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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辛相龜
▲ 최재형 선생 ▲ 부인 최엘레나 여사
최재형(1860-1920) 선생은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연해주 한인 공동체에 바쳤다. 내륙의 한인들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한인들이 그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1909년 최재형은 주 2회 발행하는 <대동공보>를 인수해 운영했다. <대동공보>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투옥됐던 장지연이었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의 권총은 최재형이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었다.
낯선 땅 시베리아에서 이렇듯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한 최재형이 그동안 묻혀 있었던 것은 최재형의 국적이 러시아였기 때문에 러시아와 수교를 하기 전에는 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우리나라가 러시아와 수교를 한 후부터 최재형에 대한 기록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러시아의 극동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대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피해 두만강을 건넌 애국지사들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이다. 지리적으로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들과 독립투사들이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한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의병들과 독립투사들의 뒤에 최재형이라는 대부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1962년에야 최재형 선생의 영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세기 말 연해주 한인 마을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여행기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약하고 의심 많으며 위축된 특징이 이곳에서는 솔직함과 독립심을 가진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비숍이 여행했던 1890년 중후반은 러시아 귀화인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 도헌(읍장)으로 있을 때였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 구사했던 최재형의 성실성과 능력을 높이 산 러시아인들은 그에게 통역, 도로 및 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의 군납을 맡겼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도올 김용옥이 ‘동양의 카네기’에 비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네기처럼 돈벌이에 중독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저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쳤다. 내륙의 한인들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으로 추천했고, 연추 읍민들은 쌍수로 환영했다. 한인들이 그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런 최재형에겐 천형과도 같은 낙인이 있었다. 그의 아비는 함경북도 경흥 송 진사 댁 노비였고, 어미는 빚에 팔려 간 기생이었다. 러시아로 귀화했지만, 조선 양반들에게 그의 가족은 여전히 종놈의 집안이었고, 그는 노비였다. 그는 9살 되던 1869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할아버지, 형 부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 지신허에 정착했다.
지신허엔 착취와 억압은 없었다. 그러나 헐벗고 굶주림은 여전했다. 최재형은 러시아 최초의 한인학생으로 학교에 다니다가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열한 살 때 무작정 가출을 했다.항구도시 포시예트 부둣가에 쓰러져 있던 그는 천우신조로 무역선 빅토리아호 선장 부부의 눈에 띄었다. 이들의 배려로 최재형은 무역선에 올라 7년 동안 포시예트에서 일본, 중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 탄자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를 거쳐 네바강을 거슬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두 차례 왕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선장으로부터 비즈니스를 배우고, 선장 부인으로부터 러시아어와 문학 역사를 배웠다.
11세 때부터 17세까지 6년간의 항해를 마친 최재형은 유창한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선장 부부가 무역을 청산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면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르스키 무역상사에서 3년간 근무했다. 최재형은 극동에 주둔하는 러시아 군대에서 통사로 채용되었다. 후에 다시 시베리아에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는 한인 책임자로 발탁되었다. 최재형은 도로공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러시아로부터 여러 번 훈장을 받았다.
1881년 가족을 찾아 연추로 갔다. 한인들은 여전히 궁핍했다. 그는 기회가 보장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지 않았다. 연추에 남아, 한인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벌고, 함께 마을을 가꾸고,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 도헌이 되기 전 니콜라옙스코예소학교를 사재로 지었고, 도헌이 된 이후 한인마을마다 32개의 소학교를 세웠다. 도헌 월급은 모두 장학금으로 출연했다. 1899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다. 북경의 외국 공관들까지 공격당하자, 러시아는 이를 핑계로 만주에 20만 대군을 진주시켰다. 최재형의 군납사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 무렵 간도관찰사 이범윤이 찾아왔다. 그는 최재형을 보자마자 자신이 왕실의 일족임을 내세우며, 고종이 내린 마패를 꺼내 보였다. “이 마패를 지닌 사람은 황제 폐하를 대신한다는 걸 명심하시오. 당신도 나를 무조건 도와야 하오.” 고압적이었다. 최재형이 노비 출신인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조선은 양반의 나라였다. 그 조선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그 부패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양반들이었다. 그런 양반 가운데 한 사람이 러시아에선 개뼈다귀만도 못한 마패를 들고 위세를 떨고 있다. 돈 내놓으라고 호령한다. 최재형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두말 않고 자금을 건넸다. ‘간도의 호랑이’ 이범윤의 사포대는 그렇게 창설됐다. 그런 이범윤이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사포대와 함께 연추로 이주했다. 정부의 소환령을 거부하고 러시아 편에서 일본과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보살피고 지원하는 건 최재형의 몫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러시아의 허무한 패배로 끝났다.
이범윤 부대에는 양반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노비 출신 최재형’을 얕잡아 보았다. 툭하면 명령하듯 다그쳤다. 무기를 사와라, 의병을 모아라, 군자금을 모아라 지시만 하려 했다. 그들은 양반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초조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양반’도 있었다. 안중근 신채호 이상설 등은 특별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최재형은 1908년 5월 해외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총장 최재형)를 창립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만3천루블, 이위종의 부친(이범진 전 러시아 공사)이 전해온 1만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천루블을 기금으로, 6월 이범윤 총대장에 안중근을 참모중장으로 한 연추의병을 창설했다. 연추의병은 7월부터 국내의 홍범도 부대 등과 연합작전을 펼쳐 접경지역의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9월 안중근의 실수로 영산전투에서 대패했다.
연추의병이 해체되자 1909년 최재형은 주 2회 발행하는 <대동공보>를 인수해 운영했다. <대동공보>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투옥됐던 장지연이었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의 권총은 최재형이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었다. 각종 정보는 <대동공보> 편집장 이강이 제공했다. 당시 안중근의 신분은 <대동공보> 특파기자였다.
일제는 집요하게 ‘배후’를 캤다. 안중근은 한사코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며 총독은 김두성이라고 우겼다. 의병장 유인석이니, 고종이니 혹은 최재형이니 구구했지만 ‘김두성’을 앞세워 안중근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순국 후 최재형은 그의 가족을 보살폈다. 최재형은 또 <대동공보>에 400루블을 따로 보내, 안중근 순국에 관한 특별판을 제작하도록 했다.
조선의 병탄 뒤 연해주 상황은 바뀌었다. 러시아는 일제의 압력에 따라 항일 독립운동지사들을 혹심하게 탄압했다. 유인석 등이 추진하던 13도의군이 좌절됐으며, 지휘부 40여명이 체포돼 8명이 추방됐다. <대동공보>도 폐간됐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최재형이 아니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지사의 집결지였다. 최재형은 이들과 연해주 한인을 망라한 단체를 조직했다. 한인 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일자리를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하는 것을 표방한 권업회였다. 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 체제로 출범한 권업회는 1914년 강제로 해산당할 때 회원이 무려 8579명에 이르렀다.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은 신채호였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재형은 또 선택해야 했다. 그에겐 이념이 없었다. 조국만 있을 뿐! 어느 쪽이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인가? 혁명군인가 반혁명군인가. 일본은 반혁명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최재형은 환갑의 나이에 항일 빨치산 전선으로 나갔다. 큰아들은 이르쿠츠크 전선에서 전사했다. 둘째 아들은 연해주 빨치산 참모장으로 싸우고 있었다.
헤이그로 가기 위해 러시아에 온 이준과 이상설도 최재형의 집에서 머물다 떠난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최재형을 재무총장에 임명한다. 그러나 최재형은 수락하지 않고 오직 한인들의 페치카로 만족하며 독립군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일본군은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는 자국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에 군대를 증파하였다. 1920년 4월 4일부터 5일까지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신한촌을 기습했다. 신한촌은 한인들이 사는 마을로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일본군은 신한촌에 있는 한민학교와 한인가옥등 주요 건물을 불태우고 무고한 한인과 러시아 인 무려 5.000여 명이나 학살시켰다. 희생된 한인 300여명은 대부분 일제의 식민통치를 피해 러시아 땅으로 피신해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들이었다. 이 참혹한 학살을 일러 4월 참변이라 부르기도 하고 신한촌 참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4월4일 밤 최재형은 가족을 지키려 우수리스크 자택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누나들은 아버지에게 빨치산 부대로 도망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들은 더 살아야 한다.’ … 다음날 새벽 열린 창문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다섯째 딸 올가의 회상) 최재형은 왕바실재 산기슭에서 동지 김이직과 엄인섭 등과 함께 학살당했다.
4월참변으로 러시아 한인이주 독립운동가들에게 대부노릇을 했던 최재형 선생의 죽음은 러시아의 많은 한인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 주었다.
매년 4월5일이면 우수리스크의 ‘영원한 불꽃 추모광장’에서는 지방정부 주관으로 4월참변 추모제가 열린다. 왼쪽엔 한인 희생자, 오른쪽엔 러시아인 희생자의 위패가 놓이고, 중앙엔 최재형 초상화가 놓인다.
<참고문헌>
1. 문영숙, “시베리아 한인 독립운동의 별 최재형 선생을 기리며”, 서강대학교 학보, 2014.4월 둘째주,
2. 곽병찬, “연해주의 별, 최재형”, 한겨레신문, 2017.3.1일자. 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