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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들
1.경덕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상리1리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부사직 이필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풍산의 동쪽에 있는 예안이씨의 집성촌인 상리리의 속칭 새못골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반칸의 퇴를 내었다.
둥글게 다듬은 화강석 주초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은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방형의 각주이다.
사방이 토석담장으로 둘려져 있으며 출입은 우측의 사주문으로 한다.
이필간(?∼1514)의 본관은 예안으로 자는 충문이다.
음보로 부사직을 역임하였으나 기묘사화로 현유석학이 화를 입고 세상이 혼탁해짐을 한탄하였다.
사후에 아들 영·전·훈 3형제가 안동으로 낙향할 때 신위를 모시고 내려와서
풍산 상리의 경덕사에 봉안하여 향사를 지냄으로써 예안이씨 안동파조로 추앙되고 있다.
2.김성범 · 일직손씨 정열효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노하동 885번지
시 대 조선시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오석으로 제작한
일직손씨의 열녀 명정과 김성범의 효자 명정이 세워져 있다.
두 사람은 조선 순조 때 안동 노하동에 살던 김전대의 부인과 아들이다.
김전대가 갑자기 병이 들자 부인과 아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892년(고종 29)에 명정이 내렸으며, 1893년에 정려각을 세웠다.
3.임호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912-2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운천 김용을 제향하던 서원이다.
내부에는 임호서당 현판이 걸려 있고 반변천 쪽으로 있는 건물내에 아양루 현판이 걸려 있다.
영덕 방면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가다가 천전리에서 임하댐 방면으로 직진하여 오면 우측에 큰 다리가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임하리이다.
임호서원은 이 마을에서 신덕리로 넘어가는 길목의 오미산 둔덕의 풍광이 빼어난 곳에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임호서원은 당초 임천서원의 구지 옆에 강당을 세워 운천을 제향하다가 1981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묘우나 동·서재가 따로 있지 않고 강당과 주사, 그리고 1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중앙에 6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기단은 2단으로 상부가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으며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웠다.
운천 김용(1557∼1620)의 본관은 의성으로 자는 도원이다.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검열소직 봉직 중 병을 얻어 귀향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에 추대되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이어 사간원정언,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를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선산부사,
상주목사를 역임할 때 선정을 베풀었다.
다시 내직으로 편수관이 되어 『선조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저서로 『운천집』이 남아 있다.
임진호종공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4.화천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16-2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문경공 겸암 류운룡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에서 세운 서원이다.
서원에는 경덕사, 숭교당, 주경재, 사성재, 존현재, 전학재, 지산루, 유도문 등의 현판이 있다.
하회마을의 강 건너편 부용대 기슭에 자리잡은 옥연정사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1786에 건립하여 겸암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자인 동리 김윤안과 종손자인 졸재 류원지를 배향하고 100여년 이상 춘추로 향사를 지내오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은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사림의 공론으로 1996년에 복설하였다.
이 서원의 규모는 사당 6칸, 삼문 3칸, 강당 15칸, 동서재 각 4칸 반, 문루 10칸, 전사청 3칸, 주소 8칸, 문루 1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인 숭교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인데 높이 쌓은 기단 위에 각주를 세웠다.
중앙에 6칸의 대청마루를 꾸미고 좌우에 각각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입교재,
사성재라 이름하였으며 정면 5칸은 마루로 꾸며 강당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도록 건축하였다.
사당인 경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류운룡(1539∼1601)의 본관은 풍산으로 자는 응현이며 호는 겸암이다. 중영의 아들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도학 공부에 주력하였다.
음사(陰仕)로 전함사별좌에 제수되었고 풍저창직장을 거쳐 인동현감, 광흥주부, 한성판관을 역임하였다.
임란에 류성룡의 간청으로 윤허를 받고 귀향하여 가족을 이끌고 피난하였으며
전후에는 풍기군수, 원주목사를 지냈다.
저서로 『겸암집』이 남아 있고 화천서원과 우곡서원에 제향되었다.
5.백동서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시 대 조선시대
백동서당은 조선 후기의 명신이자 학자·항일지사였던 향산 이만도가 벼슬에서 물러나 소요하며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했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백동서당은 수졸당과 마주보고 있는 산의 우측편 산록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서당은 향산의 선대부터 내려오던 가학연원 상의 강학공간이었는데 1977년 계명대학교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하였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이 서당은 좌측에는 온돌방을 두고
우측은 마루로 꾸몄으며
좌측과 후면에는 판벽을 만들고 판문을 달아 전면만 개방하였다.
시멘트로 만든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웠는데 지붕은 현대식 판넬지붕으로 형태는 맞배형이다.
이만도(1842 ∼1910)의 본관은 진성으로 자는 관필이다.
퇴계의 11대손으로 1866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지평, 병조정랑에 제수되었다. 양산군수를 역임하고
1882년 고향인 도산의 백동에다 서재를 꾸미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되자 예안에서 의병대장이 되어 안동 의병대장 권세연과 연합해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단식을 시작해서 순국하였다.
선생 구택은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안막동으로 이건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방대한 문집과 『향산일기』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6.소계서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70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던 학자 서산 김흥락의 강학지소인 서당이다.
이 서당에는 서산이란 선생의 아호 현판과 족질 후학 김정모가 지은 기문이 게첨되어 있다.
송야교에서 서후면 소재지 방면으로 가다가 소재지 조금 못 미쳐 우측편에 서당이 있다.
당초 학봉종택은 현재의 종택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고 침수가 자주 된다 하여
선생의 8세손인 광찬(光燦)이 1762년에 100m 가량 떨어진 소계서당의 위치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였는데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하면서 종택의 사랑채는 옮기지 않고 서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좌측에 2칸의 온돌방을 마련하고
우측에 마루를 두었으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쌓고 상부는 시멘트로 마감하였다.
그 위에 둥글게 다듬은 화강석 위에 원주를 세웠는데 전면을 제외한 나머지는 방형의 각주를 세웠다.
서산 김흥락(1827∼1899)의 본관은 의성으로 자는 계맹이다. 류치명의 문인으로 퇴계학의 적전을 이었고
영남학파의 종장이 되었다.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 도사, 지평 등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였다.
안동지방의 민폐가 극심해지자 좌수로 취임하여 폐정을 시정하는데 노력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 김도화, 권진연 등과 함께 의거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분쇄하자는 격문인 안동통문을 각지에 보내어 을미의병을 주도하였다.
건국포장(1995년)에 추서되었으며 저서로는 『서산집』이 남아 있다.
7.경광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백죽당 배상지·용재 이종준·경당 장흥효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이다.
서후면 소재지로 가는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소재지 못미쳐서 오른편으로 사천을 따라 들어가면
산 자락의 소나무 숲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은 당초 유정사란 절이었는데 사림에서 1568년에 서당을 건립하고
1662년 경광정사라고 이름을 바꾼 뒤 백죽당 배상지, 용재 이종준 두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1687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어 경당 선생의 위패를 옮겨서 백죽당, 용재 두 선생과 함께 제향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873년 단소를 설립하여 향사해 왔다.
197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설되어 매년 9월 중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강당과 묘우만 남아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6칸의 대청마루를 배치하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은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두 건물 좌우에는 모두 풍판을 달았다.
배상지(1354∼1413)의 자는 부전이며 호는 백죽당으로 정평공 손홍량 선생의 외손자이다.
고려말에 판사복시사를 지냈으나 조정이 문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있다가
망국에 이르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 하였다.
이종준(1454∼1498)의 자는 중균이며 호는 용재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문장과 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절의가 있었다.
장흥효(1564~1633)의 자는 행원이며 호는 경당이다.
학봉과 서애의 문인으로 심학을 전수받았으며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학문과 행의로 인조때 창릉 참봉에 추천되었으나 직첩이 도착하기 전에 운명하였다.
8.근성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조선 개국공신인 의암 김인찬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사당에는 원훈사의 현판이 걸려 있다. 안동에서 남안동 I.C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일직면 조탑리 마을의 서쪽 끝자락 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812년에 이곡서원으로 창건한 이 서원은 의성군 안평면 하평리에서 비안면으로 이건했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1923년에 현 위치에 복설하고 근성으로 서원명을 고쳤다.
익성군 김이갱을 종향하였다. 서원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강당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인 원훈사, 정면 3칸, 측면 1칸의 내삼문, 정면 2칸,
측면 1칸의 전사청, 그리고 출입문에 해당하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구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인찬(1336~1392)의 본관은 양근으로 조선 개국공신이며 양근김씨의 시조다.
자는 의지이며 호는 의암이다.
1376년(우왕 2) 북청만호가 되고 1390년(공양왕 2)밀직부사로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국 후 중추원사가 되었다. 개국공신 1등으로 익화군에 추봉되었다.
문하시랑 찬성사에 증직되고 충민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추향된 김이갱의 자는 원문으로 익화군 김인찬의 현손이다.
성종조에 좌리공신이 되었고 음보로 호조참판을 지냈다.
9.도계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 359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들은 1687년(숙종 13) 옥봉 권위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내에는 사당인 모현사, 상의재, 홍도문과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7호로 지정된 만대헌이 있다.
안동 권씨 집성촌인 북후면 도촌리에 있다.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8년에 복설하여 매년 3월,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현재 강당은 없어지고 사당과 동재와 만대헌이 남아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팔작기와집이며 만대헌은 좌측칸을 온돌방으로 꾸미고
우측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온돌방의 전면에는 반간 규모의 퇴간을 돌출시켜 전체적으로는 ㄱ자형 건물이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쌓기하여 2단으로 구성하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전체적인 구조나 가운데 설주 등이 1591년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권위(1552∼1630)의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숙회이며 호는 옥봉이다.
김성일·김언기·조목의 문인으로 어려서 동당시 별시에 합격하였으며, 160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호조좌랑·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뒤에 형조정랑·예조정랑을 제수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도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옥봉집』이 남아 있다.
10.명호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정상동 512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퇴계의 문하로써 후릉참봉을 지낸 어은 이용이 1570년(선조 3)에
건립한 정자로 안동댐 수몰로 1974년 와룡면 도곡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낙동강 건너 정상동에서 귀래정을 지나 반구정으로 가는 길목의 우측에 북향으로
낙동강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현재 어은정에는 어은정이란 현판 대신에 명호서원이라 쓴 현판이 게첨되어 있다.
명호서원은 1790년 용헌 이원을 주향으로 하고 망헌 이주를 배향으로 모시고
건립된 서원으로 당초에는 ‘명계서원’이라 하고 청도군에 있었으나
1837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고 명칭을 바꾸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설하지 못하였다.
어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2칸의 온돌방과 4칸의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원(1368∼1429)의 본관은 고성으로 자는 차산이며 호는 용헌이다.
1385년 문과에 급제하고,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철성군에 봉해졌다.
대사헌·예조판서·대제학·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양헌으로 저서는 『용헌집』이 남아 있다.
이주(?~1504)의 자는 주지로 평의 아들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14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을 지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김굉필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 직언으로 유명하였으며 사후에 도승지에 추중되었다.
11.벽계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북후면 장기리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1860년에 옥계 강봉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북후면 소재지에 도달하기 전에 좌측으로 북후초등학교를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벽절마을이 있고 이곳에 서원이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복원되었으며
현재 사당인 상효사와 강당인 정륜당, 신문, 동재, 주사 등이 남아 있다. 매년 3, 9월 하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상효사는 정면 3칸의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며,
정륜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건물로 전면에는 반칸의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뒷편에는 가운데 1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강봉문(1735∼1815)의 본관은 진주로 자는 주서이다.
시의 15대손으로 득연의 아들이다. 류홍원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향내의 명사를 두루 찾아 교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헌종 때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며 저서로는 『옥계유고』가 남아 있다.
12.봉암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매곡 1리 559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허영정 남응원을 주향으로 모시고 난재 남융달, 유유헌 남급, 고암 남천한을 배향한 서원이다.
1861년 풍산읍 매곡리에 봉암사로 창건된 이 서원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28년 세덕사로 복설되었다. 1964년 사림들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되어 매년 3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서원에는 묘우인 상덕사, 강당인 현휘당, 동·서재인 숭덕재와 광업재, 그리고 전사청과 주사로 이루어져 있다.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중앙에 허영정, 좌측에 유유헌, 우측에 난재와 고암이 배향되어 있다.
현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동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며 전사청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남응원(1539∼1611)의 본관은 영양으로 자는 인중이며, 호는 허영정이다.
1580년 여강서원 사림의 천장으로 감사 유홍과 정지연 등이 차례로 효성과 행검을 아뢰어
임금이 포상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675년 정려가 내려졌다.
남융달(1565∼1652)의 자는 현언이다. 과거를 포기하고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남급(1592∼1671)의 자는 탁부이다. 정경세의 문인으로 162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명유로 침낭에 천거되었다.
남천한(1607~1686)의 자는 장우이다. 163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4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조참의를 지낸 뒤 임천에 마음을 붙여 조정의 부름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13.분강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면 운곡리163
시 대 조선시대
이 서원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농암 이현보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온혜리에서 온천을 지나 용수사 가는 길로 따라가다 보면 작은 시내가 가로질러 흐르고
‘분강서원 입로’라는 돌 표지판이 보인다.
좌측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면 골 안에 서원이 있다.
서원은 1613년에 농암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림의 의견을 모아 향현사에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1702년에 분천의 애일당 남쪽에서 석채례를 행하고 유상을 묘내에 봉안하였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7년 옛터에 복원하였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사당인 향현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이현보(1467∼1555)의 본관은 영천으로 자는 비중이며 호는 농암이다.
1498년 문과 급제하고 1504년 정언으로 재임시 서연관의 비행을 논했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고 1523년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표리를 하사받았다.
1542년 호조참판에 이르러 은퇴를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자 온천욕을 핑계로 낙향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조를 지었다.
10장으로 전하던 어부사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전한다. 시호는 효절이며 분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다.
14.용계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유일재 김언기를 배향한 서원이다.
와룡면 소재지에서 예안 방향으로 가면 산야리 산골마을이 있고 이 마을의 동쪽 산자락에 서원이 있다.
이 서원은 1778년 선생의 문인들과 후손들이 보덕사를 세워 선생을 제향하고 인재 권대기를 추향하여 오던 중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지금까지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서원 맞은 편 언덕에 보덕단을 세워 매년 3월 초정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는 강당 건물 1동과 부속 건물 1동이 남아 있다.
강당은 막돌 초석 위에 사각의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중앙에 4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한
간결한 구조의 건물이다.
김언기(1520∼1588)의 본관은 광산으로 자는 중온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1567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말년에 도산과 가까운 가야로 옮겨 살면서 1561년 서재를 지어 유일재라 편액하고 후진을 가르쳤다.
문하에서 남치리, 정사성, 권위, 박의장, 신지제, 권태일 등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의 학문융성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시문 약간편이 『용산세고』와 『실기』에 전한다.
권대기(1523∼1587)의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경수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155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조목, 구봉령, 금란수 등과 계를 맺어 철마다 산사에 모여 경사를 강론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이계에 서당을 지어 후진을 교육하였다.
저서로는 『인재선생실기』가 있다.
15.유암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낙금헌 이정백을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사당에는 존덕사의 현판이 게첨되어 있다.
안동시에서 와룡으로 가는 청머리재를 넘어
서지리에서 좌회전하면 이하리와 이상리가 있고 이곳을 지나면 주하리가 있다.
서원은 마을 초입의 좌측 산록에 북향하고 있다.
이 서원은 1761년 사림의 공의로 주하리의 경계에 있는 유암 위에 세워졌으나
1786년 합계 가로 이건하였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36년에 복설되어 3월 중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경내에는 존덕사, 강당, 전사청, 신문 등이 있다.
사당인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4칸의 협실이 있다.
신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전사청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정백(1553∼1600)의 본관은 진성으로 자는 여직이며 호는 낙금헌이다. 김성일, 남치리, 권우 등과 교유하였다.
158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유암사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낙금헌집』이 남아 있다.
16.창열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교리 273
시 대 조선시대
창열서원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단계 하위지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하였다.
1804(순조 4)년에 창열사를 지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1809년(순조 9)에 안동 시 서후면 송야리에 창건하였다.
그 뒤 사림의 중의로 안동시 서후면 이개리로 이건해서 춘 추향을 받들어오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89년에 사림과 후 손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설되어 매년 음력 9월 2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창열사, 4칸의 숭열당, 3칸의 성안재, 2칸의 전사청, 3칸의 신문, 3 칸의 유의문 등이 있다.
사당인 창열사에는 단계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강당인 숭열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3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된다.
성인재는 기숙사로 향사 및 원내의 행사시에 제관과 유림들이 기거한다.
신문은 사당의 대문으로 향 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유의문은 서원의 대문이다.
17.타양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정평공 손홍량, 상촌 김자수, 파산 류중엄을 제향하기 위해 설립된 서원이다.
서원내 각 건물마다 상현사·경앙문·성경당·진수재·사의재·숭모재라 쓴 현판이 게판되어 있다.
안동에서 중앙고속도로로 남안동 I.C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일직면 조탑리 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다.
1741년(영조 17)에 건립된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일직 송리 뒷산에 단을 쌓아 제향해 오다가 1984년 사림에 의해 복설되었다.
매년 3월 중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서원내에는 사당인 상현사, 강당인 성경당, 전사청과 동재, 주사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강당인 성경당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좌측방이 사의재이며 우측방이 숭모재이다.
서원의 대문은 경앙문이다.
손홍량(1287~1379)의 본관은 일직으로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첨의평리 판삼사에 올라 복주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했을 때 나아가 맞이하니 왕이
“그대는 참으로 일직한 사람이다”라고 치하했다 한다. 시호는 정평공이다.
김자수(1351~1413)의 본관은 경주로 자는 순중이며, 호는 상촌으로 정평공 손홍량의 외손자다.
공민왕 23년에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관찰사에 이르렀으나
조선 개국과 더불어 형조판서로 부름을 받고 길을 떠나 경기도 광주 추령에 이르러
고려의 망국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류중엄(1538~1571)의 본관은 풍산으로 자는 희범이며 호는 파산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종질인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과 동문수학하여 학문에 침잠했으나 3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비지 남치리와 함께 ‘계문의 안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18.마곡서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시 대 조선시대
이 서당은 선조32년(1602)에 사림들의 공론으로 변계손을 비롯한 일곱 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서원이었다. 이 서원은 숭정7년(인조12, 1634)에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숙종40년(1714)에 중수했다. 그러나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아직까지 복설되지 못했다.
1973년과 1993년에 각각 중수가 있었다. 현재는 와가로 된 강당 1동만 남아 있다.
19.용강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용상동 63-1
시 대 조선시대
1671년(현종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70년에 복원하였다.
경내건물로는 3칸의 모덕사, 10칸의 숭문당, 신문, 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정문, 2칸의 전사청, 6칸의 주소 등으로 되어 있다.
사우인 모덕사에는 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숭문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전사청은 제수를 마련하는 곳이며, 주소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가 사용하고 있다.
매년 2월 하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20.안동향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송천동 1211
시 대 고려시대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고,
조선 시대인 1567년(명종 22)에 지금의 안동시 명륜동에 중건되었다.
그 규모가 성균관과 동일하여 영남 지방에서 가장 컸으나, 6·25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1983년 향교복설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지금의 위치인 송천동에 터를 잡고,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를 참고로 하여 1986년 다시 중건되었다.
규모는 1곽 6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6동은 정전인 대성전과 명륜당,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 청아루, 부엌을 뜻하는 주사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위시하여 사성십철과 공문72현, 송조6현 등을 봉안하였고,
대성전의 좌우에 있는 회랑인 동무와 서무에
동국18현(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
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 등
모두 122위를 봉안하였다.
현재의 자리에 중건하면서 동무와 서무의 구분 없이 5성(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과
송조6현 가운데의 4현(주돈이·정이·정호·주자),
그리고 동국18현을 똑같이 대성전에 봉안하는 위차를 새로이 확정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위차를 정할 때 5성을 제외한 현인들에 대하여는 국적을 구별하지 않고 연차에 따라 봉안하였다.
대문 좌우에 있던 안동석사자상은 현재 안동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21.가구리 선돌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시 대 청동시대
선돌이란 고인돌과 함께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있는 거석문화유물의 하나이다.
거석 숭배는 태양숭배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한편에서는 이를 태양거석문화라고도 한다.
이러한 태양거석 문화는 유럽과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남태평양, 중앙
또는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 퍼져 있으며 동북아시아에서는 한반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석문화로는 프랑스의 알리뉴망(A′lignument)이란 것을 들 수 있는데
선돌이 수 km씩 열을 짓고 늘어서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는 청동기 시대 이후 태양거석문화가 민족의 생활내부 깊숙이 들어와 있었으며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선돌은 마을과 마을의 경계, 기념물 등 여러 가지 설이 많으나
지금은 선돌자체가 신앙의 대상이라는 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선돌의 형태는 남성의 성기와 비슷하여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있는 남근 숭배사상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안동지방에도 많은 선돌이 알려져 있으나 규모나 형태로 보아
와룡면 가구동의 것이 가히 대표적인 것으로 일컬어질 만 하다.
이 선돌은 와룡에서 산야로 가는 옛도로 옆에 있으며 야산 기슭의 좁은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상에 드러난 높이가 약 3m정도이며 둘레는 약 1.5m 정도이다.
꼭대기는 양옆이 약간 잘룩하게 들어간 채로 중심부 보다 가늘어 졌으며 맨 끝에서 밑으로
약 50cm 가량은 돌기둥을 반으로 나누는 듯한 깊은 흠이 나 있다.
이것은 어느정도 손질이 가해진 것으로서 이 선돌 역시 남자의 성기 형태로 다듬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22.산야리 지석묘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 보토골마을
시 대 청동시대
고인돌 역시 선돌과 함께 태양거석문화의 하나로서 전 세계적인 분포를 가지고 있는데
어느 한 곳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인지 아니면 곳곳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분명히 알 수가 없다.
동북아시아에서는 한반도가 그 중심지가 되어 있으며 분포가 조밀한 것으로는
주위 다른 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무덤의 하나이며 청동기 시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 신석기 시대 말기부터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것 같다.
고인돌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유해를 안치하는 묘곽이 땅위에 있고
그 위에 크고넙적한 돌을 지붕처럼 올려놓은 탁자식과 유해를 땅밑에 묻고
땅 위에는 큰 돌을 몇 개의 작은 돌로 받혀놓은 바둑판식,
그리고 받침돌 없이 큰 돌만 땅위에 올려놓은 개석식 등이 그것이다.
안동은 주위의 대구, 경주, 예천, 영천 등 보다는 비교적 적은 편이나
와룡의 산야동, 풍산의 마애동과 예안의 신남동 등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산야동 고인돌과 약 20기 가량이 때를 지어 있는 것으로서 비교적 규모가 큰 것이다.
이들은 밑 부분이 땅에 묻혀 바둑판식인지 개석식인지 알 수 없으나
밑이 드러난 몇 개는 고임돌이 일부 보이고 있어 이 곳의 고인돌은 모두 일종의 바둑판식으로 생각된다.
크기는 길이가 200cm, 폭이 150cm,
두께 100cm 안팎이며 지름 30cm 안팎되는 작은 고임돌이 받치고 있다.
안동 일대의 고인돌은 대체로 위와 같은 규모의 것들로서 낙동강 유역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고
생각되나 예외적인 것으로 풍산 죽전동 고인돌을 들 수 있겠다.
죽전동 고인돌은 해발 300m의 산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거북형태로 다듬어진 것도 있다.
개석식으로 보이는데 크기는 길이가 약 100cm안팎이다.
23.영호루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정하동 342-5
시 대 고려시대
오래전부터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전북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한수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여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과 함께 하고 있다.
영가지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으며, 사장에서 활쏘기경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영호루 3자가 쓰인 금자현판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그후 조선중기 명종 2년 (1547년)의 대수로 누각은 유실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 안한준이 중창하였으며,
영조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처럼 홍수로 인하여 2차례 중건된 영호루는 정조 15년(1792년)의 홍수때
또 유실되어 4년뒤에 부사 이집두가 중건하여 100여년 동안 안도의 관문으로서
그 위용을 갖추었으나 갑술년 대수는 면할 수가 없었다.
안동대구간의 도로를 연결하는 안동교 공사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누위에서 휴식하는 사이
갑자기 물이 닥쳐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내려 갔다고 한다.
다음날 구담 부근에서 사람들은 무사히 구했으나 누각은 유실되고 「금자현판」만은 수개월후
선산군 구미리 부근의 강물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처럼 파란을 겪은 영호루가 사라지고 강가에 빈터만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이에 전통과 옛 문화를 숭상하고 향토애 짙은 안동시군민이
1969년 12월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 하였고,
드디어 안동시가지남편 강언덕인 정하동에 1,085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의 중건을 보게 되었다.
노송과 잡목이 우거진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한 새 영호루에 올라보면
멀리 북서쪽으로 선비의 영봉 학가산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강 건너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더욱이 시가지를 에워싼 영남산 줄기는 철따라 색깔이 변하니,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은 온통 시가의 모습을 다르게 한다.
일찍이 우탁, 정도전, 정몽주, 권근, 김종직, 이황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 영호루의 경관을 칭송 하였다.
24.왕모산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산19
시 대 고려시대
이 성은 도산면 원천리에 있는 것으로 이 지역의 다른 산성과 마찬가지로
1361년 고려의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왔을 때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이름을 왕모산성이라 한 것은 공민왕의 어머니가 이 곳에 피난하였기 때문이란 이야기도 전한다.
안동지역의 대부분의 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성도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것인데
산의 서쪽은 자연석으로 된 석성이다.
성의 전체 길이는 360m가 넘는 것으로 보이는데 석축이 잘 남은 곳은 약 50m 가량 확인할 수 있다.
성은 대략 산의 능선을 따란 산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가장 높은 부분은 2.5m 가량 되는데 자연 암벽위에 축조되어 있어 암벽의 높이를 빼면
1.7~1.8m 밖에 되지 않는다.
성의 북서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절벽의 밑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왕모산의 높이는 강의 수면(水面)으로부터 100m 남짓한 작은 산이지만
경사가 굉장히 급하여 천연의 요새로서 매우 알맞은 산이라 할 수 있겠다.
성의 밑에는 산성에서 굴러 내려온 듯한 돌들이 많이 널려 있는데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모두가 산성에 올라가서 쌓아놓은 돌을 적군을 향하여 밑으로 굴렸던 흔적이라 한다.
성의 안에는 성황당이 있으며 그 안에는 나무로 만든 남신상 1구와
여신상 1구가 있어 동네민들이 매년 정월보름 동신제를 지내고 있다.
25.학가산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 산69
시 대 고려시대
학가산은 안동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882m가량의 산으로
보문면과 북후면의 접경지대에 있으며 안동군 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은 학가산의 남쪽에 위치하며 성벽도 또한 남쪽을 향하고 있다.
성 위에서 내려다 보면 정면으로 낙동강 줄기가 가로놓여 있고 오른 쪽으로는 풍산읍이 보이며
왼쪽으로는 막곡리와 안동시의 옥동이 눈에 들어온다.
이 산성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몽진하였을 때에 쌓은 것이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안동지역의 다른 산성들 중에도 공민왕이 쌓았다는 전설을 가진 것들이 많이 있으나
공민왕이 안동에 머문 기간 등으로 생각해 보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산성은, 산의 남쪽 정상부에 자리잡은 선암사(지금: 애련암)에서
약 10분 오르면 오른쪽 성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하면서 암반위에 정연히 쌓여진 석성(石城)이며
중간 중간이 많이 허물어져 7,8군데 이상 끊어져 있다.
전체 길이는 800m 가깝다고 하는데 현재 남은 것은 400m 가량이다.
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아 성의 본래 형태는 절벽
또는 급경사의 지푶위에 큰 산돌들을 높이 2~4m정도로 쌓였으며 일부는 흙과 돌로 섞어 쌓이긷 하였다.
성벽의 폭은 약 2m 가량 되었다.
산의 동쪽인 신전리쪽으로 성문터가 있으나 성문은 남아있지 않다.
학가산의 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는 봉정사와 개목사로 유명한 천등산이 있으며
이 산의 정상부분에도 개목산성이란 돌성이 남아있는데
이 두 성은 서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6.청원루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중종 때 평양서윤을 지낸 김번(1479∼1544)선생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건립한 가옥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한 척화주전론의 거두였으며 예조판서였던
김상헌선생이 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1643년(인조 21) 중건하고
청을 멀리한다는 의미로 당호를 붙였다 한다.
좌,우익사를 중층으로 꾸미고 몸채부분은 기단을 높게 조성한 후
단층으로 앉힌 다락집형상의 ′ㄷ′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다.
몸채부분은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퇴칸에 온돌방을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이며
특히 몸채대청을 전면에 2자정도 폭으로 한단 낮게 마루를 2단으로 구성시킨 점이 눈에 띤다.
좌,우익사 루마루는 내측으로 궁판에 풍혈을 둔 난간을 세워 개방시키고
정,측면은 판벽에 판장문을 달아 폐쇄시켰으며 루하부 전면칸에 고간을 두고 뒷쪽은 아궁이를 설치했다.
정면 원주상부에는 길고 날카로운 살미를 끼우고 주두를 얹고 내측으로 보아지를 두어 대량을 받게 하였다.
도리방향으로는 창방없이 공아를 만들어 장혀와 처마도리를 받게한 이색적인 기법을 구사하였고
익사부분은 본채부분과 달리 창방을 보내고 살미와 보아지를 넣은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익사 충량은 판대공을 관통시켜고 충량 위에 동자주를 세워 접시받침을 넣은 후 외기를 받도록 하였다.
중층과 단층을 합성한 평면구성과 세부기법이 주목된다.
27.침락정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29-1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예조 예문관 검열을 지냈으며 의병대장이던
김해의 아들 매원 김광계가 1672년(현종 13)에 강학소로
건립하여 의병출신의 유사들을 모아 시회를 열던 정자이다.
1974년 12월 안동댐 수몰로 예안면 오천동 1번지에서 탁청정,
후조당 등의 건물과 함께 현위치로 이건되었다.
매원은 대암 박성, 한강 정구, 한훤당 김굉필, 여헌 장현광에게 사사하였으며
광해군의 난정을 멀리하고
이곳에 은거하였다 한다.
원래 정자가 위치하던 곳은 배산임수한 강안대지였으며
근처에 수직사(守直舍)를 비롯한 초가 3, 4동이 있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 2칸마루을 중심으로 좌우에 2칸 온돌방이 배치된 중당협실형이다.
정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사에 가까운 평면으로 대청 뒤쪽 상벽에 운암정사 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건축양식은 납도리 5량가구에 팔작지붕을 가진 매우 건실하면서도 소박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뜻있는 유생들의 문도수학소가 아닌가 싶다.
28.예안이씨 정충 정효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안교리 80-3
시 대 조선시대
이 정충정효각은 정충각과 정효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충각은 예안이씨 이홍인(1525-1594)의병장의 충신정려각이다.
이홍인은 임란때 의병장을 맡아 분전하였으나 1594년 구단지구 잔투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공로는 숨기라는 유언에 따라 전투의 성과나 행적을 남에게 알리지 않았으나
후일 마을주민과 유림에 의하여 그 공로가 밝혀지게 되어 1811년(순조 11년)에 충신으로 정려되었다.
조정에서는 통정대부 김굉으로 하여금 상량문을 짓게하고 정충각을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정효각은 이한오(1719-1793)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비각이다.
선생의 부친이 병환이 심해 지극 정성을 다하였으나, 백약이 무효, 차도가 없었다.
병중 부친이 꿩고기와 잉어를 원하시기에 이른 새벽에 낙동강 기슭, 수동 물가에 가서 잉어를 잡으려 했으나
저녁이 되도록 잡지 못하다가 허탕을 치고, 해질무렵 한 마리를 잡아서 급히 돌아 가는데,
갑가지 호랑이가 나타나기에 호랑이에게 병중 아버님께 다려 드린 후에 날 잡아가라고 했는데
호랑이는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집에 까지 오더니 갑자기 호랑이는 없어지고
꿩이 한 마리가 날아와 앉으니 그 꿩을 잡아 잉어와 함께 다려 드리니
부모님의 병환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선생님은 학덕이 탁월하여 세민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그후 조정에까지 소문이 퍼져 당시(순조 임금 재위시 임신년 서기 1812년)에
하늘이 아는 효행이라 하여 정효각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이 정충정효각은 충과 효를 함께 한 정각건물로서
우리의 전통 미풍양속인 충효사상을 널리 알릴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29.서악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태화동 605-1
시 대 신라
건물로는 원통전과 요사채 2동이 있다.
주법당인 원통전 내부에 있는 불상은 근래에 제작한 것이고 탱화 6점은 보존 가치가 있는 유물로 평가되는데,
6점 중 3점은 1770년(영조 45)에, 1점은 1868년(고종 5)에 제작한 것이다.
또 법당 안에 있는 동종은 1933년 3월 조성된 것으로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 범종 양식을 충실히 따른 귀중한 유물이다.
절 입구 바위에는 ‘연파독역산’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이 글귀는 조선 후기 한성판윤을 지낸 장화식(1853-1938)이
이곳에서 《역경》을 읽었다는 뜻으로, 절 뒤편에 장화식의 묘가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6.25때 소실된 것을 1954년에 중건하였다.
30.계종택 삼백당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580번지
시 대 현대
온계선생구택(종택)은 온계 이해(1496~1550) 선생이 20세 되던 해 노송정 본가에서 분가,
이곳에 집을 지어 정착하고 온계선생이 성균관에서 수학하는 동안
퇴계선생이 어머니 춘천 박씨를 모시고 5년간 거처했던 곳이다.
온계종택은 12대 후손인 지암(芝庵) 이인화(李仁和) 의병장이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내려진 단발령에 반발, 예안에서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으며,
퇴계종택과 나란히 안동유림 의거의 중심이었던 의병장 이인화의 생가이다
구한말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된지 110여년만에 2011.5.5일 낙성식을 갖고 제모습을 찾았다.
부지 1천611㎡에 건평 256㎡ 규모로 지어진 생가에는 사랑채, 안채, 대문채, 삼문, 사당 등
소실 전의 모습 그대로 건축됐으며 1896년 일본군에 의해 소실된지 110여년만에 온전한 제모습으로 돌아왔다.
31.김정근 효자문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4
시 대 조선시대
김정근 효자문은 성균진사를 지낸 김정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후기에 세운 것이다.
김정근 정려문이라고도 한다. 김정근은 1738년(영조 14)에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자는 대직, 호는 낙북이다.
김희맹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옥경이다.
1773년(영조 49) 증광진사시에 장원하였으며 효행으로 정려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일자형 건물이다. 중앙의 1칸은 솟을대문이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솟을대문 위에는 ‘효자성균진사김정근상지이십이년명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김정근 효자문 주위에는 담이 둘러져 있고, 왼쪽 담에 출입 일각문이 나 있다.
원래 효자문 뒤쪽에 가옥이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는 상태이다.
안동시에서 2009년 1월 1차로 보존 가치가 있는 비지정문화재 27점을 선별해
‘안동시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때 김정근 효자문도 이에 포함되었다.
김정근 효자문은 건물 양식보다 마을 주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교훈적 의미가 큰 건물이다.
32.배재형 처 문소김씨 표열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시 대 일제강점기
문소김씨 표열각은 흥해배씨 배재형(1894~1919)의 부인 문소김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배재형은 한일병합 후 가족과 함께 만주로 옮겨 갔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활동하다가 갑자기 병이 들자,
문소김씨 부인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병 구환을 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났다.
문소김씨는 남편이 죽자 장사를 지내고 18일 동안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 관현에서 이 사실을 알고 관을 부조하여 예장하게 하였고,
1931년 소식을 뒤늦게 접한 영남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표열각을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주위는 시멘트 담을 둘러 놓았다.
현판은 표열각, 현액의 내용은 ‘사인곡강배재형지처유인문소김씨지□임신칠월십사일친성김교린서’라 쓰여 있다.
33. 변중일 충효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시 대 조선시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변중일(1575~1660)의 충효를 기려 1686년에 세우고,
1847년(헌종 13)에 중수하였다. 모서리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원주변씨 간재 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1호) 앞에 있다.
변중일은 본관 원주, 자 가순, 호는 간재로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이 일으킨 의진에 쌀 100섬을 보내 의병 활동을 도왔다.
또한 당시 할머니와 어머니가 병중에 있어 피난을 가지 못하고 간호하고 있던 중
왜병이 할머니를 해치려 하자 대신 죽겠다고 자청하였다.
왜병도 그의 효심에 감복하여 물러났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제수받았다.
34.정충문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시 대 조선시대
정충문은 정평공 손홍량(1287~1379)의 충성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문이다.
손홍량은 본관은 일직이고, 호는 죽석이다. 본성은 순이었으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 5대조 손응 때 손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은 일직손씨 후손이다.
아버지는 합문지후를 지낸 손방이다.
1309년(충선왕 1) 문과에 급제, 1348년(충목왕 4) 첨의평리 때 정조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51년(충정왕 3) 65세로 사직하고 은퇴하여 향리로 내려왔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을 당해 복주(현 안동시)로 몽진하는 임금을 맞이하여,
공민왕이 궤장과 초상화를 하사하였다.
시호는 정평이고, 타양서원에 제향이 되었다. 저서로는『정평공실기』 등이 있다.
중앙의 1칸은 솟을대문이며,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門)만이 남아 있다.
정충문이 있는 일대는 과수원과 연꽃 재배지로 이용되고 있다.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의 앞터는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서당터’라 하는데,
실제로 정충문에서 북쪽으로 120m 정도 떨어진 곳에 타양서원과 북서쪽으로 230m 거리에는 근성서원이 있다.
35. 임증수 처 진천송씨 정렬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 산28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진천송씨의 정렬을 기려 1927년에 세웠다.
내부에는 '학생예천임증수지처열부진천송씨지려'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진천송씨는 이 지역에 살았던 임증수의 부인이다.
산사태로 집이 무너져 남편과 자식이 죽자 시신을 찾아내 장사 지낸 뒤 자신도 뒤를 따라 죽었다.
36.유홍춘 처 풍산김씨 정려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시 대 조선시대
하회마을 입구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려각 안에는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이 지역에 살았던 유홍춘의 부인 풍산김씨의 열행을 기려 세웠다.
유홍춘이 관청의 곡식을 축냈다는 죄로 붙잡혀가 형을 살고 나온 후 세상을 떠나자
풍산김씨는 남편의 억울함을 혈서를 써서 조정에 고하였다.
남편의 누명이 풀린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1793년(정조 17)에 정려가 내렸다.
풍산김씨 정려각과 관련하여 의장소라는 것이 있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까지도 길흉사의 경비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의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장소는 어려운 마을 주민들을 도울 목적으로 설립·운영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한다.
류홍춘이 세금을 내지 못해 안동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난 뒤 부인인 풍산김씨가 따라가자,
이는 가난이 마을의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라면서 이런 일을 막기 위한 장치로서 의장소를 만들었다.
의장소는 서애 류성룡의 8세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류상조와 그의 사촌동생 예조참판 류이좌,
류이좌의 아우 고성군수 류철조 등 세 형제가 조직하였다.
학서 류이좌의 문집인 『학서집』 권9에 「의장절목서」가 실려 있는데,
특히 의를 강조하면서 이런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관청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 의가 아니요, 종족 간에 화목치 않음도 의가 아니며,
성이 나 싸우고 재판하여 관청을 번거롭게 하는 것도 의가 아니다.”
류이좌가 단적으로 지적한 위의 구절은 오늘날까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37.소산리 지석묘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76
시 대 청동시대
소산리 고인돌 떼는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삼구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과 그 주변에 있다.
5기의 고인돌로, 산읍 안교리에서 916번 국도를 따라 가면 소산리 소산마을(본동)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삼구정은 소산마을 동남쪽 끝에 위치한다.
고인돌은 모두 5기인데, 이 중 3기(1·2·3호)는 삼구정 내에 위치하고,
4호는 삼구정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길가에, 5호는 소산리 앞을 지나 광덕리로 가는 길가에 있다.
삼구정 안에 있는 3기(1·2·3호)는 대체로 형태가 드러나 있으나,
2기는 매몰로 인하여 크기, 형태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소산리 고인돌 떼 전체 장축 방향은 동남-서북이다.
형태는 3~4개의 지석이 판자 형태의 개석을 바치고 있는 남방식 고인돌이다.
1호는 길이 196㎝, 폭 100㎝, 높이 30㎝이다. 2호는 길이 180㎝, 폭 120㎝, 높이 30㎝이고,
3호는 174㎝, 폭 80㎝, 높이 30㎝이다.
고인돌이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지석묘’라고도 불린다.
소산리 고인돌은 삼구정 주변에 위치하는데,
삼구정이 ‘삼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은 정자 안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3개, 곧 3기의 고인돌 때문이라고 한다.
38.송천동 지석묘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송천동 솔뫼마을
시 대 청동시대
송천동의 솔뫼마을에 있는 7기의 고인돌로 청동기시대의 분묘 유적이다.
1기는 민가 마당에 있으며 나머지 6기는 민묘 주변에 흩어져 있다.
7기가 모여 있어 칠성바위라고도 한다.
형태는 각각 다르며 받침돌은 보이지 않는다.
1호 고인돌은 길이 2.2m, 폭 1.45m, 두께는 0.9m로 긴 축의 방향은 동서로 놓여있다.
2호 고인돌은 타원형의 개석(蓋石, 뚜껑돌)으로 긴 축은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다.
길이 2.1m, 폭 1.9m, 두께 0.9m의 규모이다.
3호 고인돌의 형태는 원에 가까우며 길이 1.7m, 폭 1.5m, 두께 0.75m이다.
4호의 크기는 길이 1.2m, 폭 1.25m, 두께 0.75m이며
5호는 타원형의 개석으로 길이 1.85m, 폭 1.4m, 두께 0.95m이다.
긴 축의 방향은 동서이다. 6호 고인돌은 타원형이며 길이 1.65m,
폭 1m, 두께 0.45m로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다.
39.신덕리 고인돌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
시 대 청동시대
중덕(신이덕)마을의 남쪽 야산 자락에 흩어져 있는 10기의 고인돌로 청동기시대 분묘 유적이다.
원래는 완만한 경사지였으나 현재는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하부 구조가 매몰되어 있어 정확한 형식은 알 수 없으나 받침돌 없이 개석(蓋石, 뚜껑돌)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1호 고인돌은 길이 1.7m, 폭 1.5m, 높이 1m이며 긴 축이 동남-서북 방향으로 놓여 있다.
2호 고인돌은 길이 1.6m, 폭 1.46m, 높이 0.77m이며 남북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다.
3호 고인돌은 길이 2.24m, 폭 1.05m, 높이 0.47m로
동남-서북 방향이며, 4호 고인돌은 길이 1.5m, 폭 1.24m, 높이 0.8m로 동서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다.
5호 고인돌의 개석은 긴마름모꼴로 길이 2.1m, 폭 1.25m, 높이 0.77m이며 긴 축의 방향은 북동-서남이다.
6호는 직육면체의 형태로 길이 1.7m, 폭 1.68m, 높이 1.4m이며 긴 축은 동남-서북 방향이다.
7호 고인돌은 길이 1.3m, 폭 1m, 높이 0.6m로 긴 축은 동남-서북 방향이며,
8호는 개석이 많이 매몰되어 있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길이 1.4m, 폭 1.2m이다.
9호 고인돌은 길이 2.2m, 폭 1.2m, 높이 0.76m로 동서로 길게 놓여 있다.
10호 고인돌은 8호와 마찬가지로 많이 매몰되어 있으며, 길이 1.3m, 폭 0.8m로 동남-서북 방향으로 놓여 있다.
40.어담리 지석묘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 1001
시 대 청동시대
어담리 고인돌 떼는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 신성중학교에서 남쪽으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신성중학교 남쪽과 인접한 곳에는 도로 통과하는데, 고인돌은 도로와 도로 건너에 조성된 논 사이에 있다.
고인돌의 북쪽으로는 도로가 지나가고, 남쪽으로는 하신천이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어담리 고인돌 떼는 처음에 5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는데, 그중 2기는 매몰되어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나머지 3기 중에서도 형태와 크기가 확인되는 1기는
개석과 지석을 갖춘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의 모습을 보인다.
개석은 입방체형으로 크기는 길이 168㎝, 폭 110㎝, 높이 94㎝ 정도이다.
지석의 규모는 40㎝ 내외이다.
고인돌이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지석묘’라고도 불린다.
안동 지역의 고인돌은 다른 지역에 비해 분포나 규모에 있어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안동의 고인돌 문화가 영주·영양·대구·영천·경주 등의 주변 지역에 비해 크게 성행하지 못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1.온혜리 고인돌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독작골마을
시 대 청동시대
고인돌 옆에는 무덤 1기가 있다. 고인돌은 받침돌이 남아 있다.
개석은 입방체형으로 크기는 길이 220㎝, 폭 120㎝, 높이 45㎝ 정도이고, 받침돌의 크기는 30㎝ 내외이다.
고인돌 주변에는 무덤 1기와 민가 2채가 있다. 현재 받침돌이 있는 고인돌은 1기가 확인된다.
고인돌의 개석은 입방체형으로 크기는 길이 220㎝, 폭 120㎝, 높이 45㎝ 정도이고,
받침돌의 크기는 30㎝ 내외이다.
42. 정산리 고인돌 떼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시 대 청동시대
정산리 고인돌 떼1은 크기가 비슷한 소형의 것으로 3기가 남북으로 20m 간격으로 일렬을 이루고 있다.
1호는 길이 120㎝, 폭 95㎝, 높이 47㎝이다.
장축 방향은 남-북이며, 석질은 연질 사암이다. 2호는 마름모형이며,
길이 117㎝, 폭 110㎝, 높이 42㎝이다. 3호는 길이 101㎝, 폭 78㎝, 높이 72㎝이다.
정산리 고인돌 떼2는 고인돌 5기가 일렬을 이루고 있는데, 3호를 제외하고는 장축 방향이 모두 남-북이다.
1호는 북쪽 끝이 파손된 듯하며, 개석 윗면이 많이 깨져 있다.
크기는 길이 210㎝, 폭 100㎝, 높이 105㎝이다. 2호는 길이 200㎝, 폭 160㎝, 높이 70㎝이다.
3호는 윗면이 원형이며, 높이가 비교적 높은 기둥형이다.
크기는 길이 100㎝, 폭 120㎝, 높이 140㎝이다. 4호는 동서 양측이 파손되었고,
길이 190㎝, 폭 100㎝, 높이 70㎝이다. 5호는 4호의 파편으로 추정되며, 길이 80㎝, 폭 55㎝, 높이 50㎝이다.
43.태곡리 고인돌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 397-5
시 대 청동시대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에 있는 2기의 고인돌이다.
태곡리 고인돌 근처에서는 간간히 민무늬토기편이 채집되며,
1983년에는 태곡초등학교 교정에서 돌도끼 한 점이 채집된 바 있다.
돌도끼는 길이 14㎝, 폭 5.5㎝ 정도의 조갯날 도끼로 전체를 정교하게 갈았으며, 석질은 화강암제이다.
두 고인돌은 약 80㎝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한다. 1호는 하나는 둥근 화강암 개석으로, 장축은 남-북이다.
크기는 길이 150㎝, 너비 110㎝, 높이 40㎝이다.
남방식으로 받침돌이 있는지는 묻혀 있어 알 수 없는 상태이다. 2호는 1호에 비해 매우 큰 개석을 가졌으며,
받침돌이 보인다.
길이 350㎝, 너비 260㎝, 높이 160㎝이다. 장축 방향은 남-북이다.
이 근처에서는 간간히 민무늬토기편이 채집되며,
1983년에는 태곡초등학교 교정에서 돌도끼 한 점이 채집된 바 있다.
돌도끼는 길이 14㎝, 폭 5.5㎝ 정도의 조갯날 도끼로 전체를 정교하게 갈았으며, 석질은 화강암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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