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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아마 유튜브 강론 들으시는 분들은 '오늘 신부님 혼자 미사 드리는 날인데 앞에 사람들이 있네.'
하면서 부러워도 하고 또 샘도 많이 나실 수 있죠.
원래는 없는 날이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우들, 신혼부부 가정까지 세 가정이 와서 제 지인들과 대축일 미사를 함께 봉헌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돈끼리 전부 천주교 신자를 만나는 것은 확률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자세한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 식구들 보면서 ‘하느님께서 묘하게 맺어주시는구나.
누가 중신한 것도 아니고 둘이 알아서 결혼하려 보니까 연결이 되어 있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 분명한 부부라는 느낌이 강하게 와닿습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이죠.
여러분은 천주교 신자로 사는 것에 대해서 어떤 자부심이 있어요?
천주교 신자이기에 행복한 것이 무엇이 있나요?
만일 이방인들이 ‘성당 다니신다면서 성당 다니면 행복합니까?’ 물으면, ‘당연하죠.’ 하겠죠.
그러면 또 물을 거예요. ‘뭐가 행복하세요?’
천주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것은 뭐냐? 두 가지예요.
며칠 전 식사하는데 어느 자매가 뜬금없이 ‘신부님 어느 때가 제일 행복하세요?’ 물어요.
그런데 나는 그냥 바로 망설임 없이 ‘미사 드릴 때가 제일 행복해요.’ 그랬어요.
그리고 ‘그 미사를 통해서 교우들이 성체 영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가 제일 행복해.’
천주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것은 두 가지라고 저는 생각해요.
성체 성사가 있다는 것이 첫 번째 행복이고 성모님이 계신다는 것이 두 번째 행복이에요.
성모님은 울타리죠. 우리를 위해 늘 전구해 주시는 울타리예요.
우리 교회에 성모님이 안 계셨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차가운 교회였을까?
성모님이 계신다는 것은 우리의 특별한 축복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이론적으로는 내가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거려요.
맞아, 성체 그리고 성모님. 우리 천주교에만 있어.
그런데 실제로 우리 신자들이 성체를 영할 때마다 행복할까?
묵주 기도할 때마다 정말 행복의 눈물을 날 정도로 기쁜가?
성체 영하고 내 손에 묵주를 한알 한알 넘길 때 기쁨의 눈물이 내 발밑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던가?
모든 크리스천이 전부 다 성체 신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성모 신심이 있는 것도 아니죠.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이니 성모 신심에 관한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안 할게요.
예수님의 세 가지 유언이 있어요.
부모님이 자식들한테 ‘이것 꼭 해’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지키려 애쓰며 살죠.
그리고 그걸 못하면 스스로 불효자식이라는 죄의식을 갖고 살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세 가지 유언을 하셨단 말이에요.
첫 번째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두 번째 유언은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유언이 바로 지금 얘기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라.’
물론 예수님의 사랑은 성서 전반에 다 걸쳐 있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치유도 하시고 마귀도 쫓아내시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유난히 세 번째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라.’ 하는 것은 7번이나 반복하셨어요.
그것이 어디 나오냐?
그 유명한 요한복음 6장 50절에서 58절.
거기를 보면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살릴 것이다.’
하는 유언이 무려 7번 반복돼요.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똑같은 얘기를 이렇게 7번 반복한 데는 유일하게 여기뿐입니다.
이 요한복음 6장 50절에서 58절 때문에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개신교 신자들 성서 열심히 읽죠.
그런데 읽다 보면 여기에 딱 걸리는 거예요.
‘이게 뭐야?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그랬는데, 왜 우리는 안 먹지?’
먹어봐야 1년에 몇 번 빵 사다가 형식적으로 나눠주는 것뿐이에요.
성경에 여기만큼 강한 예수님의 유언은 없습니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
그런데 이 성체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이 있어요.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성체를 바라보는 모습이 다 같지 않다 이거죠.
성모 신심도 마찬가지예요.
개신교든 천주교든 동방정교회든 희랍 정교회든, 아무튼 예수님을 믿고 있는 모든 크리스천이
성체를 바라보는 모습이 한결같으냐, 성모님을 바라보는 모습이 한결같으냐?
그건 아니라는 거죠.
성모 신심 얘기는 오늘 할 주제가 아니고 성체만 생각하겠습니다.
성체를 바라보는 세 가지의 시선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성체의 뜻을 모르거나 단순히 상징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
비신자들이 성체의 뜻을 알겠어요? 모르죠.
성당 안 나가는 사람들이 ‘영화 보면 신부가 미사 때 빵을 들어 올리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신자들은 숨도 못 쉬고,
또 하나씩 뭔가 나눠 주던데?’
미사 때 보면 친구 따라서 성당에 온 비신자들이 가끔 있어요.
아니면 친구가 끌고 왔겠죠.
그런데 친구가 영성체할 때는 자리에 앉혀 놓아야 하는데, 따라나선 거야.
하지만 성체 줄 때 신자 아닌 사람들은 신부님들은 바로 알아요.
‘그리스도의 몸’ 하면 두 손을 내밀어 자기가 뺏어가려고 해요.
그래서 세례받으셨냐고 묻고 세례받은 사람만 영하는 것이니 세례받고 오시라고 말씀드리죠.
이러면 어떤 사람 얼굴이 빨개져요, 창피한 거지.
또 어떤 사람들은 친구한테 막 따지는 거야.
‘아니 세상에, 몇백 원, 돼야 얼마 돼 보이지도 않던데, 그 조그마한 걸 자기들끼리만 먹고.
그래도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음식 대접하는 것 아니야?’ 하면서 천주교 쌀쌀맞다고.
그 사람은 성체가 뭔지 전혀 모르는 거예요.
성체를 모르는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나와서 그냥 받아먹나 보다,
성당 가면 그냥 하나씩 주나보다 생각하는 거죠.
많은 비신자는 성체 의미를 전혀 모르고 삽니다.
또 수많은 개신교 신자도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상징’이라는 생각만 갖고 있기에 중요시하지 않죠.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성체의 의미가 아니죠.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비신자들은 성체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개신교 신자들도 1년에 몇 번 하지만
우리 가톨릭에서 얘기하는 ‘그 안에 정말 예수님이 현존한다.’ 하는 그 개념이 아니죠.
그냥 2천 년 전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뿐이에요.
이것이 성체를 바라보는 첫 번째 시선이에요.
두 번째 시선은 뭐가 있느냐?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영성체하는 사람들이 있죠.
많은 천주교 신자가 머리로는 성체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생각해요.
교리 때도 배웠어요. 그리고 이해하려고 애를 써요.
그렇지만 실제로는 영성체하는 순간에 너무나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영하기 때문에,
정말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친밀한 사귐, 커뮤니온(communion)의 관계를 나누지 못한다는 얘기죠.
그래서 준비된 마음 없이 의무적으로 참석할 수밖에 없고, 영성체합니다.
아까 처음에 내가 천주교 신자들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것이 뭐냐고 물었죠?
정말 행복을 느낀다면 성체 일주일에 한 번 영하는 것 가지고는 못 견뎌요.
시간 날 때마다 평일 미사라도 나가서 우리 혈압약 매일 먹듯 영하려고 애를 쓰죠.
또 어느 성당이든지 성체가 모셔져 있는 곳을 감실이라 하죠?
그 감실 앞에 시간 날 때마다 머무르려고 애를 써요.
내가 아는 어느 의사 선생님은 아주 독실해요.
그 양반은 단 하루도 성체조배를 빠뜨린 적이 없어요.
언제 하느냐? 출근하기 전에.
출근하기 전에 못 하면 끝나고 나서 집에 갈 때 늘 30분 이상씩 성체 앞에 앉아 묵상해요.
오늘 내가 만난 환자들한테 어떻게 했는가, 내가 나한테서 예수님의 모습을 내가 보여줬던가?
아주 훌륭해요. 겸손해요.
성체를 가까이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굉장히 겸손해요.
그렇지만 많은 천주교 신자가 너무나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준비 없이 의무적으로 참석할 때가 많다는 거죠.
그리고 미사 후에도 자신이 감실이라는 것을 잃어버려요.
성체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성체가 모셔져 있죠.
그래서 우리들은 걸어 다니는 감실이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예수님 모시고 있기에 움직이는 감실이죠.
나 자신이 그렇게 거룩한 몸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세속적인 생활을 해나간다는 얘기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성체는 삶에 큰 힘이 되지를 못합니다.
세 번째가 성체 신심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체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께서 성체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힘도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라는 체험 못 하면 여전히 성체를 영해도 느낌이 없죠.
자주 성체조배 합니다.
성체 신심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일을 예수님과 의논해요.
그리고 틈만 나면 미사 드리고 영성체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그분의 힘으로 살아가요.
피정 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많이 있는데 나는 7년 동안 수인 사목을 했어요.
수인 사목은 교도소 사목이죠. 물론 본당 신부 하면서 겸임했어요.
옛날에 내가 수인 사목을 할 때가 한국에서 사형이 제일 많이 집행되던 노태우 시절이에요.
그때가 사형 집행이 제일 많았어요.
그래서 수인 사목 신부들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형장 입회를 많이 했어요.
교도소에 미사를 가면, 미사 때 못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형수들은 미사에 같이 못 나와요. 참석을 못 시켜요.
사형수들 성체를 따로 준비해요,
일반 죄수들 미사 후 성체 모시고 간수가 앞장서서 사형수 감방으로 가요.
우리 신자 사형수들은 미사 지금 시작했겠다 생각하면 신부님이 오실 때까지 철장 앞에서 1시간 내내 무릎 꿇고 기다려요.
그러다가 내가 들어가 그 앞에 딱 서면 울기 시작해요.
진정시킨 다음에 성체를 영해주죠.
왜 그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릴까?
예수님 만난다는 게 너무 반갑고 기쁜 거죠.
또 다른 이유는 한 달 후에야 신부님이 올 텐데 그 안에 내가 살아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그러면 내가 오늘 영하는 이 성체가 내 생애의 마지막 성체야.
눈물이 펑펑 흘러요
사실 우리도 넓은 의미의 사형수예요.
형이 언제 집행이 될지 몰라요.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쉬운 얘기 아니거든요.
우리는 전부 다 유한성 안에 살고 있는 넓은 의미에 사형수들이죠.
그래서 우리도 사형수가 성체를 영할 때마다 눈물 흘리면서 영하듯
내가 오늘 영하는 이 성체가 내 생의 마지막 성체라는 마음으로 영할 때는 가슴이 찡하죠.
눈물이 핑 돌 수밖에 없는 거예요.
수인 사목하는 신부들이 제일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뭐냐?
수인 사목하는 신부들은 휴대폰을 못 꺼놔요.
왜냐? 교도소에서 전화가 오기 때문에, 새벽 몇 시라도 와요.
사형 집행이 법무부에서 갑자기 떨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밤중에 전화 오면 깜짝깜짝 놀라죠.
어느 날 전화가 막 울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야.
혹시? 딱 들으니, 교도소장이 ‘신부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내일 아침 7시에 천주교 신자 아무개 형이 집행되니 5시까지 오셔서 종교 행사하시고 입회해 주십시오.’
그 아이가 드디어 가는구나.
세상에 있을 때는 조폭이었어요. 사람 둘을 죽였어.
그런데 들어와서 교리 배우고 세례받고 난 다음에 아기처럼 살아, 천사처럼 살아.
세례받으면 우리 죄 사함 다 받잖아요.
그 아이의 유일한 즐거움이 신부님 한 달에 한 번 보는 거예요.
‘신부님이 청와대에 청원 넣으니 무기징역 될 거야. 걱정하지 말아.’
‘진짜요?’
‘그래, 신부님만 믿어.’
이랬던 애가 내일 아침에 집행이 되는 거예요.
내일 아침에 가서 그 아이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이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앞이 캄캄하죠.
잠 한잠 못 자고 아침에 가니 간수들이 갈아입을 옷을 딱 들고 기다려요.
긴 교도소 감방을 걸어가면 발소리밖에 안 들리죠.
사형수 감방 앞에까지 가요.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죠.
그 아이 있는 철장 앞에 딱 서면, 새벽인데도 벽을 보고 기도하고 있어.
벽에는 뭐가 있느냐? 밥풀 가지고 만든 십자가.
밥을 모아 만든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데 옆에 얼굴에서 뭐가 뻘건 게 흘러내려요.
피땀이 흘러내리는 거야.
의학적으로도 사람이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히면 모세혈관이 터져 땀과 같이 흘러내리는 것으로 혈한증이라 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셨다는 것, 그냥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도 그걸 봤거든요.
사람이 피땀을 흘릴 수 있구나. 얼마나 괴로우면.
피땀 흘리면서 기도하다가 인기척이 나서 옆에 보니까 나랑 간수가 서 있잖아.
그냥 기절해 버려.
설마 설마 했는데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구나.
자기도 밤새 괴로웠던 거지.
사람은 자기 죽을 때를 알아요.
그래서 내가 들어가 기절한 것 물 먹여 깨워놓으면, 날 보고 또 기절해요.
내가 저승사자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어떡하냐?
가지고 간 성체를 잘게 잘라 숟가락에 녹여요.
그리고 ‘입 벌려봐. 너 성체 영해야 네 발로 일어난다.’
억지로 집어넣어요.
그런데 입에서 맴돌고 못 삼켜요.
사람이 죽기 전에 물도 못 넘기는 이유가 그거예요.
목에다 손을 대고 안수하죠. ‘주님, 주님! 제발 들어가 주세요.’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나며 성체를 영한 후에는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기는지, 일어나요.
그리고 자기가 죽을 때 입을 옷으로 갈아입고 ‘신부님 저 준비됐습니다.’
제가 더 떨리죠.
내가 걔 팔을 잡고 가야 하는데, 오히려 걔가 내 팔을 잡고 부축해서 형장으로 갑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밧줄이 내려와 있고, 유리창 안에 입회인, 걔한테 피해 봤던 그 집 식구들, 변호사들이 앉아 있어요.
교수형은 얼굴을 보자기로 가려줘요.
그런데 우리 신자들은 대부분 안 가려요.
왜? 신부님 마지막 강복하는 것 보면서 죽겠다고, 그리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요.
‘신부님 울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미안하다. 너 먼저 가서 예수님 만나고 성모님 만나고 언젠가 신부님도 따라갈 거다.’
마지막 강복을 주죠.
마지막 강복이 끝나는 동시에 옆에 있던 간수가 확 잡았당기죠.
덜커덩하고 떨어지면서 뼈가 부러지겠죠.
두 팔, 양발을 묶어 놓아 몸이, 밧줄이 막 흔들려요.
밑을 안 들여다봐도 얘가 얼마나 괴롭게 지금 죽고 있는지를 알아요.
그런데 아무리 체력이 강해도 4~5분을 못 견뎌요.
몇 분 지나고 나면 밧줄이 딱 서버려요.
그러면 제일 먼저 의사가 내려가서 칠성판에 뉘어놓고 사망 확인을 해요.
그다음에 내가 가서 마지막 임종경 기도해 주고 내가 한번 끌어안아 주죠.
그런데 우리 신자들은 죽은 다음 얼굴이 더 예뻐.
오히려 혈색이 발그스름해요.
어떤 때 내가 의사 선생님께 안 죽을 것 같으니 다시 봐달라고 그랬어.
우리 신자 사형수들이 교수형 받으면서도 담대하고, 또 죽고 난 다음에도 얼굴이 아름다운 그 힘이 뭘까?
한 달에 한 번씩 영했던 그 성체예요.
그 성체의 힘으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멘
그래서 성체의 신심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은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하게 돼요.
성체를 영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없는 능력이 나와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이 나와요.
그러면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얘기죠.
성체는 천상의 약입니다.
세상 보약이 아무리 좋아도 설령 천수를 다해 살 수 있는 약이 있더라도 성체만 못하겠죠.
성체는 영생을 보증해 주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 그런 얘기 알죠?
옛날에 아버지가 중병에 들렸어.
효자 아들은 산으로 다니면서 온갖 약초를 캐서 드려도 나을 기미가 없어.
그런데 어느 날 중이 지나가다 들어오길래 시주하려고 쌀 한 대박을 퍼주니까 용한 중이야.
‘아이고 환자가 집 안에 계시네요.’ 그러면서 뭐라고 한마디 했느냐?
사람의 살을 짜서 먹이면 될 텐데.
그 얘기를 듣고 아들은 어떻게 해요?
칼을 갈아 자기 허벅지 살을 도려내요.
그리고 약 탕제 안에 자기 살을 같이 넣어서 약을 달였죠.
그러고 그것을 짜 그릇에 담아 아버지 입에다 똑똑 떨어뜨렸더니,
하늘이 아들의 효성에 감동했는지 아버지가 살아났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성체는 반대로죠.
하느님이 당신의 살을 쪼개서 죽어가는 우리들을 살리려고,
어둠으로 힘들어하는 우리를 살리려고,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우리를 살리려고,
과거의 어두움 때문에 헤어나지 못한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의 살을 우리 입에다 집어넣으시는 것이 바로 성체예요.
그래서 천상의 약이라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보다도 위에 있는데 성체예요.
그래서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면 성령과의 일치를 이루게 되고, 성체를 영하면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죠.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뀌는 거예요.
예수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그러죠?
그래서 칼날처럼 삐죽삐죽 날카롭던 마음들이 둥그런 마음으로 바뀌어요.
‘사람’에서 ‘람’은 ‘라’자에 ‘미음(ㅁ)’ 받침이죠.
그런데 그 미음(ㅁ)의 네 귀퉁이를 깎기 시작하면 ‘이응(ㅇ)’으로 바뀌어요.
‘사람’이 ‘사랑’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 가장 큰 힘이 우리 천주교 신자들한테는 성체입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개신교의 신앙은 이 세상 살면서 예수님을 닮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뭐가 있어서? 그렇죠, 성체.
성체가 내 안에 들어오면 갈라티아서 2장 20절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와 동일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죠.
그래서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 봉사하는 것입니다.
또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순명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 되어 순명하는 것입니다.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으로 바뀌죠.
저는 늘 그래요.
성체 영하러 나오기까지는 성가를 부르더라도 일단 성체를 영하고 자리에 앉으면, 그땐 성가 부를 때가 아니다.
성체를 영한 즉시 내 몸은 주님의 몸이고, 내 손은 예수님의 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손을 갖고 자리에 앉아 치유기도 해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대고 ‘주님 제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이 어둠으로부터 자유롭게 도와주십시오.
정말 힘듭니다. 정말 누구를 미워하는데 이젠 지쳤습니다. 그 미움의 종이 되기 싫습니다. 욕심의 종이 되기 싫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픈 사람들은 아픈 데다 손을 대고 ‘주님 제가 간이 안 좋답니다. 좀 치유시켜주십시오.’
비야 같으면 성체 영할 때마다 아기에게 손대고 ‘주님 우리 아가 잘 크죠? 잘 돌봐주세요.’
그때 그 손은 비아의 손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이에요.
이것은 개신교 신자들은 꿈도 꿔보지 못할 엄청난 축복이에요.
우리는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손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 치유기도 할 수 있잖아요.
성체 성혈에 관한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겠죠.
오늘 성체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에 관해 얘기했어요.
첫 번째는 성체를 아예 모르는 이방인과 뭔가 상징적으로만 알고 있는 개신교 쪽 분들,
두 번째 세 번째 다 천주교인데,
두 번째는 이론으로만 알고 있어 성체를 영하면서도 뜨거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 얼마나 큰 축복인지 느껴본 적이 없는 신자들,
그래서 형식적이고 의무적으로 되고, 대죄가 있어도 아무 의식 없이 영성체할 수밖에 없는 분들,
그리고 세 번째가 성체를 삶 속에 생활화하는 사람들.
우리들은 세 번째 성체 신심을 목표로 살아야 하겠죠.
아까 시작할 때 이야기했었죠.
며칠 전에 어느 신자가 신부님이 어느 때 제일 행복하냐 물었을 때, 답을 뭐라 했다 했어요?
미사 드릴 때.
그리고 은퇴하니 나 혼자 미사 드릴 때가 많죠.
평일은 거의 나 혼자 해요.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지 몰라요.
그리고 신자들이 성체를 영하고 미사 올 때 얼굴과 끝나고 집에 갈 때 얼굴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행복한 거예요.
아마 이런 행복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제가 같이 느끼는 행복이 아니겠는가.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 이곳에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합시다. 아멘
♣2024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6/2)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