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민일보 2024년 7월 12일 금요일자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느티나무 하숙집
류인서
저 늙은 느티나무는 하숙생 구함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한때 저 느티나무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었다
온갖 바람빨래 잔가지 많은 반찬으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길들이 흘러와 저곳에서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발 빠른 늑대의 시간들이 유행을 낚아채 달아나고
길 건너 유리로 된 새 빌딩이 노을도 데려가고
곁의 전봇대마저 허공의 근저당을 요구하는 요즘
하숙집 문 닫을 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틱틱 끌리는 슬리퍼, 런닝구,
까딱거리는 부채, 이런 가까운 것들의 그늘하숙이나 칠 뿐
♦ ㅡㅡㅡㅡㅡ 식비(食費)와 방값을 내고 남의 집에 머물면서 먹고 자는 하숙(下宿), 들어본지 까마득한 말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한동안 머물다가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하숙집, ‘틱틱 끌리는 슬리퍼, 런닝구, 까딱거리는 부채...’ 그리고 나무그늘아래 마루평상, 푸짐하고 너그러운 하숙집 주인아줌마...... 모두가 기억이라는 낡은 필름 속에 선명한 회상일 뿐, 지금은 사라져버린 풍경들이다.
어느 비탈진 골목에서 한때 ‘수십 개의 방’을 들이고, 숱한 사람들과 숱한 시간을 보냈던 느티나무는 아직도 하숙생 구함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고 한다. 빌딩에게 노을을 뺏기고, 머지않아 곁에선 전봇대마저 없어지면 나무는 가차 없이 베어질 것이다. 언제 거기에 있기나 했었냐는 듯 잊혀져갈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기억도 영원한 것은 없다. 오랜 기간 숱한 과정을 거치면서 소멸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숱한 과거의 시간들이 현재의 실존임을 안다면, 수많은 길들이 흘러와 줄기와 가지로 뻗어 나갔을 늙은 느티나무의 찬연한 묵시를 무심코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ㅡ 유진 시인 (첼리스트. 선린대학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