어요.
근데 뒤로 갈수록 어떤 공감보다는 관념이 더 지배하는 것도 같았어요.
참석자 1 : 그러셨군요. 서윤후 시인의 시각이 공감이 되셨던 것 같아요. 근데 저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느껴졌어요.
참석자 4 : 저도 ‘마음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청소년들이 읽으면 내 마음이 어디 있나, 이런 생각이 들겠다 하면서 시를 읽었어요.
참석자 3 : 성인시를 썼던 시인들이 청소년 시 청탁을 받고, 청소년 시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하신 느낌이 들었어요.
참석자 1 : 그렇겠지요. 청소년시란 장르를 처음 접한 분도 계셨을테고요. 자신의 청소년기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을테지요. 많은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요.
참석자 3 : 청소년 시를 어떻게 지어야할까? 저 같아도 그랬을 것 같아요. 청소년 시절을 추억하기도 하고 그 경험들을 떠올려보기도 하고요. 일반 청소년들은 어떤 활동을 할까, 이런 걸 담아도 되나, 이런 고민을 하시는 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을 볼수록 그렇더라고요.
참석자 1 : 네. 충분히 그런 지점이 느껴지죠.
참석자 3 : 어떤 경계를 두지 않고, 굳이 청소년의 경계를 짓지 않고, 성인을 비롯해 누구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이나 불안함에 대한 얘기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은데요. 사실은 청소년 시를 왜 써야 되지? 저는 그런 생각이 좀 들었어요.
지금도 청소년시를 쓸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청탁을 받으면 쓸 수는 있겠지만 내가 동시나 그냥 시를 쓸 때처럼 이렇게 자연스럽게 내 몸에서 나올 것 같지는 않아요.
청소년을 생각해야 하고 청소년들의 고민에 대해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는데 제가 지금 그런 문제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다가가고 싶은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해요. 무엇보다 시를 쓸 때 뭔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써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청소년 시는 앞으로도 못 쓸 것 같긴 한데 모두를 위한 시, 그러니까 청소년들도 읽을 수 있고 성인과 아이들도 같이 읽을 만한 시는 그냥 쓸 수는 있겠다 싶어요. 여기 이런 시처럼요.
참석자 1 : 어떤 시였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참석자 3 : 양안다의 <일기 예보> 시 28페이지고요. 시의 독자가 청소년인 거지요.
친구는 온몸이 다 젖었다고 말했다 / 비를 피하려 무작정 들어간 도서관에서 // 친구의 턱 끝에서 흔들리는 빗물을 본다 // 창가에는 / 흠뻑 젖은 작은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친구는 무릎을 꿇고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 “얘가 이 창문을 발견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 먹구름은 무겁고 어지러운 형태였다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중략)
비를 맞은 두 아이가 도서관 앞에서 비를 피하는데 고양이가 있는 거예요.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안 온다고 그랬는데 비가 그냥 내린 거죠. 그래서 그 고양이를 보면서 둘이 그냥 다정하게 얘기를 나눠요. 그런 풍경이 위안이 되는 그런 대화들이 있잖아요.
“곧 비가 그칠 것 같아, 그렇지?” // 친구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 나에게 동의를 구해서 // “응, 조금만 기다려 보자.” // 고양이가 세상일을 잊은 채로 잠들 때까지 그렇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이런 대화가 들어가니까 좋게 느껴지지 않을까, 저는 그 부분이 그랬어요.
참석자 4 : 저는 조금 다른 의견인데요. 전철 타고 오면서 읽었는데 그 고양이에 대한 마음이 조금 가식적으로 느껴졌어요.
참석자 1 : 어느 부분이 가식적이라고 느끼셨는지 궁금하네요.
참석자 4 : ‘얘가 이 창문을 발견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이런 부분이요.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착한 마음을 끌어내려고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참석자 9 : 저도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을 살짝 받았어요. 청소년을 겨냥해서 썼다는 편견을 이미 갖고 읽어서 그런지 좀 작위적인 부분이 보이기도 했어요. 중간 중간에 친절하게 설명하는 부분들이 많이 보였거든요.
참석자 1 : 그렇죠. 어른의 소리가 들리죠.
참석자 9 : 청소년을 겨냥해서 일부러 풀어주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굳이 이렇게 써야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기획된 시의 한계일 수 있고요.
참석자 8 : 청소년 시집이라고 느끼긴 했는데요. 저는 왜 이 시인들을 뽑았는지를 생각해 봤어요. 제가 편집자라면 가장 핫한 시인들, 가장 젊은 시인들, 요즘 시단에서 이름 좀 있는 시인들, 상 받은 시인들, 그 사람들의 청소년 시는 어떨까라는 궁금증이 당연히 들었을 것 같아요.
참석자 3 : 저는 도넛을 나누는 기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도넛을 나누는 기분 / 유희경
바스락대는 봉투에서
도넛을 꺼내려는
밤의 버스 정류장.
버스는 아직 오지 않고.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아도 좋고.
그런 밤의 버스 정류장.
자, 도넛을 꺼낸다.
그런데 어째서
도넛을 손끝으로 집는 거지.
아슬아슬하게.
까슬
까슬
까무룩
떨어지고 쌓여 가는 설탕 가루.
하얀 그림자를 딛고
발끝으로 서는 기분. 하지만
버스는 아직도 오지 않았어.
여전히 밤의 버스 정류장.
꺼낸 도넛을 반으로 가른다.
집으로 돌아가려 함과
집으로 가고 싶지 아니 함처럼.
정확히 나누었는지 묻지 않기.
버스가 오려는 방향 쪽으로
나란히 시선을 두는 것뿐이다.
반절만 건네고, 반절은 물고.
손끝을 비비면서 털어 내면서.
어디서 났는지 묻지 말기.
마실 거 없는지 묻지 말기.
밤하늘에 별이 있다고
사기 치지 말기. 그저
설탕 가루가 묻은 입술로
휘파람 불기. 밤의 버스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개를 부르듯 이제
버스가 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참석자 1 : 참 좋습니다. 라임도 재밌고요. 진심도 묻어나지요. 저희가 지금 시를 나누는 기분이 저 ‘도넛을 나누는 기분’으로 느껴지네요.
참석자 3 : 현실에서는 밤에 버스 정류장에 혼자 앉아 있는 게 사실은 좀 위험하지요. 그런데 그 시간이 이 시에서는 뭔가 시원하고 행복해 보이는 시간이잖아요.
참석자 7 :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도넛에 묻은 설탕가루를 문지르면서 먹었던 기억이 나서 웃긴 거예요.
참석자 9 : 근데 좀 느끼하지 않나요? 청소년의 입장에서 보면요.
참석자 1 : 시가 느끼하다고 하셨는데요. 서정성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기도 해요. 시는 좀 그러면 안 될까요?
참석자 9 : 청소년이 제 나이가 아니라 10대 중후반이잖아요. 그 아이들의 감수성으로 너무 달콤하고 다정하게 다가가려고 하는 그 애씀이 보였어요. 아이들에게 좀 느끼하게 와 닿지 않을까, 감성적으로 제가 청소년이 아니어서 모르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도 생각을 해보면 이런 식의 어떤 낭만이 낭만 이상으로 쓰인 시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참석자 2 : 청소년 시절에 비관적이고 날카로우면서 비트는 그런 사고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그래요.
참석자 9 : 어른들의 잣대로 보면 거꾸로 이런 게 희망이 아닐까? 이렇게 느껴주기를 바라는 바람에서 이렇게 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좀 들었어요.
참석자 1 : 문학 자체가 주는 그런 정체성이라고 해야 될까요? 이런 시를 좋아하는 학생들도 분명히 있을 테지요. 비틀기가 잘 되어 있는 아주 현실적인 작품도 필요하고요. 그러나 시 자체를 그런 서정으로 보기 보다는 작품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참석자 9 : 반항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성이 다르다는 느낌이죠. 요즘 아이들이 느끼는 도넛이 뭐 설탕가루가 있다. 손가락에 묻은 설탕, 입술로 묻혀 먹고 이런 것이 과연 요즘 아이들에게 낭만적으로 느껴질까라는 의문이 들어요. 다른 청소년들에게 읽혀보지 않아서 현실적으로 어떨지는 잘 모르겠네요.
참석자 3 : 근데 시가 예쁜 것 같아요.
참석자 5 : 약간 소녀적 감성인 것 같고요. 그날 밤에 도서관이 있고 밤늦게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도넛하나를 꺼내서 먹는데 버스가 아주 더 늦게 왔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마음도 잘 느껴지고요. 리듬감이 굉장히 잘 살아 있고 표현도 예쁘고 굉장해요.
도넛을 누구한테 줬을까? 도넛을 잘라서 줄 수 있는 누가 있을까? 상상도 되고요.
참석자 1 : 그렇게 읽으셨군요. 저는 도넛이 나오고 버스가 나오고 뭔가 부스럭대고 이런 것들이 어떤 비유로 읽혔어요. 도넛을 나눈다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어떤 희망적인 것도 될 수 있고 절망적인 것도 될 수 있고 보지 못할 사람이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내 입에 묻은 것이 꼭 도넛의 설탕 가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어쩌면 이 버스가 오려는 방향 쪽으로 내가 보고 있는 것, 그것이 어떤 미련이나 허무함이나 아쉬움이나 이런 것일 수도 있고요. 털어내고 싶어도 묻어 있는 거잖아요. 그런 미련들이요.
묻어 있는 채로 손끝을 비벼가면서 억지로라도 끝까지 떼내고 있는 동안 버스가 올지도 몰라요. 버스가 시가 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뭔가를 기다리면서 먹는 것이 시가 될 수도 있고, 물질로서의 성심당 빵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작품이 올 때까지의 그런 기분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으로 읽었어요.
한 편의 시를 이렇게 다양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다음 선생님으로 가볼까요?
참석자 9 : 저는 하나만 꼽는다면 이 시가 좋았다기보다는 그냥 인상적이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44쪽 조온윤의 「도서부의 즐거움」입니다. 제가 도서부는 아니었는데 어린 시절이 생각나더라고요.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고 그곳에 도서부원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말하지 않아도 돼 / 여기서는 누구도 너의 조용함이 지나치다고 / 나무라지 않거든 // 우리는 각자의 반에서 가장 말이 없고 / 풍경이 되기보다는 풍경을 지켜보길 좋아하는 / 도서관의 도서부원들 // 도서부의 즐거움이란 / 입을 다문 책들이 가지런히 꽂힌 서가를 지나며 / 네게만 들려주는 비밀을 고를 수 있다는 것 // 한 권의 책이 입을 열어 / 열 개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 백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 // 우리는 각자의 반에서 가장 말이 없지만 / 누구보다 빼곡한 문장이 머릿속에 출렁이고 있지 / 어디서든 생각에 잠겨 그 속을 유영할 수 있지 // 뒷자리의 누군가가 네 등을 두드리며 / 무슨 생각 해? 하고 물어 온다면 // 한권의 근사한 책처럼 / 닫혀 있던 마음을 펼쳐 / 네가 가진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겠지
뒷자리에서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리며 ‘무슨 생각해?’ 하고 물어본다면 그 앞자리에 앉은 아이 같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앞자리의 애가 저한테 계속 쪽지 같은 걸 던지고 그러면 또 답장도 안 하고 이렇게 받았던 기억이 나기도 했고요. 이 시를 보면서 청소년 시절을 기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기에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줄 수 있는 시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어렸을 때는 그런 시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 같아요.
계속 청소년에게 말을 걸어주는 시집들이 꽤 나와 있던데 저는 몰랐거든요. 그런 시들이 계속 나와 주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신경이 쓰이는 지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너무 말은 세련되고 좋은데 약간 훈계 같기도 하고, 이 시 안에서 설명이 너무 거슬린다는 느낌이 들어요.
예를 들어서 ‘한 권의 책이 입을 열어 열 개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 아니면 뒤에 ‘한 권의 근사한 책처럼 닫혀 있던 마음을 펼쳐 내가 가진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겠지’ 뭐 이런 식의 정말 유익하고 유의미한 말들이요.
제가 시를 보는 관점은 항상 의미보다는 도서부 안의 어떤 풍경일 수도 있고, 그런 걸 묘사해도 충분히 의미 전달이 될 수 있는데, 뭔가 청소년과 선생님이 같이 쓴 시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제 과거를 돌아보면서 현재 내가 검열을 당하며 써진 시가 아닌가 하는….
그게 꼭 나쁘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요. 청소년 때 뭔가 규정을 내려주고 어떤 의미를 부여해 주는 어른의 역할이 필요하기도 하잖아요. 한편으로는 이런 시를 통해서 양가적인 입장에서 자기를 바라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참석자 1 : 그런 작품들이 몇 작품이 있었지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인들이 정말 이렇게 느껴서 청소년의 마음으로 썼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긍정적인 생각도 들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청소년에게 계몽적인 성격의 글을 꼭 심어놓고 싶다, 라고 생각하고 썼을 수도 있지만, 시인들의 연령대가 그렇게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청소년과 굉장히 가까운 역할을 해 준 것도 같아요.
참석자 9 : 이 시집이 전체적으로는 한 사람이 쓴 시 같은 느낌이 있어요. 내용이 좀 다를 뿐이지 말투나 시를 풀어가는 그런 방식이 한 사람이 쓴 것 같아요.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보편적으로 좀 그런 느낌이 좀 있었어요.
참석자 1 : 되게 날카로우신 지적인데요. 시집 자체가 교육이란 말을 붙여서 나온 거니까 이 교육성이 빠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부분 때문에 청소년 시집이 과연 순수하게 그냥 성인도 읽을 수 있는 시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저도 한 10편 이상 읽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참석자 6 : 이번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몇 문장 써 놓은 게 있어요. 이 시들은 흐르지 않는다. 청소년의 몸은 움직이고 요동치며 어딘가를 향해 간다. 그런데 이 시들은 뭔가 고정되어 있다. 청소년들은 흘러가는데 시는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다. 이 시들은 뭔가 의미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이 시들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애들은 저쪽 방향으로 달려가는데 시는 굳어 있는 느낌이 들어서, 읽으면서 좀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참석자 5 : 앞서 어느 분이 작위적이라고 그랬잖아요. 저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어쨌건 시라는 것은 내가 뭔가를 발견해서 쓰고 싶어서 쓰는 거잖아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 왔거든요.
이 시집이 기획으로 만들어진 시잖아요. 그런 시들은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도넛을 나누는 기분」은 사랑스럽고 좋은데, 다른 시들은 읽으면서 뭔가 이게 무슨 뜻이지, 계속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의미를 찾다가 오히려 시의 제 맛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석자 3 : 청소년들을 위로하려고 이 시를 쓰지 않았다. 나를 이해하고 그래서 이 시를 쓰면서 내가 위로를 받았다, 이런 시인이 있더라고요.
저도 동시를 쓸 때 똑같은 고민을 하지만, 동시를 쓸 때 내가 위로를 받고 치유되는 것 같거든요. 하나의 어떤 힘든 과정이 즐거움이 되고 뿌듯함이 되는 것처럼, 그런 과정들이 묻어나는 아주 다채로운 모습이 나쁘지 않았어요.
참석자 5 : 내가 쓰고 싶어서 썼을 때 정말 자유롭게 쓸 수 있잖아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해서 쓰자 하면, 청소년이란 단어에 닫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참석자 3 : 저는 개인적으로 유병록 시인의 작품이 제일 다가왔어요.
참석자 1 : 네. 한번 읽고 말씀을 좀 나눠볼까요?
참석자 3 : <진짜 솔직히> 38쪽입니다.
떡볶이 먹을 때 / 애들이 안 매운 게 좋다고 해서 / 나도 그렇다고 했다 / 사실은 매운 거 좋아하는데 // 학년 올라가면서 / 다른 반으로 갈라진 애랑 만났을 때 / 잘 지내냐고 물어서 / 그냥 별일 없다고 했다 / 사실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는데 // 상을 받아서 / 반 친구들이 대단하다고 축하해 줄 때 / 별거 아니라고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했다 / 사실은 엄청 자랑하고 싶었는데 //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아서 / 꾹 참았다 // 다들 솔직해야 한다는데 / 그래도 될지 / 진짜 솔직히 모르겠다
참석자 2 : 저도 공감이 많이 갔어요.
참석자 3 : 이 시집에 청소년 시집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잖아요. 근데 이 시집을 <창비청소년시선 50 기념특별시집>으로 다시 내면서 왜 판형이 바뀌었나를 이제 알겠어요. ‘청소년’을 빼 버리면 시로서 매력이 있는 것 같은데, ‘청소년’이 붙어버리니까 해석이 제한되어 읽히기도 해요.
참석자 8 : 시절 시집이 돼버렸어요.
참석자 3 : 표제작 <도넛을 나누는 기분>을 시로 읽으면 너무 좋은데, 청소년 시절 시집으로 읽으면 내 딸이 그 시간에 혼자서 그렇게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좀 불안하기도 하거든요. 청소년 독자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청소년이라는 타이틀을 빼버리면 이해가 더 잘 될 것 같아요.
여기 시들이 다 어렵고 재미가 없었는데요. 유병록 시인의 시는 나에게 다가왔어요. 이 기획을 왜 하셨는지, 이 시집들을 왜 선택했는지도 궁금했어요.
참석자 1 : 그동안에 나왔던 창비 청소년 교육의 청소년 시집이 너무 획일화돼 있었고 교육에 방점이 맞춰져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 시집은 조금 더 색깔을 다양하게 하고 변화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보였어요. 무엇보다 시로서의 몸이 갖추어진 시집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가 지닌 감각과 진정성, 비유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청소년이 이런 시를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점도 좋았어요.
좀 전에 6번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멈춰 있다는 그 말씀도 굉장히 인상 깊게 들었는데요. 저희가 같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동시가 막 팔딱이면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인가 하는 지점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저희가 동시를 썼을 때 계속해서 거론되었던 것이 성인들이 쓴 시보다 어린이 시가 훨씬 낫다, 그래서 동시와 어린이 시의 변별점 문제가 많이 토론이 되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 팔딱임 그것은 또 그대로 살려두되 어른이 쓰는 동시는 그런데로 이유가 있는 것이죠.
청소년 시도 청소년의 현장성, 팔딱임 이런 것들은 또 청소년들만이 쓸 수 있는 것이고요. 시가 가지고 있는 심연이나 깊이 있는 철학적 사고를 버무려서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이 성인이 쓰는 청소년 시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을 해서 이 두 시집을 고른 거고요.
그래서 저는 유병록 시인의 시가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오히려 조금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참석자 3 : 동시로도 볼 수 있어요.
참석자 1 : 아마 동시를 많이 읽고 청소년 시를 많이 읽기도 하셨겠지만 자기 내면에서 이들을 이해하고나온 것 같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시에 이어 쓴 유병록 시인의 산문이 훨씬 다가왔어요.
참석자 10 : 저는 활자로 된 걸 읽을 때 제가 하나의 악기 같은 느낌으로 읽어요.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나한테 다가오는 어떤 것을 느끼려고 생각하면서 읽거든요. 그런데 이 시집은 청소년 시이다 보니 (청소년 시기가 그런 시기이기도 하지만) 너무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있어요. 저는 조금 선명한 걸 좋아해요. 우리 아이들은 그랬을까 뭐 그런 생각하면서 앞으로 크는 아이들도 이럴까? 나이별로 느낌이 이렇게 다 달라지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고른 시는 민구 시인의 「엄마를 이겼다」고요. 70쪽입니다.
엄마를 이겼다 // 총이나 칼이 아닌 말로 이겼다 / 손이나 발이 아닌 입으로 눌렀다 // 코피가 멎지 않은 사람처럼 / 엄마 얼굴이 벌겋게 벌개진 채 운다 // 둘 중 하나가 피해야 끝나는 싸움 // 나는 무릎을 털고 학교를 가다가 / 내 말에 뼈가 있었는지 생각한다 / /생선 가시는 잘도 먹던데 / 내 말을 삼키지는 못하나 보다 // 멍하니 횡단보도를 건널 때 /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올 때 / 전깃줄에 앉은 참새가 날아갈 때도 / 훌쩍이던 뒷모습이 생각난다 // 엄마를 이겼다 / 이겼는데 이긴 것 같지 않다 // 지고 싶지 않았는데 / 이미 나는 진 것 같다 // 엄마가 이겼다
참석자 3 : 여기 엄마는 많이 나오는데 아빠가 한 번도 안 나오네요. 사춘기 때는 역시 엄마가 애증의 관계인가 봐요.
참석자 5 : 제발 자기 삶에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겠지요. 자기 프로그램에 끼어든 엄마 프로그램이 좀 웃긴 거죠. 엄마가 뭘 어쨌다고요.
참석자 10 : 저도 우리 딸도 이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작품이 낯익은 기시감이 들었어요.
참석자 5 : 누구나 느껴서 그런지 모르지요. 어디서부터는 동시에서도 분명 본 것 같은 느낌이네요.
참석자 1 : 아동이나 청소년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보편성인 것 같아요. 엄마를 이기고 싶고 누르고 싶지만 괜히 미안한 감정이요.
참석자 5 : ‘엄마를 이겼는데 이긴 것 같지 않다’ 라는 감성은 아직 어린이들보다 어른의 감정에 더 가까워 보여요.
참석자 10 : 저도 막내딸이 있는데 걔랑 자주 싸워요. 착한 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딸과 부딪힐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시인도 아마 그런 마음으로 쓰지 않았을까요?
참석자 8 : 저는 176쪽 <눈>이란 작품을 골랐습니다. 평소 박준 시인의 작품을 좋게 봤어요.
연안에 내리는 눈들은 좋겠다 / 내리자마자 바다가 되니까 // 마을에 내리는 눈들은 좋겠다 /
내리자마자 사람이 되니까 // 골짝에 내리는 눈들은 좋겠다 / 산그늘을 덮고 봄을 볼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고요. 읽어보면 시가 예쁘잖아요. 너무 좋잖아요.
참석자 9 : 차라리 이 시를 이렇게 3연으로 끝내지 않고 장시로 썼으면 성의가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어요.
참석자 1 : 성의가 없다기보다는 시의 함축적 의미를 독자가 풀어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1연의 눈은 바다였다가 2연은 사람이 되고 난 후 3연에서 봄을 볼 수 있는 눈의 모습으로 이동하잖아요. 그런 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참석자 3 : 청소년 독자를 너무 머릿속에 넣고 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더 멋진 시가 나올 수가 있는데…
참석자 8 : 약간 그런 것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참석자 1 : 그게 느껴지죠. 청소년은 여전히 어려운 독자인 거죠.
참석자 9 : 근데 저는 또 청소년을 겨냥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게 언어 선택을 보시면 ‘산그늘’이 나오잖아요. 그 뒤가 ‘봄을 볼 수 있으니까’ 이런 부분도 시인이 매너리즘에 갇혀서 쓴 것처럼 읽히더라고요.
참석자 8 :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이 시인의 다른 시들을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참석자 2 : 박준 시인을 좋아하니까
참석자 8 : 박준 시인의 시는 다들 비슷했던 것 같아요. 뭔가가 보이는 듯한 느낌보다는 기존의 작법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 같은 것이요.
참석자 1 : 이 시인은 저희가 공부했던 김소월부터 박목월, 정지용, 윤동주까지 시인이 되기 전부터 그런 시인들의 시를 계속해서 필사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셨던 분이고, 본인의 시집에서도 그런 작법들이 엿보이는 부분들이 발견이 되거든요.
베스트셀러 시인이 된 다음에 청소년 시를 써야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시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싶어요.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 시를 어떻게 썼는지는 대략 느낌이 오잖아요. 사실 이런 작법은 굉장히 구조적이고 누구나 패러디 시로도 쓸 수 있는 작품이지요. 어떻게 보면 극과 극을 달리는 작품이 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만약에 제가 이 시를 선택해서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패러디 시의 소재로 쓴다면 몇 년은 활용할 수 있는 시가 될 겁니다. 시인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보아야 할 것인지, 자신의 시 세계를 확실히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소년 시의 화법으로 다시 재탄생시킨 것인지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참석자 8 : 제가 이 시인에게 가지고 있던 기대가 좀 속상하다 정도로 봐 주시면 좋겠어요. 박용래, 백석같은 훌륭한 시인들을 떠올릴 수 있을 작법 같았어요. 이 시집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속상하다는 생각이 좀 들기는 했어요. 시적 형태가 의미적으로 훌륭하다 안 훌륭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제 개인적으로 여기서 이 시는 잘 모르겠다, 잘 안 어울린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참석자 1 : 그러셨군요. 어떤 점에서 속상하셨어요?
참석자 9 : 이 마지막 밑줄 한 줄 때문에요. 정말 이 구조는 아주 식상할 수 있지만 내용은 사실 식상하지 않거든요. 눈들은 좋겠다. 내리자마자 바다가 되니까 눈들은 좋겠다 내리자마자 사람이, 읽었을 때 독자는 ‘이게 뭐가 좋아요?’ 이렇게 자꾸 질문할 수 있잖아요.
근데 뒤에 가서 질문할 게 없어지고 시가 닫혀버렸어요.
참석자 4 : 사실 좀 쉽게 접근하는 방법이에요. 구조적으로 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이긴 해요. ‘바다가 되니까’이런 식의 접근은 너무 익숙하지요.
참석자 1 : 익숙함 속에 함축적 의미를 넣고 구조적으로 맞추느라 아마 시인 나름대로는 굉장히 깊이 고민을 했을 거라고 느껴집니다.
참석자 2 :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시작노트를 보면 작가는 ‘머뭇거림은 자기가 제일 먼저 배운 감각’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뭐 하면 좋겠다 라는 식으로, 오히려 이 시를 통해서 작가의 그 머뭇거림을 솔직하게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참석자 1 : 좋습니다. 너무 좋은 의견들이 많이 나와서 시간이 모자랄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럼 이제 다음 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황인찬 시를 읽어볼까요? 황인찬 시인의 시를 읽어주실 분 계신가요?
참석자 5 : 새가 되는 꿈을 읽어보겠습니다.
새가 되는 꿈 / 황인찬
너는 왜 그렇게 이상하게 걸어? / 친구가 물어봤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 그냥 걸은 건데 / 어쩌라는 건지 / 그래서 나는 새가 되어서 날아가기로 했다 // 올려다보는 애들을 지나 / 네모난 학교와 지루한 동네를 지나 / 아주 자유로웠다 // 공중에선 걸음 거리로 무슨 말을 들을 일이 없었지 / 다른 새들이 먼저 와서 날고 있었고 / 그 애들과 꺄루룩 놀다 보니 금세 밤이었다 / /누구랑 놀다 왔어? / 엄마가 물어봤는데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서 / 꺄루룩,이라고만 답했다 //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건 / 비밀이 늘어난다는 뜻이군 // 하지만 엄마에게 / 이제 나는 새예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그냥 걸었다 / 마음대로 걸었다 // 그냥 새처럼 걸었고 / 그게 좋았다
참석자 1 : 어떠셨어요?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데요.
참석자 4 : 황인찬 시인이 그림책을 쓴 게 있거든요.
참석자 1 : 원본은 시이고요. 그림책으로 나온 거예요. 시 그림책이지요.
참석자 4 : 그 그림책과 좀 비슷해요. 이 시에서는 ‘까루룩’에서 모든 이야기를 다 품고 있는 서사가 느껴지기도 하고요.
참석자 5 : 이 시에서도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비밀이 늘어난다는 뜻이군’ 이 부분이 굉장히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석자 9 : 이 시집에 있는 시들의 공통점이 자꾸 설명이 들어간다는 특징들이 있어요. 기획의 의도였나 싶을 만큼요.
참석자 1 : 혹시 청소년이 읽다가 이 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겠어요.
참석자 9 : 교과서에 있는 정지용 시나 그 외 다양한 시인들의 시는 더 어렵잖아요. 사실 압축적이어서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이들 나름대로 해석을 하거든요.
참석자 8 : 맞아요. 선생님 말씀처럼 부연 설명을 좀 많이 넣어준 것 같아요. 자기를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좀 들었어요. 청소년기에 자기는 분명히 다 알았을 텐데 그런 거 없어도 다 이해했을 텐데, 어른이 된 이 시인들이 그때 자신을 잊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은 괄호를 넣어줘야 제대로 괄호 안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거란 걸 잊어버린 것 같아서 조금 아쉽기는 해요.
참석자 1 : 「등에 쓴 이름」은 어떠셨어요?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잠들면 / 귀신이 등에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적고 간대 // 그건 오래전부터 애들 사이에 전해지는 소문 // 그런데 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 / 꾸벅꾸벅 졸면서 // 깨워야 할까 / 말아야 할까 // 고민하는 동안 깨어난 너는 날 보고 웃었지 //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 귀신의 마음을
참석자 8 : 재밌게 읽었어요.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란 부분에서는 귀신의 마음이 다르게 읽히기도 하고요.
참석자 1 : 황인찬 시는 시작노트에 밝혔듯이 퀴어 시인이기 때문에 청소년 시절에 자신의 퀴어적인 부분을 담아 쓴 작품이 대부분이거든요. 시인이 겪었을 상처나 상황의 이미지를 다시 고려하면서 읽는다면 해석이 더 다양하게 다가올 작품이기도 해요. 시 자체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지만 시인을 알면 작품에 대해서 훨씬 이해가 잘 되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기존의 시 작법도 좋았지만 청소년시가 작품이 더 깊이 있게 다가오기도 하고 그 아픔이 좀 배가 되더라고요. 이 시도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장난처럼 등에 쓴 이름이 그냥 등에 쓴 이름처럼 느껴지지 않으실 겁니다. 서두에 이 시집에 등장한 시인들의 성격이 비슷하게 느껴진다고 하셨는데 황인찬 시인을 이 꼭지에 넣은 이유가 보이기도 하고요. 아마 사회적 시선을 다양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넣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석자 2 : 저는 신미나 시인의 <주머니>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주머니 / 신미나
못생긴 내 손 / 뭉툭하고 굵은 내 손 // 남들이 볼까 봐 / 부끄러워 /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 너는 내 손을 끌어다 / 주머니에 넣었지 // 주머니 속은 새둥지야 / 너의 어두운 마음도 슬픔도 품을 수 있어 // 어두운 데서도 / 네 슬픔이 환히 보인다 // 네가 끌어다 쥔 내 손 / 작고 못생긴 내 손 // 주머니 안에서 따뜻했지 // 새알을 쥔 것처럼 두근거렸지
주머니 속에 새 둥지라는 표현이 너무 좋더라고요. 설명해버리는 부분도 있지만 그 따뜻함이 느껴져서 좋아요.
참석자 6 :「더빙 영화」 읽어 볼게요.
더빙 영화 / 성다영
동네 놀이터에서 놀았다 / 별로 안 친한 애들도 있었다 / 편의점에서 음료수도 사 먹었고 / 이제 집에 가는 일 말고 남은 게 없었지만 / 아무렇게 벗어놓은 교복처럼 / 그곳에서 흔들거렸네 / 의심스럽지/두 단어가 나란히 있는 거 / 이렇게 마지막쯤에 시작되는 것도 / 너 되게 불량해 보여 / 그렇지만/게임이 아니라면 어떻게 진실을 말하겠어 / 우리 중에 좋아하는 애 있지 / 가정은 시시하고 / 남자애들에게는 관심 없어 / 있잖아 나는 진실 게임을 이해하지 못해 / 나도 / 너 따라 해도 돼? / 우리가 아는 것들이 / 이 풍경에 걸려 있어
시를 읽으면 그림이 그려져요. 청소년 때 진짜 시간은 많고 할 일이 없었던 기억이 너무 많거든요. 결국 놀이터에서 빈둥거리는 건데, 얘네들도 이런 것 같아요.
이제 놀다 둘만 남았잖아요. 벗어놓은 교복처럼/ 그곳에서 흔들거렸어. 애들이 집에 가려고 그러니까 그네가 흔들거리는데 의심스럽지/ 두 단어가 나란히 있는 거, 난 이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 두 아이가 단어가 되어서 이렇게 딱 있는 이 느낌이 너무 재미있게 다가왔어요. 왜 청소년 시기에 그런 거 있잖아요. 이성적인 끌림이 있는 애 둘이 할 말도 없는데 단어가 돼서 딱 앉아 있는 거,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단어라는 상징은 무수하게 대체될 수 있고 또 그 의미가 고정돼 있지 않은 느낌이 들거든요. 어른 시 쓰라고 하면 편한데, 아이들 시 쓸 때는 어른의 목소리와 아이들 목소리가 갈등하는 중간 지점이 있잖아요. 근데 어른 목소리는 당연히 어떤 의미를 담아내려고 하는 쪽으로 들어가는데, 아이들은 사실 나 교육해 달라는 생각은 없지요. 아이들 목소리는 어른들이 굳이 의미를 넣으려고 하지만 의미를 해체하고 자기감정에 더 사로잡혀 있어요.
아이들 목소리의 흐름과 달리 어른들 시는 아무래도 의미를 담아야 되는데 그 의미라는 거는 되게 고착되고 고정된 의미를 주잖아요. 의미라는 개념 자체가 그래요. 그 관념이라는 게 되게 폭력적인 거거든요. 사실은 듣는 이에 따라서는 어른들 목소리가 개입되면서 시가 이렇게 몸이 움츠러들고 굳어지는 느낌이 들잖아요. 근데 아이들 목소리는 계속 흐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른의 의미하고 아이들 목소리에 실린 감정이 뒤섞이면서 잘 흘러가야 되는데, 「더빙 영화」 보면서 이시가 이런 두 방향 사이를 넘나드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이 둘이 딱 만나면서 거기서부터 흔들리는 그림이 그려지는 거에요. 두 애가 단어가 돼가지고 딱 둘이만 있는데, 뭔가 불량해 보인다는 느낌이 오는 거예요. 이 감정선의 흐름이 참 좋았어요. 이 시인이 어떤 시인인지는 모르겠는데 작품이 재미있었어요.
참석자 1 : 극찬해주신 작품이니 시인의 이름을 다시 호명하고 갈게요 성다영 시인의 「더빙 영화」고요. 깊이 있게 또 읽어주신 덕분에 다시 살펴볼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부분이 아마 시의 감각이지 않을까 싶어요. 아이들의 현실과 시의 감각이 잘 어우러졌을 때 시의 완성도가 높아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른과 아이의 시선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도 안 되고 또 너무 감각적이어도 관념으로 흘러갈 수가 있는데 그 중심을 잘 잡은 시에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근데 실제로 쓰기에는 알면서도 참 어렵죠. 이런 밀도 있는 감정들을 어떻게 잡아낼 수 있는지 이런 부분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감정이고 또 그걸 잘 읽어내 주신 선생님께서도 아주 감각적이라고 느껴지네요.
참석자 6 : 청소년들 둘이 앉아 있는데 할 말은 없고 정말 막 가슴은 뛰고 그런 게 있잖아요. 각각 단어가 됐다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 시인은… 깜짝 놀랐어요.
참석자 1 :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상황에 알맞은 단어로 구획을 지어주면 어떤 발견에서 나오는 감탄이 나오죠. 시를 쓰는 분들도 꽤 오래 고민을 하게 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혹시 『도넛을 나누는 기분』에서 얘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다면 잠깐 시간을 좀 드릴까요? 없으신가요? (침묵)
그럼 다음 시집으로 넘어가도록 할게요.
이제 『호랑이가 온다』 남호섭 선생님의 시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이 두 시집을 대척점에 두고 보고 싶었어요. 22년도에 서평을 썼던 적이 있어서 저도 제 서평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왔거든요. 서평에 보면 서론에서는 전체적으로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상처는 봉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져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시인의 목소리가 낮게 들리는 것도 같다. 또 전체적으로 사라진 것들을 호명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서사가 이 시집 전체에 존재합니다. 수전 손택의 말을 빌려 썼던 부분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사회적인 문제는 개인의 문제다. 수전 손택은 ‘태어나는 모든 이들은 이중의 시민권을 갖는다. 건강한 이들의 왕국에서 하나, 병든 이들의 왕국에서 하나, 라고 하면서 적어도 얼마 동안은 이중의 시민권 사이에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고 했다. 건강한 것은 무엇이든 좋다. 문제는 병든 이들의 왕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직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전에 사라져 간 생명들과 부당한 사회에 맞서야만 하는 어른들이 해결하지 못한 일을 나열하기도 벅차다. 이 시집은 그런 벅찬 슬픔을 겪는 사람들을 호명한다
참석자 2 : 선생님 말씀대로 잊혀지거나 상처 입거나 그런 인물들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항상 1위는 다 기억하는데 2등이나 3위는 잘 모르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여기에 드러난 인물이 의외로 잘 몰랐던 인물을 드러냄으로써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위안부 문제라든가 세월호 같이 잊혀지지 않게 드러내고 청소년들도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의도를 갖고 쓴 시라는 게 좀 도드라지더라고요.
「이번 시즌은 망했다」 너무 재미있었어요.
읽어보겠습니다.
이번 시즌은 망했다 / 남호섭
우리나라 프로 야구계에서는 이런 말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지
이종범의 별명은 ‘바람의 아들’ 그 아들도 프로야구 선
수가 되었다 고졸 신인으로는 역대 최다 안타 최다 득점을
기록하면서 날마다 ‘바람의 손자’의 활약상이 언론에 대
서특필됐다 당연히 그해 신인상을 거머쥐고 이듬해 연봉
은 307.4퍼센트나 인상된다
그러나 그런 바람의 손자에게도 슬럼프는 오게 마련, 코
치에게 조언을 구하고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도 돌아오
는 말은 걱정 마 너는 잘될 거야, 아무 도움이 안 됐다 그런
어느 날 집에서는 절대 야구 얘기를 꺼내지 않던 바람의
손자가 이렇게 물었다 아빠 야구 어떻게 해야 슬럼프에서 벗어
날 수 있어요?
잠시 아무 말 않고 빙긋이 웃기만 하던 바람의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시즌은 그냥 망했다고 생각해라
이 한마디뿐이었는데 다음 경기부터 바람의 손자 방망
이에는 공이 딱 딱 잘 맞았다고 한다
‘망했다’ 란 말에서 뭔가 해소 되는 느낌이 들어요. 코치에게 조언을 구하고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도 돌아오는 말은 걱정 마. 너는 잘 될 거야.
이번 시즌은 그냥 망했다고 생각해라. 이 한마디뿐이었는데 다음 경기부터 바람의 손자 방망이에는 공이 딱딱 잘 맞았다고 한다.
참석자 3 : 사실 이런 시가 좀 쓰기 어려운 시인 것 같아요. 꾸미거나 하는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갔다가 쓰는데 막 감동이야 이렇게 느껴지기가 쉽지 않잖아요.
참석자 9 : 사실 그대로를 쓴 거예요.
참석자 10 : 저는 이 책이야말로 철저하게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그런 책으로 잘 기획이 된 느낌이 들었고요. 첫 번째 작품이 「백두대간」인데 이 백두대간이 첫 번째로 온 것에서부터 이 다음 이야기들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백두 대간 / 남호섭
곰 한 마리가 / 지리산을 탈출했다 // 사람들 마을에 둘러싸여 / 섬처럼 갇혀 있던/지리산 // 끊어진/산길을 잇고 /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 곰 한 마리가 / 백두산으로 뻗은 / 길을 찾았다 // 오소리 너구리 담비 / 멧돼지도 가고 / 호랑이가 온다 / 그 길을 따라
우리의 설화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국토, 그런 문제들까지 전체적으로 쫙 펼쳐 놓았어요.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올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기차표>에서는 손기정 선수가 기차표를 보여주면서 우리는 항상 남쪽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 뒤로 가면 어떤가를 상기시켜요. 위에서 막히지 않았으면 유럽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고요.
아이들에게 꼭 권해주고 선물해 주고 싶은 책이예요.
참석자 1 : 선물해 주고 싶다는 찬사를 보내셨네요. 「백두대간」이 여는 시인데요. 제목처럼 호랑이가 많이 등장하기도 해요. 「사랑」이란 시가 인상적이었어요.
사랑 / 남호섭
뱅골 호랑이 한 마리 / 인도의 한 동물원 둘레를 / 몇 주째 맴돌고 있었습니다 / /(오십 년 전에도 그런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동물원에 사는 암컷에게 눈을 떼지 못하더니 훌쩍 울타리 안으로 뛰어든 수컷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둘이 만나 새끼를 낳고 새끼가 또 새끼를 낳고) / 너른 영토 버리고 /용맹도 다 버리고 / 제 발로 창살에 갇히고 싶은 / 호랑이를 위해 /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 호랑이 우리로 통하는 / 작은 비상구는 /일생에 딱 한 번 / 사랑에 눈멀 때 / 그렇게 열렸습니다
저희 동네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이 아마 뉴스에도 났었는데요. 표범이 동물원에서 탈출한 사건이 있었어요. 호랑이는 나오지 않았지만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표범이 동물원에서 탈출했을 때, 사육사가 먹이를 주고 문이 살짝 열려있었는데 그 사이 어미가 탈출했었던 사건입니다. 탈출한 표범은 곧장 사살이 되었어요. 사실 사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필 퇴근 시간에 동물원을 탈출하는 바람에 사살이 되는 너무 안타까운 사건이었어요. 그 모습이 생각나서 마음이 많이 아팠거든요.
참석자 9 : 듣고 보니 낭만적인 시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낭만도 다양한 색깔이 있잖아요.
전체적으로 이 시인의 어떤 낭만성이 저에게는 청소년을 떠나서 다가오지 않았어요. 시가 너무 확연해서 거부 반응이 일기도 하고요. 한편으로 이런 시가 또 읽혀지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렇지만 너무 진지하잖아요. 호랑이라는 소재도 그래요. 호랑이의 역사성이나 어떤 지역적인 여러 가지 의미 부여를 많이 하잖아요. 국토, 민족처럼 거기에 의미 부여하는 것 자체가 저는 낭만성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과연 요즘 아이들에게 그렇게 와 닿을까요?
호랑이를 떠올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배경 지식에 의해서 길들여진 학습처럼 호랑이를 떠올려서 단어를 들었을 때 연상되는 게 다르잖아요. 교육적으로 이런 색깔의 언어, 말투, 분명함, 역사적인 어떤 뭐랄까 자료가 될 수도 있는 역사를 재미있게 접근하게 시킬 수도 있고요. 여러 장점이 있는 너무 좋은 책이긴 한데 시로서는 사실은 좀 모르겠어요. 시로서만 본다면 주관적인 내면의 세계가 더 그려질 때 시답다고 느껴지는 건 편견인가요?
참석자 2 : 아니에요. 약간 정보를 주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참석자 9 : 그리고 말하기의 방식도 언급하자면 산문적으로 시를 썼잖아요. 근데 이렇게 연을 나눌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서술하는 방식의 말투, 이런 것도 사실은 기성 시인들, 외국 시인들도 그렇고 되게 무성하게 이야기를 막 하고 있어요. 촘촘하게 쓰여진 시들이 재미있는 방식으로 말하거든요. 근데 이분의 시는 이미 이 자체로는 훌륭하시지만 조금 낡은 말하기의 방식이고 나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느껴져요.
참석자 1 : 오히려 호랑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상징성 때문에 편견을 가질 수는 있는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사랑」이라는 시라든지 「호랑이 시식회」 같은 작품을 보면 오히려 호랑이가 가지고 있는 거대하고 강하고 뚜렷하거나 무섭고 이런 것보다는 그 반대의 성향에 있는 시들이 훨씬 더 등장하거든요.
참석자 9 : 이런 점에서는 이 시가 감동적이었어요. 트로트를 들을 때 막 감성이 일어날 때가 있잖아요. 근데 왠지 싫은 거 있잖아요. 나는 트로트는 안 쓴다니까, 근데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어, 이런 느낌처럼요.
참석자 7 :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있어요. 진짜 그럴 때 있어요.
참석자 1 : 트로트는 자꾸 따라 부르기 좋은 반복되는 리듬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나올 때가 있잖아요. 주차하면서 잠깐 들었을 뿐인데 자꾸 입으로 나오잖아요. 라디오에서는 클래식이 나오고요.
참석자 6 : 본인이 먼저 알아요.
참석자 1 : 그래서 몸이 먼저 아는 좋은 시다, 란 결론으로 가나요? 이제 작품 얘기로 좀 돌아가 볼까요?
참석자 4 : 그러면 제가 「윤이상의 요강」을 한번 볼게요.
앞부분 생략하고요.
1917년의 일이다. 그해 윤이상이 태어났다, 이 부분 지나서 <윤이상의 요강> 끝 부분을 읽어볼게요.
유품 중에 어린 윤이상이 쓰던 /조그만 놋쇠 요강도 전시돼 있다 /동글동글 온음표를 닮은 듯 / 달 항아리를 닮은 듯 /조명을 받아 어여쁘기도 하다 // 고 앙증맞은 요강 뚜껑을 열고 / 쫄쫄쫄 볼일을 보던 꼬마는 / 그러나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제가 윤이상 인물 이야기를 했고 최근에 윤이상 테마공원에 있는 기념관도 다녀왔는데요. 마지막 장면에서 좀 아쉬운 부분이 있었어요. ‘쫄쫄쫄 볼일을 보던 꼬마는/그러나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렇게 끝내버리는데 이 대목에서 사실 역사적으로 더 마음 아픈 장면이 있거든요.
이분이 통영에 오려고 했는데 당시 정부에서 허락을 안 해줘서 오지 못했어요. 통영이 그리워서 일본에서 배를 타고 최대한 올 수 있는 데까지 와서는 바다 한 가운데서 통영을 바라보면서 아마 울었을 거예요. 일본에서 최대로 올 수 있는 그 경계까지만 올 수 있었잖아요. 지금 듣는데도 눈물이 나요.
그리고 <김형률>에 대한 시도 제가 직접 만나봤거든요. 이 시에 보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지고 그 피해로 방 안에만 있었다고 나와요. 제가 봤는데요. 몸무게가 37kg 밖에 안 나가요. 핵폭탄 피해자 2세라는 사실을 최초로 세상에 밝힌 인물인 만큼 지금도 8월 6일이면 기념사업을 하고 있어요. 제가 좋게 생각한 부분은 이런 거예요. 우리가 모르고 있던 역사적 사실이나 잊혀지면 안 되는 이런 분들을 시에서라도 살려냈다는 점이었어요.
참석자 1 : 김형률의 시와 더불어 역사적 사실을 쓴 부분을 긍정적으로 보셨군요. 이제 한두 편 정도만 더 얘기를 하고 마쳐야 될 것 같은데요. 이 청소년 시집에서 꼭 발언하고 싶거나 인상적이었던 시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참석자 6 : 남호섭 선생님이 이 시집 전체에서 얘기하고 싶은 부분도 좋고 잘 읽었어요. 그런데 좀 미안한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개인적으로 느낀 점은 할아버지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생물학적인 할아버지의 문제를 얘기하는 게 아니예요. 우리가 볼 때는 세상을 떠난 훌륭한 시인들은 다 청년으로 느껴지거든요. 문학사에 남는 그 시인들이 100살 200살이 됐어도 생생한 청년으로 느껴지지 할아버지로 안 느껴지거든요. 근데 아쉬운 부분은 이 시집의 분위기가 뭔가 계몽을 하려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많이 느껴져요. 이런 느낌을 반감시켜 주는 끝부분에 실린 「나는 느리다」를 한번 읽어볼게요.
나는 느리다 / 남호섭
하고 싶었던 말은 / 꼭 지나고 나서야 떠오르고 // 눈물은 흘려야 할 때를 놓쳐 / 늘 뒤늦게 흐르고 / 말도 느리고 / 걸음도 느리고 / 생각도 느리고 // 느린 내가 / 느릿느릿 / 꽃피는 봄길을 간다 // 팔랑팔랑 나비 뒤로 / 작은 꽃들 웃는 게 보이고 / 쉬엄쉬엄 가 / 대지의 조용한 목소리도 들리고
이 작품은 오히려 깊이 있는 할아버지라서 좋아요. 따뜻함도 있고.
참석자 5 : 시인 목소리가 느리거나 시가 안 좋다는 게 아니라, 나이가 느껴진다니까 드리는 말씀인데요. 이미 생물학적 나이를 절감하고 계신 것을 드러낸 것 같아서, 벌써 그럴 때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참석자 9 : 이 시도 늙고 젊음을 떠나서 단어 선택이나 시를 구현하는 방식이나 이런 것들이 익숙하긴 하지만 이 시가 좋다고 느껴지는 지점이 분명히 있어요. 이 시집에 나오는 숨겨진 이야기들은 매체에서 분명 보았을텐데요. 더 재미있게 조금은 엉뚱한 방식으로 쓴다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아요. 호랑이라는 소재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 같고요.
참석자 3 : 굳이 청소년 시집으로 묶은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볼 때는 동시도 있고 성인시로 보아도 무방하거든요. 그리고 뒤에 일부러 청소년 시집이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몇 편 더 배치해서 넣었구나 싶은 작품이 있는 것도 같아요.
참석자 1 : 동시로 묶기에는 조금 묵직한 사건이 많이 등장을 하지요. 오히려 어린이도 알아야 할 사건이라는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 같아요. 청소년이 될 아이들과 청소년, 성인까지 모두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읽혔어요. 동시로 다루기에 너무 신랄하거나 날카로운 사건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다큐적인 작품 사이에 호랑이 서사도 있고 역사적으로 아픈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요. 세월호나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이나 멸종되는 생명에 대한 직접적 언급도 있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기다립니다」라는 작품에서 드러나듯이 우리에게 오는 모든 호랑이를 지켜보며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기다립니다> 이 시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들르는 장애인의 서사가 담겨있는데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한 ‘다 큰 언니’를 계속 기다리려야 하는 남자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어요. 기다리는 것에 대해 묘사가 잘 되어 있어요. 화장실을 가기 위해 오르막을 가는 그 시간,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의 걱정이 너무 선연하게 나와요. 장애인을 동일성과 이타성같이 이분법적인 패러다임으로 나누지 않았어요. 그냥 지켜보는 거지요. 시를 읽는 동안 그 침묵의 더께가 굳은살을 만들어주길 바라게 되더라고요. 우리는 그들의 굳은살이 되어주지 못하니까요.
지금 이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이 읽었으면 하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꼭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참석자 10 : 덕분에 청소년 시를 읽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돼서 좋았어요.
참석자 9 : 저도 까마득한 옛날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시 청소년을 볼 수 있었어요. 청소년 시도 저를 돌아보는 정말 필요한 작업이기도 한 것 같았고요. 이렇게 계기가 돼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참석자 3 : 저는 박성우 시인의 「난 빨강」 이후, 처음 청소년 시집을 읽었어요. 그동안 내가 읽을 생각을 왜 못했지?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읽을 기회를 갖게 돼서 좋았는데, 글쎄요. 앞으로도 내가 청소년 시를 쓸 기회나 뭐 이런 건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이런 정도의 시집이면 읽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참석자 9 : 저는 이 시집이 인기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해 보니까 저는 김소월도 좋아하고 윤동주도 좋아했지만 일기장에 적어놓은 가장 좋아하는 시는 롱펠로우의 「인생예찬」같은 시였거든요. 고등학교 때 그 시는 굉장히 명료하고 선명하고 힘차고 뭔가 그런 기상이 느껴지는 시잖아요. 이런 시들이 좀 많이 나오면 좋겠다 싶었어요. 좀 씩씩한 시요.
시들이 항상 유행을 타는 것 같은데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일 수도 있다고 볼 수 있겠고요. 의외로 아이들의 정서가 뭔가 힘차고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참석자 6 : 이렇게 모여서 시를 감상하는 우리가 희귀한 사람들이 되는 것 같아 좋았어요. 이런 시간을 계속 가졌으면 좋겠어요.
참석자 1 : 오늘 너무 무더웠는데요.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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