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전인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 간에 가츠라·테프트 밀약이 합의된다. 이 밀약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당시 대한제국이었다. 이 밀약이 체결되자마자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1910년 우리는 경술국치까지 당하게 된다. 7월 29일이 바로 110년 전의 그 날이다. 러일전쟁 이전의 상황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전국이 된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자, 이에 러시아는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동청철도부설권을 획득하고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청나라로부터 25년 간 조차해 만주를 세력권에 두려 했다. 그즈음 조선에서는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아관파천으로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 1900년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의 난이 만주로 파급되자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난이 진압된 뒤에도 철수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봉천성 남부와 길림성 전역을 점령해버렸다. 이 같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일본의 북진정책과 충돌하게 되어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양국은 수차례 만주와 한국 문제에 대해 교섭을 했다. 일본의 기본입장은 한국을 보호령으로 하는 대신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월권은 인정하되 상호기회균등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고, 러시아는 자국의 만주독점권과 아울러 한반도 39° 이북에 중립지대 설정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더 나아가 러시아가 만주를 일본의 세력범위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에서의 일본의 군사 활동을 제한하려 했다. 수차례 일본의 수정제안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태도에 변화가 없자 일본이 선제공격해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110년 전에 발생한 러일전쟁
▲ 서방 언론이 보도한 러일전쟁 풍자도. 마치 헤비급 복서 조지 포먼과 플라이급 장정구의의 싸움으로 보았으나 결과는 다윗의 승리였다. © | | 러일전쟁은 1905년 2월 8일 밤 여순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본은 9일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군함을 격침시킨 다음날인 10일에야 선전포고를 했다. 여순을 봉쇄한 도고(東鄕平八郞)제독의 함대가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고,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육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했다. 15개 사단 병력의 일본은 9월에 요양(遼陽)을 점령했고,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3월에 봉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지상전을 사실상 끝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68만 9천명(전사자 13만 5천명)이었고, 러시아는 약 4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어졌다. 일본은 1년간 전비로 4억 5천만 원 정도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2년 동안 19억 원을 지출했다. 또한 전선의 확대로 보급로가 길어져 전술상 취약점이 노출됨으로써 러시아의 주력부대가 하얼빈에 집결해 반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형세였다. 게다가 러시아 역시 1905년 국내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양국 사이에는 이제 종전회담이 불가피한 형편이 되어버렸다. 그런 러시아의 상황을 간파한 일본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뒤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기로 결정하고는, 먼길을 돌어와 피곤에 지친 발틱함대와 대마도에서 해전을 치룬다. 5월 27일 새벽 일본함대의 도고 사령관은 발틱함대를 격파하고는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제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린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적극 지원한 뒷배경의 열강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이들이 일본에 제공한 총 4억 달러가 넘는 차관 중 약 40%가 전쟁비용으로 충당되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기득권을 부정하면서 러시아로부터 만주를 빼앗으려 하면서도,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빼앗으려는 하지 않았다. 일본이 미국에 적극 로비한 결과이다. 대마도해전 직후 일본이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자 국제정세도 전쟁을 끝낼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면서도 열강 각국은 종전 이전에 자신들의 국익을 확보해 두었는데, 태프트·가쓰라밀약 등이 모두 그 대표적인 것이다. 드디어 러·일 양국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평화제의를 수락하게 된다. 결과 한국은 물론이고 만주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이 확립되자, 일본은 한국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영·미가 일본을 지원한 이유가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일본으로 하여금 막자는 데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직후 일본의 만주 진출은 즉각 영·미의 제재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체결된 것이 1905년의 제2차 영·일동맹과 가츠라·테프트 밀약인 것이다. 제2차 영·일동맹의 내용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확인하고, 동맹의 적용범위를 인도까지 확대하였다. 즉 조선과 인도를 일·영이 각각 나눠먹자는 것이었다.
▲ 러일전쟁 상황도. 일본 전국민이 참여한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편집부 | | 110년 전에 합의된 가츠라·테프트 밀약 가츠라-태프트 밀약이란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제의 가쓰라 총리대신이 도쿄에서 서로 비밀리에 회담한 내용을 각서로 쓴 것으로,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각서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제국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래야 자기네가 필리핀을 수월하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츠라-태프트 밀약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일제는 같은 해 11월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사실상 알고도 묵인했다. 가츠라는 대한제국이 일본과 다른 나라가 전쟁하게 하는 상황을 반복하지 않도록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적절한 조처를 취하겠다 하면서 이는 일본에게 대단히 중대한 일이라고 말했다. 태프트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동의했다.
▲ 일제의 가츠라 총리와 미국의 육군장관 테프트가 도쿄에서 양해한 밀약 © 편집부 | | 가츠라-태프트 밀약의 요지
1.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친일적인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게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2. 극동의 전반적인 평화유지에 있어서는 일본·미국·영국 삼국 정부의 상호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다. 3.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지역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 이 밀약으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배제시킨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과 이어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보호조약(늑약)을 강제적으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의 길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필리핀을 먹기 위해 일본의 이러한 행위를 사실상 묵인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제2의 가츠라테프트 밀약을 또 시도할 지도 모른다. 미국이 우리와 혈맹이고 우방이기 때문에 영원히 우리를 지켜준다는 기댐에 의지하려는 환상을 깨고, 스스로 자체의 힘을 키워 외세의 준동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국제상황은 110년 전 오늘과 비슷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정치인과 외교관부터 정신차려야 할 것이다. 어떻게 처신해야 이 민족과 나라의 앞날을 살릴 수 있는가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 시민사회단체의 주장이 옳은지 아니면 반대를 위한 반대인지 눈여겨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 편집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