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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명의 기원을 얘기할 때 높을 '고(高)'와 고구려어로 '성(城)'을 뜻하는 '구루(溝漊)'가 합쳐진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가장 보편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와 관련해서 『삼국지』 <고구려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검색)
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樂工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玄菟郡에 나아가 [한나라의] 朝服과 衣幘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玄菟]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城을 쌓고서 朝服과 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幘溝漊라 부른다. 溝漊란 [고]구려 사람들이 城을 부르는 말이다.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元本, 令主, 作今王, 誤. 後稍驕恣, 不復詣郡, 元本, 詣, 作諸, 誤. 于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적어도 3세기 무렵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구루=성'이라고 이해했고, 여기에서 파생된 지명 또는 단어가 중국인들이 인식할 정도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책구루 말고 이와 같은 지명으로는 매구루(買溝漊)가 있다. 매구루는 매구곡(買溝谷)과 동일 지명 또는 비슷한 지명으로 보이는데, 대무신왕 13년(30)부터 등장한다.
그해 7월 매구곡 사람 상수(尙須)와 동생인 위수(尉須), 사촌 동생 우도(于刀) 등이 함께 투항했다고 하는데, 두만강 일대로 이해하는게 주류인듯하다. 아마 그 지역의 수장급 인물이 족당(族黨)을 이끌고 고구려 중앙 정부 또는 왕실(계루부)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매구곡이 다시 등장한 때는 동천왕 시기이다. 관구검에게 패한 동천왕이 피신한 곳을 『삼국사기』는 '남옥저'로 명시하고 있지만, 『삼국지』 <관구검전>에는 이를 매구(買溝)라고 명시하고 있다. 만약 남옥저라면 함경남도 함흥 일대로 비정 가능하다. 그런데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동천왕이 남옥저가 아닌 북옥저로 달아났다고 적으면서, 북옥저가 일명 치구루(置溝婁)로 불린다고 적었다. '매(買)'와 '치(置)'는 의미보다는 단어 형태상 유사성으로 인해 혼용된 것 같은데, <광개토왕릉비>에 매구여(買句余)라는 용어가 나온 것을 보면 '매'가 맞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더불어 『자치통감』의 주석에 의하면 북옥저의 별칭을 치구루가 아닌 매구루로 적고 있는데, 단순 오기인지 아니면 실제 지명에 맞는 용어로 고쳐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조복과 의책을 거래하던 성(구루) 앞에 ' 책'을 붙인 것처럼 '매'구루 역시 무언가를 사고 파는 상행위(買)가 벌어지던 공간(구루)을 의미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수원의 옛 지명인 매흘(買忽:고구려계 지명)을 수성(水城:경덕왕대 개칭)으로 고친 것을 보면 매를 꼭 뜻으로만 해석할 부분은 아닌듯싶다. 충북에 위치한 살매현(薩買縣)이 청천현(淸川縣)으로 개칭된 것 또한 이와 연결 가능하다. 매는 내(川)와 의미가 상통한다. 암튼, 이 부분은 여기에서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더불어 이는 고구려계 지명인 홀(忽)과 같은 의미로도 이해하고 있다. 유명한 지명으로 홀본(忽本) 또는 미추홀(彌鄒忽)을 꼽을 수 있겠다. 그밖에 한성(漢城)의 옛 이름인 한홀(漢忽) 또는 내홀(乃忽), 대곡군(大谷郡)의 옛 이름인 다지홀(多知忽), 폭지군(瀑池郡)의 옛 이름인 내미홀군(內米忽郡), 지성(池城)의 옛 이름인 내미홀(內米忽), 비열성(卑列城)의 옛 이름인 비열홀(比烈忽), 해고군(海皐郡)의 옛 이름인 동삼홀군(冬三忽郡), 십곡현의 옛 이름인 덕돈홀(德頓忽), 음성현(陰城縣)의 옛 이름인 잉홀현(仍忽縣), 백성군(白城郡)의 옛 이름인 나혜홀(奈兮忽), 적성현(赤城縣)의 옛 이름인 사복홀(沙伏忽), 차성현(車城縣)의 옛 이름인 상(차) 홀현(上(車)忽縣) 등 그 용례를 찾으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를 보면 기본적으로 고구려에서 지명 또는 행정구역을 뜻하는 용어로 '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한번 고민해 볼 점!
우리가 보통 고대 행정구역의 단위로 떠올리는 용어로 주(州), 군(郡), 현(縣) 등이 있다. 그럼 이 행정구역의 형태는 어떻게 생겼을까? 성벽으로 둘러싼 거대한 성곽도시? 아니면 성벽 같은 건 없고, 드넓은 평지에 촘촘하게 건물과 사람이 몰려 있는 도회지? 뭐 그 중간의 형태(행정치소 등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외부에 넓게 도회지가 펼쳐져 있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개별 행정구역의 구체적인 경관에 대해 딱히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럼 고대 삼국, 그중에서도 고구려는 어떠했을까?
『북사』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주서』에도 거의 비슷한 내용이 있다)
[高句麗]王은 宮室을 잘 지어 치장한다. 도읍은 平壤城으로 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동서의 거리가 6리로 山을 따라 屈曲을 이루며, 남쪽으로는 浿水에 닿아 있다. 성 안에는 군량과 무기만을 저장하여 寇賊이 쳐들어 오는 날에 대비하였다가, [적이 쳐들어 오면] 곧 성 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王은 그 곁에 宮室을 별도로 지어놓지만 평상시에는 거처하지 않았다. 그 외에 또 國內城 및 漢城이 있는데, 역시 別都이다. 그 나라에서는 「三京」이라 부른다. 또 遼東[城]·玄菟[城] 등 수십城이 있는데, 모두 官司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新羅와는 늘 서로 침탈하여 전쟁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其王好修宮室, 都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東西六里 諸本脫 「西」 字, 據周書卷四九·隋書卷八一高麗傳補. 隨山屈曲, 南臨浿水. 城內唯積倉儲器, 備寇賊至日, 方入固守. 王別爲宅於其側, 不常居之. 其外復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其國中呼爲三京. 復有遼東·玄菟等數十城, 皆置官司以統攝. 與新羅每相侵奪, 戰爭不息.
고구려에서는 평양성(장안성)과 국내성, 한성 3개 주요 도시를 3경이라고 불렀고, 그외 요동과 현도 등 수십개 성이 있었다고 한다. 이중 몇몇 유적은 실제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성곽 도시임을 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평양성(장안성) 조차도 성 안에는 군량과 무기만 저장했다가 전쟁시에만 사용하고, 곁에 궁실을 따로 지었음에도 평시에는 그곳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맨 앞에 '궁실을 잘 지어 치장한다'는 내용과 연결시켜 이해하면(이 내용이 『주서』에는 없다), 화려하게 치장한 궁실조차도 戰時에만 썼다는 소리가 된다. 그말은 평시에 따로 거처하던 궁실이 성 외부에 있다는 소리가 아닐런지. 도성조차도 이렇다면 나머지 2개소의 별도는? 3경이 이렇다면 나머지 수십개 성은? 과연 이 수십개의 성시(城市)는 어떤 형태였을까?
이것과 연결시켜 같이 고민해 볼만한 내용이 있다.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영락 6년(396)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잔국(殘國)을 토벌해 58성 700촌을 얻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보다 앞서 광개토왕은 393년 8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고, 394년 8월 나라 남쪽에 7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였는데, 대략 황해도 일대에 대한 영역화가 마무리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392년 10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 비문의 각미성閣彌城. 이를 보면 비문의 영락 6년조는 광개토태왕 즉위 초부터 396년까지의 기사를 함축적으로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을 함락하고, 393년 8월, 394년 7월, 395년 8월 백제와 국경 남쪽에서 싸우는데 대략 패수를 경계로 양국이 접전을 벌였다.
즉, 396년 광개토태왕이 친정(親征)했을 시, 고구려는 대략 임진강 일대를 양국의 접경지로 이해하는 상황에서 경기 북부에서부터 남하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임진강 일대는 호로고루 앞이 배 없이 도하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날씨 상관없이 육로로 대군이 이동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경자년에 보기 5만이 동원되었고, 신라를 구원하고 종발성까지 진군했는데 이때는 그 이상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말미에 보면 고구려군이 수십개 성을 공취(攻取)하고, 돌아오는데 잔(국)이 의에 불복하고 감히 나와 싸웠다고 한다. 아마 고구려군의 후미를 추격한 것 같은데, 이때 고구려군은 반격을 꾀한 것이 아니라 아리수( 阿利水), 즉 한강을 건너 도성을 압박하는 전략을 취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구려군의 진격 방향이 북→남이었는지, 아니면 남 →북이었는지 여부다. 만약 전자라면 58성의 위치는 경기 북부에서 한강 북쪽 사이일 것이고, 후자라면 한강 이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의 주류 견해는 후자에 가깝다. 즉, 광개토태왕은 진즉에 한강 이남까지 진출해 곳곳에서 군사작전을 벌이고 복귀할 때는 한강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건너 왔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구려군이 별도의 도하장비 또는 수군(水軍)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귀 시점은 한강이 어는 겨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한강 이남으로 진군할 때에도 겨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가 된다.
공식적으로 한강의 결빙 기간을 기록하기 시작한 1900년대만 해도 한강의 결빙 기간은 80일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1940년대가 되면 42일로 줄어들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 15일 정도로 줄어든다. 2021~2022년 겨울에는 아예 언 날짜가 하루도 없었다. 특히 한강이 지금의 형태로 넓게 정비된 이후에는 결빙기간이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고대의 한강 결빙 기간도 약 3개월 정도라고 해보자.
고구려군은 396년 겨울(1~2월)에 남하해 그해 12월경 올라갔을 수도 있고, 396년 초(1~2월) 또는 말(12월~397년 1~2월)의 짧은 기간 안에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을 수도 있다. 즉, 1년짜리 전쟁이냐, 3개월짜리 전쟁이냐의 차이가 된다. 훗날 장수왕대 남의 나라 도성을 점령한 일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북연 도성(용성)을 함락하여 그 나라 창고를 탈탈 털고 백성 1만호(약 5만명)를 데리고 돌아온 일(436년)이고, 또 다른 것은 백제 도성(한성)을 함락하여 그 나라 창고를 탈탈 털고 백성 8천명을 데리고 돌아온 일(475년)이다. 만약 광개토왕이 직접 이끈 고구려군도 이와 같은 행보를 보였다면 전쟁은 1년에 걸쳐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고, 전격전으로 성을 함락해 지휘부만 처리하는 식으로 전쟁을 끝냈다면 2~3개월에 걸쳐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2~3개월만에 수십개의 성을 공격해서 함락하고 돌아오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에 도달한다. 고구려사를 공부한 초창기부터 주인장은 이 부분이 항상 의문이었고, 얼마전 박사학위논문을 쓸 때까지도 이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답을 도출해내는 과정을 밟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광개토왕릉비>에 적힌 58개의 성, 그리고 부여 정벌까지 끝난 시점에 기록된 64개의 성이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말한 주-군-현의 행정단위가 고구려에서는 성-촌이라는 형태로 존재했다면, 비문에 적힌 성 또한 우리가 상식적으로 떠올리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방어거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즉, '-성'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성벽으로 둘러싸인 군사기지'와 함께 '고구려식 행정단위'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주인장은 고구려에 국초부터 성곽 관련 기록이 등장하지만, 그 빈도수가 현저히 적은 점, 그리고 4세기 초 이전까지 초축 시점이 올라가는 고구려 성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근거로 고구려인이 생각하는 성(城)이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달랐던 것은 아닐까, 하는 주장을 한 바 있다. 험준한 자연지형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한 천연성곽으로 둘러싸인 거점도 성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훗날 고구려인에게 성이 어떤 개념으로 인식됐는지까지 연결된다고 본다.
중국 사관이 자기들 시각에 맞춰 주변 국가를 바라보고 서술한 것처럼, 고구려 사관 역시 자신들의 시각에 맞춰 주변 나라를 바라봤다면, 고구려인이 비문에 남긴 수십개 성이라는 것 또한 단순히 성벽으로 둘러싸인 군사기지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광개토태왕이 392년 백제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공격할 때의 기록을 음미하면 좋을 것 같다. 사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바닷물로 둘러싸인 관미성을 공격하기 위해 광개토태왕은 일곱 길로 나누어 군대를 진군시켰고, 20일을 공격해서야 겨우 함락할 수 있었다. 만약 비문에 적힌 58개의 잔국 내 자리한 성이 모두 이와 같은 험준한 지형에 기대어 세워진 군사기지라고 한다면, 단순 계산만으로도 58개의 성을 모두 함락하는 데에 있어 1,160일, 약 3년 2개월이 소요된다. 물론 모든 성이 관미성처럼 험준한 지형에 기대어 만든 군사 요충지가 아니라는 반발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단순 계산에는 성을 공격할 때마다 축차적으로 소요되는 병력의 소모, 각 성들 사이의 거리를 고려한 진군 시간, 고구려 중앙 정부에서 지속적이면서도 균일하게 유지해야 하는 보급체계, 공성무기의 유무, 공성 후 사후 행정처리에 소요되는 시간 등 다양한 변수가 전혀 적용되지 않은 것이다 .즉, 단순 계산으로 접근해서 살펴본다 하더라도 저 기록에 대해 의문을 품어야 하는 충분한 전제 조건이 마련된다는 뜻이다.
즉, 저 58개 성을 일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물론 저 기록은 전부 거짓말이다. 광개토태왕의 전공을 말도 안 되게 불린 것에 불과하다라고 하면 할말이 없다. 저 비문이 세워진 뒤 주변의 여러 나라, 고구려 국내의 모든 사람들이 와서 살펴볼 텐데 대놓고 완전 거짓을 적어놓는다? 흠. 글쎄...그렇게 보는 연구자들이 있긴 하다만 주인장은 반대한다) 주인장은 이런 시각의 변화가 한국 고대사, 특히 영토사를 이해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문헌에 '-성'이라는 기록이 나오면 아주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성'의 형태를 떠올리지만 과연 그게 옳은지 재고의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성'이라는 지명을 '-군' 또는 '-현'과 동의어라고 인식한다면, 그래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또한 58개 성을 점령할 때에는 700촌이 딸려 오지만, 8개의 성을 더 함락해 64개의 성이 되었을 때는 1,400촌으로 딸린 마을의 수가 무려 2배로 증가한다. 이는 각 '성'의 형태 및 관할범위가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불과 8개의 성만 추가됐는데도 700촌이 추가됐다는 것은 단순 계산만으로도 성 1개당 약 88개의 마을을 관할했다는 뜻이 되니 말이다. 잔국 내 성은 1개당 약 12개의 마을을 관할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만약 모든 성의 형태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산성'의 형태였다면, 과연 효율적으로 주변 지역에 대한 통치가 가능했을까? 라고 생각하는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고구려인이 생각하던 성.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후대인의 시각으로 접근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제는 이에 대해서 우리도 고민을 더 해보고, 한번 더 고민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p.s) 한반도 내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성은 4세기 이전까지 올라가는 것이 없다. 동시기 중국과 비교했을 때 성곽이 고대 국가 등장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그외 행정체제 및 관리의 존재를 알려주는 여러 근거들, 특정 국가의 범위를 알려줄 수 있는 토기 등과 함께)로 인식되는 지금 이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 고대 국가의 초현(初現) 시점과 밀접하게 맞물린다. 즉, 한국 고대 국가의 시작이 4세기부터이며, 이는 자연스럽게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하는 입장과도 연결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거기에서 고구려는 제외. 뚜렷한 성곽 관련 고고자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러한 고고학적 현상을 두고 4세기 초 고구려에 멸망한 낙랑군이 이전까지 한반도 중남부의 여러 정치체를 통일된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 하게 분할 통치 등으로 관리했기 때문이라고 보기까지 했다. (소위 大낙랑군 시기) 그렇기 때문에 풍납토성 기저부 조사에 따른 초축 시점에 민감하고, 경주 월성 기저부 층위의 연대를 두고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 4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후부터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성곽'이라는 것이 막 생겨났을까? 그 부분에 대한 고민까지도 이어지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성에 대한 인식을 올바르게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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