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 선지자는 그가 전하는 말씀만이 아니라 그의 삶 일거수일투족이 다 메시지였다. 다시 말해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그의 삶이 결코 따로일 수 없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가 살고 싶은 방식의 삶을 선택할 재량권이 없었고 심지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1.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 하라고 했지만 예레미야에게는 아예 결혼하지 말라고 하신다. 호세아를 통해서는 음란한 여인을 사랑하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음란하듯 우상숭배 하는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경우는 얼마 안가서 바벨론의 군대에게 짓밟히고 유린당할 예루살렘에 살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 큰 고통이 예상되는 일이기에 선지자의 삶을 통해서 임박한 국가적 위기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진실함을 그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시기 위함으로 보인다.
2.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인분으로 빵을 구워 먹으라고 하신다. 먹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서 390일 동안 오른쪽으로, 유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40일 동안 왼쪽으로 모로 누워 자라고 하신다. 잠자는 것도 하나님이 간섭하셨다. 아내가 죽었는데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는 개인적인 감정표현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낮과 밤을 막론하고 이사 가는 사람처럼 이삿짐을 가지고 들락거리라고 하신다. 거주이전의 자유? 선지자에게 그런 것은 사치다. 선지자의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의 삶 모두가 메시지이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징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왕에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실량이면 우주선처럼 생긴 이상한 비행 물체에 에스겔을 태워서 이동시키셔도 될 것인데 그 안에서 손 같은 것이 쑥 나와서 에스겔의 머리채를 거머잡고 이동시키신다. 이것이 에스겔 입장에서 얼마나 위태롭고 아슬아슬했을까? 또 머리끄덩이를 붙잡힌채로 끌려 다니는 것이 당사자에게 기분 좋은 느낌이었을까? 하지만 기분의 호불호를 따질 계제가 아니다. 부름 받은 선지자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처럼 보인다. 때리면 맞아야 하고 모욕을 주면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 부름 받은 자의 삶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어야 하기에 내 것 이라고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분으로 빵을 구워먹으라는 지시에 항거하는 에스겔의 투정이 새삼스럽다. 또 그걸 소똥으로 대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오히려 감격스러울 정도로 고맙다.
예레미야의 경우도 그렇다. 썩어서 아무데도 쓸데없이 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유브라데 강가 바위틈에 파묻으라고 하시고는 여러 날 후에 그 상태를 확인하라고 하신다. 참으로 허망해 보이는 일을 시키시기도 하지만 예레미야는 군소리 없이 시킨 데로 다 한다. 사촌에게서 밭을 사라고 하신다.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나면 이스라엘 본토에서 안전하게 살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지만 사고파는 이유와 목적도 하나님의 결재사항이었다.
첫댓글 성경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인간이 얼마나 악한 지를 보여주는 책이 예레미야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를 보여주는 책이 에스겔서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지자와 같은 설교자가 필요합니다
아니 말씀을 듣는 저희들도 그래야겠죠,,,,
선지자적 사명을 갖고 설교하시는 분이 귀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