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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도립공원 동편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809년(신라 헌덕왕 1)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하였다. 그 후 1264년(고려 원종 5)에 중창하였다. 1545년(조선 인종 1)에 소실되어 1546년(명종 1)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후 법당과 비석을 세워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하였다.
1563년(명종 18)에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중건했다. 1589년(선조 22)에 다시 중창하여 큰 절이 되었다. 1847년(헌종 13)에 또다시 불탄 것을 후에 중수하였다. 이때 극락보전 건물을 대웅전으로 사용해 왔다가 2011년 다시 극락보전으로 변경하였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엔 석가모니 부처님을, 아미타부처님은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에 모신다. 극락전은 서향이나 남향으로 짓는다.
은해사'라는 이름은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라고 한것에서 따온듯 하다. 혹자는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보전과 설선당, 심검당, 종루, 보화루, 독성각, 승당, 요사채 등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4호인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 보물 제790호인 백흥암 극락전 등이 있다. 이 밖에도 60여 점의 문화재와 24동(棟)의 건물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기기암, 백흥암, 운부암, 거조암, 중암암 등이 있다. 말사로는 경산시 환성사, 군위군 인각사, 경산시 불굴사, 청송군 대전사, 제주특별자치도 약천사 등이 있다.
●은해사의 가람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배치가 되어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서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으로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역사 속의 은해사 출신 스님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수와 불사를 거듭한 은해사는 한국을 빛낸 여러 고승을 배출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새 장을 여신 화쟁국사 원효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스님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이신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이 있다.(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부터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되었고 화엄학의 대강백이신 영파성규 스님이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이 높았다. 최근에도 향곡, 운봉, 성철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현재에는 비구 선방 운부암, 기기암과 비구니 선방 백흥암 등에서 100여 분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계신다. 또한 한국불교 최고의 경율론 삼장법사과정인 대한불교 조계종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서 10여 분의 석학들이 정진 수학중이시다.
●은해사와 추사
김노경과 추사는 조선 왕실의 외손이었다. 영조는 김노경에게 진외증조(陳外曾祖), 추사에게는 진외고조(陳外高祖)였다.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었으며, 영조의 어제수호완문을 보장(保藏)한 사찰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1816.11.8)한 김노경은 아들 추사(당시 33세)를 데리고 대구 감영에서 팔공산을 넘어 은해사에 들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추사와 인연이 있는 혼허가 은해사에 머물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헌종(憲宗, 1827∼1849)이 즉위하자 권력을 잡은 노론(老論) 시파(時派) 안동 김씨 세도정권은 노론 벽파(僻派)를 철저하게 숙청하기 시작했다. 경주 김씨 추사 가문은 대대로 노론 벽파였다. 죽은 생부 김노경은 관작을 추탈(追奪)당했고, 추사는 1840년 9월 기약없는 유배길에 올라 제주(濟州) 대정(大靜)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중에 불교에 더욱 귀의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8년 12월 6일 추사는 63세가 되어서야 마침내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났다. 장장 8년 3개월의 기나긴 귀양살이였다. 추사는 제주에서 인고의 유배생활을 견디며 조선 서예사에 길이 남을 추사체를 완성했다. 1849년 유배에서 돌아온 추사는 예산의 가산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올라가 용산 한강변의 마루도 없는 집에서 기거했다.
은해사 중수를 마친 혼허는 교유가 깊었던 추사에게 부탁해서 은해사, 대웅전, 불광각, 보화루, 일로향각에 걸 현판 글씨를 받았다. 또, 백흥암의 '山海嵩深(산해숭심)', '十笏方丈(시홀방장)' 편액 글씨와 함께 여섯 폭 주련 글씨도 받았다. 추사가 1851년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를 떠나기 전에 이 작품들을 남겼다.
1862년 혼허가 쓴 '은해사중건기(銀海寺重建記)'를 보면 '대웅전, 보화루, 불광각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金相公)의 묵묘(墨妙)'라고 했다. 1879년(고종 16) 영천군수 이학래(李鶴來, 1824~1883)가 쓴 '은해사연혁변(銀海寺沿革辨)'에는 '문의 편액인 '銀海寺(은해사)', 불당의 '大雄殿(대웅전)', 종각의 '寶華樓(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의 글씨이며, 노전(爐殿)을 '一爐香閣(일로향각)'이라고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노전(爐殿):불교 대웅전과 그 밖의 법당을 맡아보는 사람의 숙소.
● 작품들
추사의 작품은 은해사에만 ‘불광(佛光)’ ‘대웅전(大雄殿)’ ‘보화루(寶華樓)’ ‘은해사(銀海寺)’ ‘일로향각(一爐香閣)’ ‘산해숭심(山海崇深)’ 등의 편액이 있고, 은해사 부속암자인 백흥암에는 ‘시홀방장(十笏方丈)’ 편액과 주련 작품이 있다.
은해사에 남긴 글씨는 대부분 추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인데 이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佛光(불광)’이라는 편액이다.
‘불광’은 불광각에 걸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대웅전 안쪽에 걸려 있다가 현재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처음 편액은 ‘불(佛)’자의 유달리 긴 세로획 밑을 잘라서 만들었는데, 이를 보고 추사가 대로해 편액을 떼어오게 해서 불태워버렸다 한다.
현재 이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처음 편액을 불태워버린 뒤 다시 글씨 원본대로 만들어 건 것이다.
‘불광’ 편액은 송판 4장을 가로로 이어붙여 만든 대작으로 세로가 135㎝, 가로가 155㎝ 정도 된다. ‘불’자의 가장 긴 세로 획의 길이는 130㎝가량이다.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된 이 편액은 세로 획 덕분에 가로 글씨 편액임에도 불구하고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와 비슷한 편액이 되었다.
현존하는 추사의 친필 글씨 작품 중 가장 큰 대작으로 파악되고 있다.
천양희 시인은 이 이야기를 소재로 ‘파지’라는 시를 남겼다.
‘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詩)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중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은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며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또한 추사 예서 중 백미로 꼽히는 ‘일로향각(一爐香閣)’은 ‘한 마음을 화로에 넣고 담금질해 향기를 만든다’는 뜻이다. 글자 형태가 가히 예술적이다. 爐(노)자의 부수인 火(화)를 작게 위에 붙여 놓은 것이나, 香(향)의 글자를 원래 글자와 달리 변형시킨 것이나, 閣(각)자의 門(문)자의 획을 본래의 안으로 가 아닌 밖으로 삐쳐 변형시킨 것은 미적 구성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산해숭심(山海崇深)은 청나라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이 제자인 추사에게 학문 태도를 격려하며 보낸 편지에 적힌, ‘옛 것을 고찰하여 오늘을 증명하니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攷古證今 山海崇深〕’는 잠언 구절의 일부입니다. 추사는 스승의 편지를 읽고 이 구절을 인용해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을 지었다고 합니다. ‘산해숭심’은 또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한없이 높고 깊은 산과 바다와 같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출처] 영천 백흥암 산해숭심 편액 탑영|작성자 행복한놀부
[카카오맵] 은해사
경북 영천시 청통면 청통로 951 (청통면 치일리)
http://kko.to/se3ful-mK
1. 은해사
1) 대웅전
2) 불광
3) 은해사
4)일로향각
5)보화루
2. 백흥암
●진영각. 십홀방장(眞影閣、十笏方丈)
십홀방장은 유마거사의 아주 작은방을 말하는데, 그 방에 문수보살과 많은 대중이 찾아왔다. 방 안에는 의자가 달랑 하나 였더란다.
"문수보살이 사람이 많은데 의자가 하나요?" 하니
"유마는 법을 구하러 왔소, 의자를 구하러 왔소?"하고 되물었다 한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3만 2천 사자좌를 구해 방에 들였는데
그 많은 대중이 다 들어와 앉고도 자리가 남았다는 이야기다.
만파석란(萬波錫蘭) 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출처] 십홀방장의 세계를 어찌 알까..백흥암|작성자 심슨
我觀維摩方丈室 [아관유마방장실]
내가 유마거사의 방장실을 보니
能受九百萬菩薩 [수구백만보살]
능히 구백만 보살을 들일 수 있고
三萬二千獅子座 [삼만이천사자좌]
삼만 이천사자좌가 있어
皆悉容受不迫 [개실용수불박착]
모두가 앉고도 비좁지 않네
又能分布一鉢飯 [우분포일발반]
능히 한 바리때 음식을 나누면
駿飽十方無量泉 [염포시방무량천]
가없는 모든 중생 배부르리라
첫댓글 추사의 일생
https://naver.me/xMbgbqvV
백흥암 주련
https://naver.me/xaCNCdyg
산해숭심과 산숭해심 진위
https://naver.me/FKpCxWFo
추사와 은해사
https://naver.me/FeefNeGQ
은해사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그림과 글씨가 많다는것이 ㅡ놀람네
역시 대단한 울칠성대장의 추사의 팬이네 ㅎ
은해사가 대구에서 좀 떨어진곳이라 잘가지 않는사찰인데 ㅡ이번 추사 김정희선생의 그림과 글씨을 한번 보려가야겠네 덕분에 좋은공부했네 ㅡ 그래도 팔공산 자락에 왔다고 전화도 감사하고 ㅡ~^-^
국립대구박물관에서 가을에 추사가 쓴 편액을 전시 한다고 합니다. 기회가 되면 가고 싶네요.대장님도 뵙고~
@칠성 난 대구에 살면서도 이런 문화행사가 있는줄도 모르는데ㅎ
울 칠성대장은 이런행사도 알고 추사의 팬이 맞네요 ㅎ
시간이 맞으면 저녁이라도 먹고 가요 ㅡ감사 ㅡ
@동부능선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