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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구- 안순화
고향을 떠난 후 아버지에게 계금마을은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한 해에 두어 번 열병을 알듯 몸져누우면 허깨비 같은 소리가 아버지 입속에서 웅얼거렸다
'가자 가자 계금마을로 가자!'
'가자 가자 김만식이 집으로 가자!'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때도 아버지 허깨비 소리는 꼬장꼬장해져만 갔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아버지 허깨비는 더 앙칼져 무엇이든 쓱쓱 베어낼 것만 같았다.
50년 만 이였다. 고향을 다시 찾은 건, 넘어지면 코 닿는 곳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어도, 고향은 늘 가깝고도 먼 거리였다. 달라진 거라곤 곰바우에 계금 마을이라는 글귀가 아로새겨진 것이 전부였다. 추수가 끝난 광수 밭 가장자리에 곧게 뻗은 단풍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오랜 세월은 키만 했든 단풍나무를 하늘 끝까지 키워 놓았다. 해가 지고 달이 떴다. 맥을 놓고 달을 쳐다보고 있자니 달도 말없이 '나는 다 보았소' 하는 면상을 하고 나를 찍어내려 보는 듯했다. 움찔했다. 50년 전 달빛에 비친 어린 나의 손은 온데간데없고, 노인이 된 손위에는 검버섯이 거뭇거뭇 자라고 있었다. 무섭게 자라고 있었다.
50년 전,
그날 밤 유일한 목격자는 보름달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보름달은 마당 담벼락에서 서너 발치 떨어져 있는 감나무를 막 지나쳤고 마을 회관을 허겁지겁 지날 때는 마을회관을 저만치 따돌리고 가고 있었다. 어둠을 뚫고 어둠을 밝히며 계금산 저쪽으로 서둘러 가고 있었다. 매일 오가던 길이였지만 12살 남짓 된 아이 혼자 가는 밤길은 낯설고 음산했다. 허둥지둥 내딛는 발걸음은 이미 정신을 놓고 비뚤거렸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계금산도 꼭 그만큼씩 멀어지는 듯했다.
'철커덩 철커덩'
걸음을 뗄 때마다 손에 들린 작은 철제 상자 속에서 철커덩거리는 쇳소리만 났다.
'철커덩 철커덩'
철커덩거리는 쇳소리는 가슴에 척척 달라붙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을 때, 광수 밭 앞에서 발길은 뚝 뚝 끊기다 곧 멈추었다. 계금마을과 계금산 중간쯤에 광수 밭이 있었다.
'그래, 계금산 대신 광수 밭이여'
추수가 끝난 광수 밭에는 참깨 대가 무리지어 엎질러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그것들은 마치 시체 무덤 같았다. 머리칼이 곤두섰다. 반쯤 나간 정신으로 땅부터 파기 시작했지만, 손가락은 자꾸만 헛짓만 해댔다. 등줄기에는 비 오듯 땀이 쏟아졌고, 손톱에서는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땀은 한기를 몰고 왔고 손가락은 칼에 베인 듯 아려왔다. 손이 탈곡기처럼 덜덜 떨렸다. 손가락이 얼어서 온 떨림인지, 아려서 온 떨림인지 아니면 뇌 속에서 일어난 공포탄 때문인지 손가락은 사방팔방으로 털털거렸다. 고라니 한 마리는 묻고도 남을 크기의 구덩이에 들고 온 상자를 넣고, 흙이든 잡풀이든 돌멩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는 흙을 덮고 또 덮었다. 흙을 밟고 또 밟았다.
달아 달아 밝은 나의 달아
계금산에 은빛 금빛 흩뜨리는 나의 밝은 달아
무엇을 보았든 아무것도 보지 않은 나의 밝은 달아
무엇을 보았든 아무것도 보지 않은 나의 밝은 달아
쉬쉬 쇳소리만 입안에서 울컥울컥했다.
내 고향 계금마을은 내가 태어나고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마을 입구에는 곰바우가 있었고, 마을 뒤편으로는 계금산이 있었고, 마을을 끼고 흐르는 계금강이 있었다. 곰바우는 곰의 형상과 비슷해서 곰바우였다. 곰바우를 위한 전설 같은 구전 따위는 없었다. 친구 광수와 나는 어른들 눈을 피해 곰바우에 오줌을 내리갈기기도 했다. 어른들 몰래 하는 나쁜 짓만큼 재미나고 신명 나는 일도 없었다. 집집마다 곰바우에 음식을 올렸고 형편이 나은 집은 몇 푼의 동전도 올려놓고 무사안일을 빌었다. 큰 걱정 작은 걱정 어느 것이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우선 곰바우에 얼굴부터 들이밀고 볼 일이었다. 작은 벽촌이었지만 하루가 멀다고 올려지는 음식이나 돈으로 보아 집집이 한가지 근심은 날것으로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간혹, 칠흑 같은 밤에 곰바우에 촛불이라도 켜지면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다 함께 마음을 모았다. 계금마을을 떠나기 전날 밤 나는 곰바우에 초를 켰다. 지키고 싶은 마음과 놓고 싶은 마음들이 뒤엉켜 녹아내리는 촛농은 분명 눈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계금마을 이장이었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아버지 김만식만큼 내 일처럼 발 벗고 나선 사람도 없었다. 집에는 늘 마을 사람들이 들끓었다. 부엌은 마을 사람들이 오며 가며 놓고 간 채소와 과일들로 넘쳐나 질식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의 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모이고 고마움도 가슴 시리도록 차올랐다. 눈은 황소 눈만 했고 코는 어른 주먹만 해서,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재물복 들어오는 복상이라고 했지만, 아버지 재물복은 끝내 집안을 일으키지 못하고 살림은 해가 갈수록 쭈글쭈글해져 갔다. 이장은 하는 일에 비해 성과가 없는 잡일이 많았다. 철이네 개가 강아지를 6마리나 낳은 것도 아버지는 빠짐없이 안내방송을 했다.
'여러분. 주민 여러분' 낡은 방송기기 때문에 굵직한 아버지 목소리가 깨져 나왔다
'가을걷이도 끝났고, 호미씻이도 끝냈습니다' 찌이직'
'감사와 축복의 마음으로 마을 잔치를 열고자 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이 마을 잔치 날입니다. 찌이찌이찍찍
'공고문은 마을 회관에 붙여 놓았습니다.' 찌이직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 젠장' 찌지 직. 찌지 직직...
금요일 오후부터 마을은 벌써 잔치 분위기였다. 마을 한쪽에서는 돼지 잡는 소리로 계금산 계금강을 들었다 놨다 하자 우리 모두의 마음도 위로 아래로 옴팡지게 날뛰었다. 잔치판에서는 늘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바쁜 법이었다. 온종일 심부름하는 착한 아이, 온종일 입에 잔치 음식 달고 다니는 먹보 아이. 온종일 이집 저집 그냥 막 돌아다니는 대책 없는 아이, 마을에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착한 아이 대책 없는 아이 사이를 오갔든 바쁜 하루가 지고 있었다. 나는 계금산으로 급히 갔다.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오늘도 알듯 모를듯한 미소로 나의 가슴으로 거침없이 파고들 것이다
계금산 입구에 두 개의 무덤이 있었다. 모양이면 모양 크기면 크기가 판에 찍어 놓은 듯 닮아 있었다.
'모양새로 보아 한날한시에 죽은 노부부의 묘일 것이여'
'아님. 금실 좋았든 젊은 부부의 묘일 것이여'
'아님.... 묘일 것이여'
'할배 할매 묘가 틀림없을 것이여'
광수와 나는 근거 없는 갖은 이유를 대며 함부로 지껄여 됐다. 별 장난감 없이도 무덤 두 개만으로 하루를 났다. 풀떼기를 많이 먹은 날은 이 무덤에서 저 무덤으로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놓았고 볕 좋고 공기 맑은 날은 벌러덩 무덤 위에 누워 노래를 부르거나 낮잠을 잤다. 다행이고 천만인 것은 백골은 늘 말이 없었고 우리의 장난질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밤마다 꾸는 꿈은 더욱 요상하고 괴기해 져갔다.
노을이 은은히 지고 계금산도 얌전을 빼물고 있는 저녁이었다. 나는 무덤에 등을 기대고 스케치했다. 그림 속 젊은 여자가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웃고 있었다. 여자의 눈에는 슬픔과 사랑이 교차했다. 그림 속 여인은 성질 급한 여자이자 독한 여자가 분명했다. 마을 아이들 모두에게 있는 흔한 여자였지만 나만 없는 재수 옴 붙은 여자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라고 불러 볼 기회마저 뺏은 독한 여자가 틀림없었다. 노을이 가슴께도 뭉글뭉글 지면 그 독한 여자가 목이 메고 목이 미어지도록 그리워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적이 수백 번은 차고 넘쳤다.
'경식아, 내일 입을 네 옷도 가져오렴 ' 아버지가 안방과 건넛방 사이에 있는 대청마루에서 다림질하고 있었다. 다림질에도 능숙한 아버지였다. 바느질 솜씨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옷장에 걸린 옷이라곤 군데군데 땜빵을 하거나 색이 바랜 헌 옷이 고작 이였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새 옷은 못 입혀도 더러운 옷은 절대 입히지 않았고 기운 옷은 입혀도 구멍이 나거나 떨어진 옷을 아들에 입히면 큰일 나는 줄 아셨다. 아버지는 부엌살림에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끼니마다 갓 지은 새 밥이 올라오는 것은 별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손끝에는 어머니의 손맛이 싱싱하게 살고 있었다.
'경식아, 내일은 동네 잔챙이들만 단속하면 돼 광수 하고.'
지난번 마을 잔치 때, 머리에 버짐만 가득한 중학생 형들이 잔치 술을 거덜 냈다. 술만 곱게 마신 것도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빈집에 불을 내고 말았다.
'넹'
'술통만 철통같이 지키면 되는 거여'
'넹'
나의 대답은 냉랭했다. 곧 국민학교를 졸업하니 이젠 어린 티를 벗어나야만 했다.
광수는 곰바우에 오줌을 휘갈기면서,
'물 탄 술을 주는 거지'
'술 대신 오줌을 주는 거지' 형들을 골탕 먹일 생각에 영식이가 갈긴 오줌 줄기는 높이 높이 솟아올랐다.
육 학년 때 광수와 나는 같은 반이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광수 숙제는 나의 몫이었다. 대리 숙제로 자연스레 복습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나의 성적은 곧 꼴등을 면하고 곧 중간을 넘어섰다. 급기야 나는 반에서 일 등 밑까지 치고 올라갔다. 성적이 오르자 아버지의 자식 자랑도 끝없이 올라갔다. 광수는 답례로 군것질거리를 나에게 주었고 나의 입은 날로 고급 저만 갔다. 난 광수 때문에 껌도 좀 씹어 보았다. 초콜릿을 처음 먹어본 것도, 바나나를 처음 먹어본 것도 커피를 처음 마셔본 것도 다 광수 때문이었다. 가끔은 담배도 가져왔다.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는 재미는 쏠쏠했고 영원할 것만 같았다.
광수는 당당했다. 반에서 꼴등을 해도 당당했고, 동네 형들에게 면바구를 먹어도 당당했고 아버지 배치기에 매타작당해도 당당했다. 배치기는 체벌이라는 이유로 광수를 폭행했고 훈계라는 이유로 광수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배치기의 폭행이 있던 날이면 나와 광수는 계금강으로 갔다. 광수 몸 여기저기에 먼저 생긴 멍, 새로 생긴 멍 자국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배치기의 패악질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자 광수의 상실감과 마음의 상처도 깊어만 갔다. 광수가 아무리 독해도 이제 겨우 열두 살 어린애였다. 옥이야 금이야는 아니어도 아들 마음 끝, 손끝 하나 되지 않은 아버지 김만식에 비하면 배치기는 악마였다. 살아있는 악마였다.
'경식아' 광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응'
'경식아'
'응'
광수의 '경식아'는 소리 없는 눈물이었고, 응응대는 나의 소리도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광수야, 울고 싶으면 울어. 속이라도 시원하게'
'사나이가 눈물은.' 붉은 저녁노을이 광수 눈에 가득 들어찼다.
우리는 울지 않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모래 위에 우정이라는 글씨를 꾹꾹 눌러 새기고 지웠다. 빛나는 우정이라 다시 쓰고 다시 지웠다. 불멸의 빛나는 우정이라 고쳐 쓰고 다시 고쳐 지웠다.
'가슴에 꾹꾹 새겨 놓았다' 광수가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가슴을 열어 볼 수도 없고. 야물게 새겨놨나!'
'야물게 새겨놨다.'
영원불멸 우정, 왕 빛나 우정, 우정 우정... 우리는 낄낄대며 마을로 돌아갔다. 별빛 아래 까까머리 두 개가 타박타박 계금마을로 돌아갔다.
배치기는 계금군에서 손안에 꼽히는 몇 안 되는 부자였다. 그가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축적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그는 짤막짤막했다. 다리도 짤막, 팔도 짤막 목도 짤막, 가방끈도 짧았다. 유일하게 긴 것은 그의 탐욕과 욕심뿐이었다. 그는 베푸는 법은 몰라도 후려치는 법은 귀신같이 알았다. 어려운 이웃에게 쌀알 하나 거저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런 배치기가 아버지에겐 귀한 쌀도 내주고 귀한 고기도 내주었다. 배치기가 아버지에게 거저 줄 리가 없었다. 분명 빼먹을 게 있으니 쌀도 주고 고기도 준 것일 것이다. 배치기가 아버지에게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배치기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배치기만 왔다 가면 아버지 낮 빛은 어두워졌고 며칠씩 앓아누웠다. 그리고 아버지의 중얼거림도 늘어만 났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중이 떠나야지'
토요일 아침이 되자. 동네 아주머니 하나둘 이마에 독을 이고 몸을 좌로 우로 흔들며 마을 회관으로 줄지어 들어섰다. 독 안에는 작년에 담은 곡주며 어제 갓 담은 단술이 찰랑찰랑 흥을 돋우고 있었다. 아버지도 귀한 약초 주를 가지고 왔다.
회관에는 가마솥이 걸리고 가마솥 뚜껑이 걸렸다. 가마솥 안에는 돼지 넓적다리와 우거지를 넣은 우거지 돼짓국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고, 파전, 해물전, 생선전 등이 차례로 가마솥 뚜껑 위에서 지글지글 부쳐지자 내 마음도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지글지글 지져졌다. 부글부글 마음이 끓어오를 때면 돼지국밥이 생각났고 지글지글 마음이 지져질 때면 모둠전을 먹고 싶어진 것도 그 잔칫날 이후였다.
'모두 평안들 하시죠. 오늘은 하늘도 구름 한 점 없네요.' 아버지 안내방송이 나왔다
'말이 많으면 배만 고파지는 법이죠. 그래도 몇 가지 전달 사항은 하고 끝내겠습니다'
'찬조금, 찬조품을 보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김 영감 밤 두 말, 경주댁 땅콩 한 말, 영식 모친 찰떡. 인절미. 개피떡 그리고 구판장 오씨 탁주 두 말.... 김만식 약초주 일병.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아버지 연설은 엿가락 늘어나듯 늘어났고, 김만식이 연설하든 말든, 사람들은 웅성웅성 되고 있었다
"끝으로, 우리 아들 김경식가 이번에도 전 과목 백 점을 받아 꾸만요. 박수 박수 박수' 광수만 손뼉을 쳤다
'만식이 아들 사랑은 전국구여'
자랑은 아버지 몫이었고 부끄러움은 늘 나의 몫이었다.
마을 사람 모두의 얼굴에는 욕심도 욕망도 다 뺀 순진한 가을 웃음이 가득 넘쳤다. 들녘에 가득 핀 들꽃처럼 주홍빛 황금빛 얼굴들은 행복으로 가득하였고 여름내 농사일로 배인 군살들도 어설픈 몸놀림으로 춤 삼매경에 점점 빠져 갔다.
기름진 음식으로 속이 능글거렸고 술통을 지키는 일도 긴장감에서 벗어날 무렵 마을 회관 앞으로 검은 자동차 3대가 연거푸 지나갔다. 자동차 구경은 읍내나 가야 볼 수 있는 귀한 구경거리였다. 광수 집에도 자동차는 없었다. 나와 광수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근무지 이탈, 술독을 벗어나 큰길가로 나갔다. 자동차들은 먼지를 풀풀 날리면서 계금산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젠장' 광수는 헛발질을 해댔다
'누구 차여' 나는 회관을 힐긋힐긋 봤다. 술독이 걱정되었다
'두고 봐. 나는 마을에서 제일 좋은 차를 타고 다닐 거야'
'내가 첫 번째로 광수 차를 타는 거지'
'두고봐'
'세차는 경식 한테 맡겨'
'두고 보라지'
광수는 사뭇 진지했고 나는 생각 없는 말들만 내뱉었다.
'퍽'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나의 뒤통수에 손바닥 탄환이 날아왔다. 동네형이었다
'어, 이게 누구여' 동네 형의 손에는 술주전자 두 개가 댕그랑댕그랑 매달려 있었다.
'아이고 우리 피라미들' 동네 형이 광수 앞으로 다가갔다.
광수도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눈깔 깔아' 동네 형이 건들거리자 주전자도 건들건들했다
광수는 눈깔 까는 대신 눈깔을 뒤집었다. 흰 눈깔만 희번덕거리자 눈깔을 깐 건 동네 형이었다.
'운 좋은 줄 알아. 오늘 마을 잔칫날만 아니어도 너희 제삿날이여.'
'주전자에 곡주나 넘치게 담아와. 정미소로 가져와.'
'퍽. 퍽' 동네 형 주먹이 연타로 나의 뒤통수에 사정없이 팍팍 박혔다. 욕지거리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올라왔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제삿날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머저리' 생채기 하나 없는 광수의 머저리, 동네 형들은 못 들은 척하고 가던 길을 갔다.
동네 형 주먹질도 차별했다. 힘 있고 돈 있는 아버지를 둔 광수 머리를 골라 피했갔고 돈 없고 힘없는 아버지를 둔 나의 대갈통만 그들의 동네북이었다. 나의 차진 욕설은 나의 입속에서만 까불어 됐다.
회관으로 다시 돌아왔을 땐, 어른들 몇몇은 아예 곯아떨어졌고 여기저기서 쌍욕도 흘러나왔다. 마을잔치는 웃음으로 시작해서 싸움으로 끝나는 경우가 과 반사였다. 나와 광수는 곡주 두 주전자와 전 나부랭이 몇 개를 들고 큰길로 나왔다.
'광수야, 정미소는 이쪽'
'정미소는 무슨 정미소'
정미소 반대쪽, 계금산으로 광수는 걸어갔다.
'술은'
'잠만 말고 따라와'
'그려. 우리가 저거 졸개도 아이고'
우리는 낄낄, 깔깔대며, 동네 형들을 씹어대며 계금산으로 올라갔다. 검정 자동차 3대가 먼지를 펄펄 날리며 마을로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두고 봐, 읍에서 아니 군에서 가장 큰 차를 몰고 다닐 거여'
광수는 자동차를 타고 세상 끝까지 가고 싶다고 했다. 배치기가 없는 세상으로 가로 싶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계금산으로 가는 내내 우리는 자동차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른이 되면 덤프트럭 운전사가 될 것이라 했고 광수는 덤프트럭도 하나 사야겠다고 말했다.
계금산은 철 따라 꽃을 피우고 계절마다 산나물과 땔감을 내어주었지만. 작년에는 사람을 둘씩이나 잡아먹은 흉산이기도 했다. 마을에서 노망난 영감이 산으로 딸을 만나러 간다고 들어가서 아직도 나오지 못했고, 이웃 마을 젊은 청년은 백 년도 넘은 소나무에 목을 매기도 했다.
'어, 여기 있든 봉분이 어디로 간 거여'
어제까지 나란히 있든 무덤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배치기 말이 참말이어라'
며칠 전 읍내에 갔다 온 배치기가 서울 선상들이 계금산 초입에 있는 무덤 두 개를 곧 이장한다고 하셨다.
'이장하는 날이 오늘이어라.'
'마을 잔칫날'
'염치도 없는 서울 선상들' 광수가 혀를 끌끌 차며 손에 들고 있는 술을 한 모금 벌컥 들이마셨다. 예고 없는 이별, 머리엔 지가 났고 마음엔 울렁증이 일어났다. 작별인사도 없이 가버린 백골이 벌써 그리워졌다.
'이제 경식 광수는 누구한테 떼를 쓰고 누구한테 미주알고주알 속내를 털어놓나요. 할배 할매요.' 내가 울먹거리자 말없이 술만 마시든 광수는 머리를 도리질해댔다. 배치기의 폭력과 폭언을 들었을 땐, 백골들도 마른 눈물까지 짜내야만 했을 것이다.
'마셔봐.' 주전자 하나를 광수가 내밀었다
'경식아.'
'응'
'내 곁에 오래오래 있어 줘'
'알겠어'
'할배 할매 처럼 말없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면 안 돼'
'알았다고'
주전자가 바닥을 드러나자 광수 혀는 더 꼬부라져 갔다
'경식아, 난 네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거여. 팥메'
우리는 절대 믿음의 표현을 팥메라 했다. 팥으로 메주를 써도 믿는다는 뜻이었다
'광수야. 난 네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할 때가 태반이여! 콩메'
절대 믿지 못할 일에는 콩메라 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술은 거덜 났고 광수 혀는 완전히 꼬였다.
'어라 웬 상자여.' 풀과 흙으로 덮여 잘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작은 상자 하나가 있었다
'서울 선상들이 놓고 간 모양이네'
'어라, 상자 속에 금덩이가 있네. 최소 세개' 광수가 상자를 흔들자,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광수. 너는 점장이 빤스를 입은 모양이지.'
'금덩이여. 서울 선상들 체면이 있지, 최소 금덩이지'
나도 흔들어 보았다. 묵직했다. 금덩이 같았다.
'이장님께 갖다 드려. 서울 샌님들이 내일 찾으러 올 거여. 상자를 돌려주는 대가로 내일 거래를 터는 거지. 상자 돌려주고 차 한번 얻어타고'
술만 취하면 아버지는 어머니 사진을 꺼내 닦았다.
'자네는 걱정을 말아. 우리 경식이 반에서 또 일등을 했어. 내가 우리 아들은 대학교는 꼭 보낼 거요'
우리 집 형편에 중학교 진학이 더 급한 문제였다.
'아들 어머니께 인사드려'
나를 낳고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사진 속 그녀는 가슴 시리도록 젊고 아름다웠다. 오늘따라 아버지 주름은 더 깊게 파여 보였고, 듬성듬성 흰 머리카락도 자라고 있었다. 액자 여기저기에 아버지 눈물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 눈물이 나의 마음을 후벼 파고 들어갔다. 아버지는 어미 없는 내가 불쌍해 눈물 흘렸고 나는 아내 없는 아버지가 너무 애처로워 와락 쏟아지는 눈물을 참았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 앞에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여'
'상자예요'
광수와 내가 계금산 잎 구에 있는 무덤을 이장한 자리에서 주어 온 거라 설명했다
'이게 뭐여'
'금덩이래요'
감은 아버지 눈이 번쩍 떴다.
'금똥이'
'아뇨. 금덩이요'
'금떵이'
'자네가 금떵이를 보냈구먼' 아버지가 어머니 사진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 아들 이제 대학은 문제없겠네. 고마워 자네가 보낸 거였구먼' 두 번째 입맞춤은 액자도 뚫을 기세였다.
'서울 선상들 상자예요. 서울 샌님들 것이에요, 아부지'
'순이 씨 우리 아들 이제 대학물 제대로 먹어보는 거여'
'서울 선상이 낼 찾으러 온대서요. 아부지'
'우리 거여. 너 등록금 밑천이여'
아버지는 다락방에 꼭 숨겨 놓으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자 아버지 코 고는 소리는 폭탄을 퍼부었고 나의 머릿속엔 생각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아들을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아버지였다. 아들을 위해서 금덩이쯤은 눈도 끔쩍 않고 꿀꺽할 것만 같았다. 기꺼이 일을 낼 것만 같았다. 머리가 통째로 폭탄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도둑으로 만들 순 없었다.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자. 계금산에 다시 갖다 놓자.'
나는 자정이 넘자 홀로 계금산으로 갔다. 계금산이 흉산만 아니었어도 상자는 원래 위치로 되돌려 놓을 수 있었는데 목맨 옆 마을 총각만 아니었어도 계금산까지 갈 수 있었는데, 나는 광수 밭에다 상자를 묻고 돌아왔다. 그때 계금산에 상자를 돌려놓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어 쓸까? 중학교 내내 애달아 했다.
나는 도깨비를 믿지 않았다. 도깨비를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어리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난밤에는 도깨비에 홀린 것이 틀림없었다. 도깨비에게 홀리지 않고 한밤중에 홀로 계금산으로 갈 일이 없었다.
밤새 도깨비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 도깨비들에게 쫓겨 계금산을 벗어나는가 하면 다시 계금산이었다. 뒤쫓아 오는 도깨비 무리 때를 간신히 따돌리고 방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경식아'
배치기 목소리가 도깨비를 밀치고 들어왔다.
'배치기 자네가 일찍이 무슨 일이래' 술이 덜 깬 아버지 목소리도 들렸다
모든 게 꿈이길 원했지만, 배치기 목소리는 너무 또렷했다.
'경식아' 배치기 목소리에 긴장감이 돌았다
'경식아' 아버지도 나를 불렀다
자백만이 살길이었다. 방에서 마루로 나왔다. 마루에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벌써 마당 가득히 차 있었다. 계금산 끝자락에 시커먼 구름 한 점이 밍기적 되고 있었다.
'경식아' 광수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히죽거렸다. 거래가 성사된 모양이었다.
속옷 바람 아버지, 칼 가르마 영식 아버지, 검은 정장에 검은 안경을 쓴 낯선 남자, 모두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경식아. 철제 상자를 가져오너라' 배치기는 앞뒤 다 끊고 결론부터 치고 들어왔다.
가슴에서 뭉그적거리며 올라오는 자백보다 , 혀끝 언저리에 거들먹거리던 거짓부렁이 입 밖으로 불쑥 먼저 나왔다.
'상자요, 뭔 상자여' 광수의 놀란 모습이 나의 곁눈 질에 들어왔다'
'계금산에서 가져온 철제 상자 말이다'
'철제 상자유. 금시초문인데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이 나왔다. 아버지도 무엇인가 말하려다 머뭇거리고 있었다.
'상자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는데유' 거짓말은 뻔뻔해져 갔다
광수는 경식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광수는 어젯밤 일이 너무 생생히 기억나 짜증스러웠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경식의 거짓말은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아부지. 지가 어젯밤에 막걸리 두 주전자를 혼자 다 마셔 버렸구만요. 지금 생각하니 그게 꿈인가 생신가 오락가락하네요.'
'이놈이' 베치기가 광수를 쏘아봤다.
'아부지, 경식이가 금시초문이라면 금시초문이에요'
'이놈이 어디 수작을 부려. 방금까지 상자를 찾아주면 차를 태워 주냐고 떼를 써 놓고'
'아부지, 머리가 아직 어질어질 하네요. 전 곡주가 사람잡는 줄은 미쳐 몰랐네요. 아이고 머리야.'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을 척척 해나가는 광수는 덤덤해 보였다.
진실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혓바닥이 시멘트처럼 굳어만 갔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손이 벌벌 털렸고 바지에 오줌도 지렸다.
'퍽 퍽'짧고 두툼한 배치기 손이 연거푸 광수 뺨을 핥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새끼 봐라. 아비한테 거짓말을 까. 너 요즘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또 거짓말을 까' 배치기는 손매까지 걷어붙였다.
'이 새끼. 아버지를 이리 욕을 먹여. 아비한테 거짓말을 해도 정도 것이지'
아버지와 서울 선생이 말릴 사이도 없이 광수의 얼굴 복부 정강이를 순서대로 배치기의 넓적한 손이 쓰나미처럼 지나갔다. 나는 보고 있을 수만 없어 맨발로 마당으로 달려가 배치기의 짧은 손을 잡았다.
'이것들 봐라 쌍으로 나를 엿먹여. 배치기는 나도 한방 칠 기미였다
아버지가 배치기를 밀치고 나를 낚아챘다
'경식이가 모르는 일이라면 모르는 일이여. 우리 귀한 아들을 치려고 해. 그래 내부터 치고 우리 아들을 치든지'
걸 잡을 수 없이 일은 커졌고 걷잡을 수 없는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팥메'
'팥메. 경식아'
광수는 팥메라고 계속 읊조렸다. 콩메라고 받아쳐야지 되는데 나는 그저 물끄러미 광수만 보고 있었다.
배치기는 광수를 개 끌고 나가듯이 끌고 나갔고 아버지와 서울 선상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얼마 후 나선 남자들이 집에 들이닥쳐 이 잡듯 집을 뒤지고 돌아갔다. 순식간에 집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마을도 어수선해져 갔다. 이후에 배치기가 서너 번 집에 더 찾아왔었다. 아버지를 회유하여 상자를 찾고자 했으나 아버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김만식이가 금덩이 상자를 꿀꺽했다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급기야는 현상금 벽보까지 담벼락에 내 걸렸다.
'현상금: 00000원
찾는 물건: 국방색 작은 철제 상자. 가로 30cm 세로 20cm'
현상금에 눈이 먼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있건 없건 집에 들이닥쳐 헛간이며 부엌이며 심지어는 안방까지 샅샅이 뒤졌고. 몇몇은 아버지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미행하기에 이르렀다. 누군가는 대문에 도둑놈의 집이라고 적어 놓았다. 옆집 봉달아저씨는 칼을 들고 와 아버지를 협박하기까지 이르렀다. 현상금에 0자 하나만 더 붙었다면 살인도 날 것만 같았다. 계금마을에는 돈이 먼저였고 사람이 제일 나중이었다.
집에는 마을 사람들 발길이 뚝 끊겼고 아버지의 부엌에는 더는 채소며 과일들이 채워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병든 닭처럼 시들시들해져 갔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한 번도 그 일을 나에게 되묻지 않았다.
해가 넘어가고 이월이 왔는데도 나는 광수를 볼 수 없었다. 학교에서도 계금마을에서도 광수는 없었다. 50년 동안 친구 광수를 볼 수 없게 될지는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진실을 말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나는 그저 비겁한 겁쟁이였다.
이듬해 이월 중순 아버지와 나는 마을을 떠났다. 오래전부터 아버지는 마을을 떠나려고 준비한 사람 같았다. 고향을 떠나는 전날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안내방송을 했다.
백 영감 무너진 담벼락을 고쳐주지 못한 점, 고령댁 전구를 갈아 주지 못한 점, 김 영감 송아지 출산을 도와주지 못한 점 등을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계금 마을에도 곧 새봄이 오겠지요. 봄이 오면 계금산에도 진달래가 다시 피겠지유. 올봄에 산천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면 만식이가 왔구나 하고 저를 기억해 주세유' 아버지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아버지가 얼마나 고향을 사랑했는지, 이장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주민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계금산에 피는 진달래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을을 떠나는 날, 곰바우가 눈에서 멀어져 가자 눈물은 하염없이 굵어져 갔다. 곰바우가 시야에서 곧 사라져 갈 때쯤 곰바우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광수였다. 나의 유년의 중심엔 광수가 있었다. 그땐 지랄 맞게 까불고 깝죽대고, 청승맞게 울고불고 여쭙잖게 위로받고 위로해대도, 내 생에서 알 제대로 밴 때가 그때만 했을 때도 없었다.
중학교 졸업장으로 할 수 있는 배달일, 공장일 막노동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힘은 들어도 트럭 운전사가 되고서야 가정도 꾸리고 자식도 얻게 되었다. 자식 먹이고 가르치는 일이 무엇보다 중했든 아버지의 삶이나 내 삶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다시 부산 대구 대전 서울로 부지런히 오가며 번 돈으로 아들 김 조식을 대학까지 보냈다. 그리고 지난주에 아들 조식은 꿈에 그리든 미국 명문대에 입학 통지서를 손에 넣었다. 기쁨도 잠시였다. 아들만큼은 원 없이 공부시키겠다고 다짐했지만, 우리 형편에 유학은 무리였다. 돈 나올 궁리로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 거리, 계산기를 이리 두드리고 저리 두드리고 있을 때 TV에서 낯익은 얼굴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광수였다. 값비싼 고급 차가 광수 뒤에 있었고 차위에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개발 특수지역. 계금마을. 운영위원장 배광수'
계금마을도 개발 바람에 뛰어든 것이었다 광수는 여전히 당당했다.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끝으로 사람을 찾습니다. 내 친구 김경식을 찾습니다' 광수가 나를 찾는다는 말에
별안간, 50년 전 광수 밭에 묻어둔 금덩이가 머리통 어느 구석에서 툭 불거져 나왔다.
'그리여 금덩이 세 개면 우리 조식이 미국대학은 문제가 없을 것이여'
상자는 깊게 묻혀 있지 않았다. 50년 세월을 이기지 못한 상자는 힘없이 버스럭 일그러졌다. 망치도 쓸 필요가 없었다. 발로 슬쩍 밟기만 했는데도 상자 안이 쑥 드러났다. 세 개가 고스란히 있었다. 가슴이 조여왔다. 가져온 물로 대충 씻었다. 검은색 금덩이였다. 가져온 물을 다 쓰고도 금덩이는 검은색이었다. 돌덩이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안도의 웃음이었다. 실망감보다 감사의 웃음이었다. 금덩이가 아니고 돌덩이인 것을 감사했다. 도둑질한 돈으로 아들 유학을 보낼 뻔했는데 구사일생으로 도둑놈을 면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랐다. 돌덩이 세 개는 계금산으로 돌려놓기로 하고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틀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렷다
'김경식 씨 부탁합니다.'
광수였다.
'광수야'
'팥메'광수가 싱그럽게 말했다
'콩메'
이 두 마디에 우리는 5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12살 까까머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용서하게 자네' 내가 침묵을 먼저 깼다
'용서는 무슨 용서. 용서는 잘못했을 때 용서를 비는 거지. 자네는 나한테 빚 진 것이 없다네.'
'미안혀'
'미안 됐고. 경식아, 우리 곰바우에 오줌 한번 갈기로 가자'
'미안하다니까'
'오줌 갈기로 갈 거야 말 거야'
그리고 광수는 암호 같은 말만 내뱉었다.
'배치기 치매. 사망. 유언. 100만 평 땅. 김만식.
'.....'
'100만 평 땅이 우리 아버지 김만식이 명의로.'
아버지가 전답을 빌려 농사지은 땅이 겨우 30평 남짓이었으니 100만 평이라는 땅이 얼마나 큰지 가름할 수가 없었다.
'경식아. 계금마을에 개발 바람이 불었어. 뉴스 봤지.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그래 오줌 갈기로 가자'
'경식아.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한 몫 크게 챙겨줄게. 사흘 후에 계금마을에서 보자.'
50년 전, 아버지가 벗어나고자 한 것은 백만 평이었다. 불법 명의신탁, 말이 불법이지 협박과 회유로 남의 땅을 갈취했다고 해야 맞는 말이었다. 아버지도 공범이었다는 생각에 배신감이 몰려왔다. 아주 잠시 몰려왔다. 아버지에게 귀소본능의 이유는 백만 평이었다.
'김조식. 아들아. 김박사!'
나는 유년시절, 그토록 경멸한 어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문득, 어머니 사진 뒷면에 써 놓은 아버지의 자작시 한편이 떠 올랐다.
고향 집 마당은 일백만 평
고향 집 마당에는 천진한 채송화 꽃밭 있었지
고향 집 마당에는 단잠 든 누렁이랑 누렁이 집 있었지
고향 집 마당에는 누렁이 집 옆에 성근 싸리 빗자루 있었지
고향 집 마당에는 반백 살 넘은 가마솥이 있었지
고향 집 마당에는 곰삭아 내는 장독대 있었지
고향 집 마당에는 계절 지난 기다림 있었지
고향 집 마당에는 사리문 앞에 서성이든 어머니 발자국 있었지
고향 집 마당에는 일백만 평 넘는 어머니 사랑 지난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있겠지
점점이 커지는 어머니의 그 모든 것
고향 집 마당 일백만 평도 모자라 동네 마당 다 사야 할 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