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관(史官)들이 『고려사』 지리지를 서술하면서 몹시 애를 먹었을 것이다.
우선 『고려사』가 편찬되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조선 태조가 1392년 10월 13일 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수찬하게 한 것이 처음이다.
고려 태조로로부터 마지막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총 37권의 『고려사』를 1395년(태조 4년)에 편찬하였는데, 통칭 '고려국사'라고 부르나 현전(現傳)하지 않는다.
1414년(태종 14년)에 '고려국사' 중 공민왕 이후 말기의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치기 위하여 하윤 등으로 하여금 개수하도록 하였으나, 하윤이 1416년(태종 16년)에 죽어 개수작업이 중단되었다.
1419년(세종 1년)에 류관, 변계량에게 다시 개수 작업을 계속하도록 하였고, 1423년(세종 5년)에 류관, 윤회에게 다시 개수하게 하였는데, 주로 호칭과 정도전이 지닌 편향된 시각의 왜곡을 수정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정몽주를 깎아내린 것을 다시 충신으로 평하여 기록하였다고 한다.
1424년(세종 6년)에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다시 올렸으나, 신개, 권제 등이 찬술하였고, 이계전, 어효첨에게 교정하도록 하였으며, 1449년(세종 31년)에는 춘추관에 전지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때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등에게 이 일에 대한 감독을 맡기었으나, 실제 작업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석형, 김예몽, 하위지, 양성, 유성원, 이효장, 이문형 등 당대의 최고 문관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1451년(문종 1년)에 새로 『고려사』를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후 김종서가 1452년(문종 2년)에 『고려사』를 요약하여 『고려사절요』 35권을 만들었고, 1454년(단종 2년)에 『고려사』 간행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고려사』 지 39권 중에 지리 부분이 3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즉,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의 강역을 아래와 같이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를 비롯하여 5도(道)와 북계(北界), 동계(東界)로 구분하여 소속하는 각 지명들의 연혁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
동계(東界),
북계(北界)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 따르면, 태조 23년(940년)에 여러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성종(成宗, 981~997년)이 또 주·부·군·현 및 관(關)·역(驛)·강(江)·포(浦)의 명칭을 고쳤으며,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만들고, 12주(州)에 각각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고 한다.
그 당시 10도는 첫째는 관내(關內), 둘째는 중원(中原), 셋째는 하남(河南), 넷째는 강남(江南), 다섯째는 영남(嶺南), 여섯째는 영동(嶺東), 일곱째는 산남(山南), 여덟째는 해양(海陽), 아홉째는 삭방(朔方), 열 번째는 패서(浿西)이었다고 하며, 관할하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였다고 한다.
또 현종(顯宗, 1009~1031년) 이후로 5도(五道)·양계(兩界)를 정하니, 양광(楊廣)·경상(慶尙)·전라(全羅)·교주(交州)·서해(西海)·동계(東界)·북계(北界) 등이었으며, 모두 합하여 경(京)이 4개, 목(牧)이 8개, 부(府)가 15개, 군(郡)이 129개, 현(縣)이 335개, 진(鎭)이 29개이었다고 한다.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는데, 무릇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섰다고 한다."
따라서 『고려사』 지리지는 현종(顯宗, 1009~1031년) 당시를 기준으로 서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댓글 서경부가 고구려 요동성,
송악(松嶽)이 신라 말 천주(泉州)..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요?
고려사에 따르면, 왕이 서경에 행차하는데 요성에 간다고 기록되어 있고, 서희장군이 말하기를 고려는 고구려를 이었는데 고려 도읍지가 평양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견훤을 공격하다가 강주를 점령했는데, 느닷없이 천주절도사 왕봉규가 나타납니다.
그 때의 천주가 나당전쟁시 675년에 신라가 당을 무찌른 지명으로서 현 하남성 안양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합니다.
조선 이전의 우리 역사 광역을 하루 빨리 찾아야 합니다,이성개가 고려를 말아 먹고, 명나라 주원장에게 쫒기어 온곳이 정말 현재 서울이라고 하는 이곳이 그 한양인지도 궁금합니다,그리고 개성부라는 곳이 현재의 개성 만월대인지도
앞뒤가 안 맞아 이해가 어렵군요, 하루속히 우리 역사의 영역을 강단 사학계는 이병도가 물려준 말도 안되는 주장을 속히 버리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역사학자로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되 찾길 바랍니다, 당신들 자식에게도 떳떳활 모습의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국록을 먹으려 역사 공부하였으면 그 값어치를 해야지요 ^!^
올소
민족의 역사 강역을 찾아서 후손에게 전하여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