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나즈막한 원미산(遠美山,167m)으로 향하는 날이다. 1호선 소사역 6번 출구에서 버브바 뻐드타 엉카페 까토나 네명의 지기들이 만난다. 참석자는 COVID-19 먹구름으로 4명 이하만 가능하다. 부천은 나에게 삶의 인연이 있는 곳이다. 대학을 1차에 낙방을 하고 강원도 친구와 산골로 들어가 1년을 재수를 한다. 친구의 여친(女親)이 펜팔친구를 소개해 준다. 4년여 동안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읽힌다. 어느날 펜팔의 주고 받음의 인연도 동해바다에 물거픔이 되어 허공으로 뜬다. 아마도 부모님의 재촉으로 어느 남자의 품에 안겼으리라. 38 이북 고향땅에서 다섯살 나이에 처음 명란젓을 먹으라던 그 어리디 어린 소녀도 지금은 어느 누구의 품에서 사랑의 고백을 듣고 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5년여의 시간이 흐른다. 군대를 전역하자 마자 생애에 첫 입사한 직장이 바로 한일약품 제약회사이다. 첫 출근하는 그날 첫눈에 띤 아가씨가 있다.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차분하면서도 올곧은 모습의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이다. 영업부 경리담당 사원이다. 영업부 약사들의 영업실적도 꿰뚫어 보는 직책이다. 마음에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연민의 정이 솟는다. " 첫눈이 내리면 그날 그 다방에서 만나자 " 퇴근을 하고 저녁에 눈발이 뿌리고 있다. 잠시 잠깐 내리고 끝이다. 마당에도 눈이 내린 흔적도 별로이다. " 통행금지가 가까운 시간까지 기다렸는 데 ~~~ " 그 다음 날에 싸늘한 눈초리로 불만을 토로하는 그녀에게 무슨 변명이 필요한가. 거의 1년 6개월 이상 데이트를 한다. 인생의 배필로 마음에 다짐을 한다 . 어머니 누님들께 결혼상대가 있으니 만나보자고 말씀을 드린다. 을지로2가 근처의 다방에서 맞선이라는 낮선 자리를 마주한다. " 돈 많은 사장집 딸의 중매도 들어오는 데 기다려라 " "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딸을 내줄 수가 없다 " 양가(兩家) 집안 모두가 반대를 한다. 금호동 4가에 흙벽돌로 짓고 지붕은 천막에 coal tar를 입힌 지붕이다. 여름에는 coal tar이 녹아 내리고 겨울에는 자릿기에 물도 꽁꽁 얼어버리는 천막집이다. 전기는 언감생심으로 생각도 못하고 등잔불과 등피불이 고작이다. 석유가 타는 심지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솟는다. 자고나면 코안이 까맣게 그울음이 엉긴다. 대여섯평 정도의 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님 두분과 남동생 여섯식구가 함께 부딫치는 삶의 터전인 곳이다. 아버지는 대학 4학년 초에 일찍이도 세상을 뜨신 상태이다. 겨우 입에 풀칠만으로도 다행인 세월이다. 4학년 마지막 등록금을 누님이 마련해 준다. 맏아들인 동생만은 이런 가난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태여나서 내 삶의 동반자로 마음을 굳힌 상태이다. 어느 누구의 조언도 충고도 흘려보낼 뿐이다. 통행금지가 있는 시절이다. 그녀의 집이 서대문 안산(案山) 줄기의 금화아파트에 살고 있을 때이다. 서대문에서 무악재를 넘으며 늦은 시간까지 데이트를 한다. 통행금지 싸이렌이 울린다. 마음속으로 바라던 순간이다. 근처 파출소로 자진 자수(?)하러 들어간다. 근처에 가까이 있는 그녀의 친척집으로 가도록 허락을 받는다. 밤새껏 잠은 고사하고 장모님 되실 오마니에게 설득할 묘안만 궁리중이다. " 앞으로 무조건 교회에 나갈 것입니다. 어머님 아니 장모님 ! 걱정마시고 허락해 주세요 " 딸만 줄줄이 여섯을 낳고는 이북에 있는 장수산에서 백일 기도를 드린다. 아들 하나만 낳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원을 한다. 내 오마니의 간곡한 하소연을 부처님이 외면은 아니한 것일까. 이 못난 자식을 첫 아들로 품에 안는다. 이토록 애닲게 꿈같이 태여난 아들이 기독교에 매달리며 며느리감을 데려오겠다니 내 오마니의 가슴은 어떠했을지 짐작키도 어렵다. 새벽같이 달려오신 예비 장모님의 얼굴은 냉담할 뿐이다. 일요일이면 서대문 사거리에 있는 동산교회로 빠짐 없이 참석을 한다. 그다지 교회에 대한 관심은 별로이다. 오롯이 그녀를 아내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이니 어찌 할 수가 없다. 장모로 모실 그녀의 오마니는 원효로 옛 살던 교회로 다니시곤 한다. 둘만의 짜릿한 시간도 그녀의 집이다. 사나이가 한번 아내로 삼겠노라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는 여인이다. 반대를 할수록 청년의 마음은 요지부동으로 반항 아닌 결심을 굳힌다. 회사가 끝나면 거의 매일 덕수궁 돌담길을 걷곤하던 곳이다. 태양다방이라는 광화문 근처에 있는 곳도 자주 들어간다. 찻잔에는 둘만의 사랑의 찬가와 행복한 꿈을 가득 담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두 젊디 젊은 연인은 이미 부부인 셈이다. 제대로 데이트를 하고 있는 상대를 놓칳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회는 두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만이 켜켜히 쌓인다. 뜻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으며 없는 길은 없다. 드디어 스물여덟살 숫총각이 스물네살의 다소곳한 여린 아가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장소는 덕수궁돌담 근처의 젠센기념관이다. 14후퇴로 이북에서 피난민 생활 20년 되는 해인 1971년 11월2일이다. 결혼 몇달전에 미국의 U제약회사로 자리를 옮긴 이후이다. 서울 중구에 있는 박 ** 산부인과에서 첫 자식인 아들을 품에 안는다. 1973년 6월 초순 오전 10시 즈음이다. " 야는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라도 질르라우 야 ~~~ " 산고(産苦)의 진통을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며느리에게 충고아닌 걱정을 표출하는 순간이다. 1930년대 부터 40년대 걸쳐서 자식을 여덟명이나 출산한 오마니이다. 그것도 병원도 없고 의사도 약사도 없는 집에서 출산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오마니의 하소연이 아닐까. 내 어머니이자 아내의 시어머니의 한마디가 아직도 가슴을 울린다. 세발 자전거를 타고 울고 있는 한살배기 첫손자 녀석을 바라보는 내 오마니는 그저 웃고 있을뿐이다. 별로 말씀도 없으신 오마니의 그토록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처음이다. 앨범에 사진을 볼 때마다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행복함이 지금도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하고 바라던 손자이던가. 지금은 40대 후반으로 정형외과 전문의로 병원장인 손자이다. 부모님의 그 깊은 마음은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되고 있다. 첫돐 생일상은 금호동집에서 조촐하게 갖는다. 좁디 좁은 집 마루에서 돐상 뒷편에는 커텐으로 가림막이 생각난다. 허름한 모습을 감추기 위함이다. 내 아버지는 장남인 아들이 장가도 가기전에 멀리 떠나셨으니 무슨 말이 필요한가. 얼마나 보고프고 안아주고픈 손주들이었을 것이다. 머나 먼 곳에서나마 내려다 보시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고 있을 아버지이시다. 아들 돐이 지나고 지하철 1호선이 1974년도 8월15일 첫 개통이 된 다음 1974년 가을인가 그때 경기도 부천 심곡동으로 이사를 한다. 부천이라는 곳과 첫 인연이기도 하다. 이곳에 거주할 당시인 1975년 3월 하순에 둘째로 딸이 태여난다. 장소도 오빠가 태여난 바로 서울의 그 박 * * 산부인과에서다. " 최약사님 따님이 곧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어찌 와보지도 않으세요 " 산부인과 원장의 전화 한마디이다. 아들이 태여날 때는 같이 곁에 있던 애비에게 던진 한마디가 지금도 쑥쓰러움은 무슨 연유인가. 박 * *원장은 20여년이 흐른 90년대 초에는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발탁이 된다. 일주일여만에 사직을 한다. 악어 핸드백을 들고 청와대에 출입한 것이 원인이기도 하다. 2년여 뒤에 미국U제약회사의 전라도 광주영업소장으로 발령이 난다. 처음으로 전라도 광주라는 곳의 땅을 밟는다. 이사를 할 밖에 방법이 없다. 충장로 천주교 회관 옆 건물 3층이 사무실이다. 근처 사거리에 있는 전남도청이 1980년 518 광주민주화투쟁의 본거지가 되리라는 생각 그 누구도 못했을 것이다. " 자네 근데 말이여 잉 " "그리 했지라우 ,그랬당께 " 전라도 사투리가 생소하기도 하지만 듣기도 정말 싫었다. 식당에 들어가 직원들과 회식을 하면 술값만 받는다. 푸짐한 안주값은 계산에 포함치도 않는다. 어인 일로 이런 곳이 있는지 고맙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몇달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니 오히려 사투리가 정겨운 느낌이다. 1970년대 중후반에 회사에서 사직을 한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위함이다. 모든 것을 정리를 한다. 집도 절도 없다. " 정말로 미국으로 갈거가 " 어머니의 한마디가 삶의 전체를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이다. 청계천에 댓평도 안되는 곳에 약국을 개설을 한다. 수중엔 빈털털이로 누나의 도움으로 약국을 시작한 것이다. 약사가 약국을 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꿈도 꾸어보지 못한 상태이다. 이처럼 1970년대는 부천은 서울의 위성도시의 하나로 " 잠시 살다가 가는 도시 "에 불과한 곳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요즘은 어떤가. 만화 영화 음악등 현대 예술이 어우러지는 문화 영화의 시(市)로 거듭 태여난 모습이다. 한마디로 부천시 자체의 정체성을 확립한 도시이다. 부천에서는 오래 전부터 성주산을 중심으로 야생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배수가 잘 되는 완경사지로 연평균 11~15℃ 정도가 되는 최적의 생육 조건 등으로 인해 대표 농산물이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말부터 5월초에는 복사골 예술제를 개최하며 시민 한 마당 잔치를 펼치곤 하는 곳이다. 올해는 코로나의 습격으로 아싑게도 거의 모든 행사가 취소가 되고 있는 상태이다. 부천시의 시(市)꽃이 복숭아꽃이고 시(市)의 과일(市果)은 물론 복숭아이다. 그리고 시(市)의 새(鳥)는 바로 용감한 보라매이다. 이렇듯 우리 가족이 잠시 머무르던 이곳이 이토록 발전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한 것이다. 내가 살고있던 그곳이 어드메인지도 분간키가 어렵다. 45년여전의 추억의 그림자가 가슴속에서 용솟음치고 있다. "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 만나면 즐거웁던 외 ~나무 다리 그립던 내 고향은 지금은 어디 ~ 흘러간 세월속에 간직한 꿈을 ~~~ " 흘러간 노래로 달래보지만 바로 엊그제 같기만 하다. 얼떨떨한 마음을 쓰다듬으며 원미산으로 향하고 있다. 소사역에서 부천종합운동장역 방향으로 10여분 걷노라면 바로 원미산 등산로 입구이다. 나즈막하면서도 오르는 등산로 주위로는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산허리를 휘감고 있다. 꽃축제도 물건너간 모습이다. 부천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원미산 정상에 원미정은 출입금지로 아쉬움을 뒤로 해야한다. 가다가 쉬다를 반복하며 좌측 산아래에는 현충탑이 보인다. 무슨 사연으로 현충원이 자리하고 있을까. 방향을 틀어 그곳으로 들어선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어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한 곳이다. 잠시 머리를 조아리며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전사(戰死)한 장병들의 명복(冥福)을 빈다. 출출한 속을 달래려고 근처에 있는 어린이교통회관이 있는 공원에 자리를 잡는다. 신선한 도토리묵 영양떡밥 막걸리 두병 막걸리는 양은(洋銀) 막걸리잔이 제격이란다. 오랫만에 접하는 막걸리 술잔에 대학시절 할머니 막걸리집이 흑백 필름으로 돌아가고 있다. 대학 정문 바로 근처에 있는 선술집이다. 백발이 성성하던 그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어제도 오늘도 빠짐없이 벗들의 아내가 장만해 준 정성이 손맛으로 스며나고 있다. 2021년도 올해가 결혼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수줍은 숫처녀의 순정도 영원히 지지 않을 화사한 꽃닢으로만 생각턴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반짝이는 영롱한 이슬도 아침햇살에 사라지듯이 그녀의 그때 그모습은 오간데가 없다. " 할머니가 무슨 어른이야 " " 그럼 누가 어른이냐 어 ~~~ " " 우리 엄마 아빠가 어른이고 할머니는 노인네야 " 5년전 아내가 야단칠 때 다섯살배기 손자녀석이 거침없이 내뱉는 한 마디가 아직도 귀청을 맴돌고 있다. 70대 중반의 나이도 서럽거든 아내는 할말을 잊는다. 우리 나이의 노인네들은 고혈압 당뇨 퇴행성관절증 심근경색 등등으로 하루하루가 고역의 나날일 터이다. 활화산이 폭발하듯이 뜨거운 정열의 분수는 하루에도 몇번씩 발산을 한다. 물어주고 핥아주고 빨아 당기던 짜릿한 흡착기 같던 옥문(玉門)도 그저 꿈만 같다. 깊숙한 그곳에는 빠알간 장미꽃 한송이가 끝없이 유혹을 하는 신비의 샘물이다. 마음은 아직도 청춘으로 착각하지만 몸이 따라줄 리도 없지 않는가. 숫컷과 암컷의 성적(性的) 욕구는 스쳐지난 바람으로 이성(異性)의 매력마저 잊혀진 세월이 아닌가. 남자로 태여나서 한 여인의 남편으로 살아온 지난 날이 아내에겐 지옥같은 세월이 아니었을까. " 여보 ! 사랑해 당신뿐이야 "라는 이 한마디 속삭여 준 기억이 언제이던가. 있기나 한 것이련가. 앞차기 옆차기 뒷차기 온갖 잡스런 동물의 모습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50여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부대끼며 살아온 부부의 정(情)만은 변함이 없기를 바랄뿐이다. 때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무슨 말이 필요한가. 신림동에 유명한 순대국 맛집으로 전철에 오른다. 허름한 옛 정감이 묻어나는 토종집이다. 서울시 유산이라는 현수막도 눈에 잡힌다. 웃고 떠들며 끝없이 이어지는 잡다한 이야기에 주위에 눈총도 감내한다. 언제나 그러하듯 만나면 10대 청소년으로 회귀하는 착각의 순간이다. 친구들과의 한잔술이 면역력의 백신일 것이라 믿으면서 추억의 뒤안길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