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 있는 자의 즐거움(1부)
시1:1-6
복은 원어로 ‘아쉬레’라고 합니다. 행복, 지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즐거움은 어떤 즐거움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새해 덕담으로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은 정도일까요? 성경 본문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탕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 아버지를 둔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미리 상속 받아 집을 나갔습니다. 그 아들은 방탕한 생활 끝에 재산과 건강 모두를 다 잃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잘못을 묻지 않고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행복과 즐거움, 기쁨은 바로 이 탕자가 용서를 받았을 때 느끼는 그런 기쁨과 행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기쁨을 가진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난 기쁨, 잃었다가 다시 찾은 그 기쁨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께 모든 것을 용서를 받아 다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을 가진 사람이 복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참된 즐거움은 지옥 불의 절망 속에서 건짐을 받아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 행복감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 기쁨과 행복은 성령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복 있는 자의 즐거움 이라는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 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악인의 꾀를 원어로 ‘ 레샤임’ 이라고 합니다. 칼뱅은 악인의 꾀를 설명하기를 ‘아직 공공연하게 드러나지 아니한 사악한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악인의 꾀란 마음속으로 죄악을 꿈꾸고 생각하는 것, 그리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음속으로도 죄를 생각하지 않고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시편기자가 말한 대로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악인의 꾀를 좋아하십니까? 마음속으로 악인의 꾀를 좋아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을 향해 던지는 이 질문에 대부분 악인의 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입니다. 이는 천만 다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양심적으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양심적으로 악인의 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어도 양심적으로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적으로 악인의 꾀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일반적인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심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일반적인 율법으로 준 것입니다.
(고전 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양심은 나를 변호하고 나를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은 일반적인 율법으로서 남을 위해서 판단을 내리게 하고 남을 위해서 정의와 법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천명의 증인과 같고 또한 양심은 어떤 심판관보다 더 잔인하게 자신을 심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마비되지 않고 악인의 꾀에 따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여러분의 타고난 본성에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본성적으로 악인의 꾀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본성적으로 악인의 꾀를 싫어했습니까?
이 질문의 대답은 하나님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대답을 도와 드리기 위해서 악인의 꾀와 본성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성령의 감동되어 본성적으로 악인의 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타고나면서 악을 좋아하는 성품을 가졌습니다. 솔로몬이 인간의 본성을 말한 것을 들어 보고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잠 26:22)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악인의 꾀를 좋아하는 것이 공공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야곱이 별미를 좋아하듯 즐기는 품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자신의 약점과 허물에 대해서는 천금보다 더 입이 무거우면서도 남의 말을 좋아하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죄에 대하여 좀 더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잠 9:16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17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제가 어렸을 때는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라 먹는 것이 귀했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을 몰래 먹을 때 더 맛이 있고, 남의 것을 모르게 먹는 것이 더 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제 본능을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믿습니다.
물이 있는데 물과 도둑질한 죄가 더할 때 달다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고난 본성으로 악한 꾀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식욕이 단 음식을 찾는 것처럼, 우리의 본능은 악한 꾀를 달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적으로 죄를 싫어하지만 본능으로는 악인의 꾀를 좋아합니다. 우리의 본능 때문에 복이 있는 사람이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신사였고 멋있는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우리는 갑자기 죄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루에 3만 2천 가지 이상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 많은 생각 중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이 얼마나 될까요? 그 생각 중에 쓸 만한 생각이 얼마나 된다고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한대로 입에서 절재가 되지 않고 말로 표현을 한다고 하면 우리 사는 세상은 매우 혼잡해질 것입니다.
하루에 일어난 그 많은 생각들을 몇 가지로 정리 해봅시다. 그 수많은 생각 중에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사악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것을 삭이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생각들입니다.
우리의 머릿속으로 유익하지 못한 생각도 수없이 합니다. 그런 생각은 건전한 생각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도 역시 또 쓰레기통에 들어갈 생각들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생각은 얼마나 될까요? 이런 생각은 인간 스스로 가질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우리가 비록 거룩하지 못하지만 주님이 우리 마음에 계셔서 하루에 한 번이라도 성령의 감동된 생각을 하면서 그 모든 악한 꾀를 버리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할 때 그 악한 생각이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버리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율법을 기뻐하는 자는 율법주의자들로 화가 있지만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사죄함을 받아 감격함으로서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타락한 자의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멸망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통해 지옥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해 죽어주셨기에 그것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날마다 반복됨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여 져가는 기쁨, 성화가 되는 것의 즐거움을 가진 것을 복이 있는 자의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그 은혜를 누리는 자는 복음의 법을 손 떼가 다 닳도록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용서와 구원을 받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습니다.
(롬 8:6)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는 영의 생각으로 육신의 생각을 포기하여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복된 즐거움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둘째 :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죄인의 길이란 원어로는 ‘하타임’ 이라고 하는데 이는 ‘빗나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양심상 어떻게 죄인의 길을 따라가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들로서 죄인의 길에 선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이 죄인의 길을 좋아하고, 따라가지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타락한 본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어도 그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팔 다리가 없어진 장애인들이 신경이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겨울이면 시리고 가렵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타락한 본성은 그 흔적이 남아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윗 역시 그 흔적의 유혹에 넘어가 한 순간에 추락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를 ‘한시적 유기’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타고난 죄악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 길을 늘 그리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의 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 타락한 본성의 흔적에 얼마나 잘 따라는지 사람은 죄 앞에 순한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양은 성품이 순하여 앞에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고 거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도 죄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양처럼 죄에 저항하지 못하고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람들이 죄의 길을 따라가는데, 태어나면서도부터 곁길로 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죄를 짓는 데 잠시 잠간 방심하게 되면 순한 양처럼 따라 가버리는 것이 죄인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빗나가길 모태에서부터 빗나가는 것입니다.
(시 58: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이러하니 우리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죄인의 길은 넓고 편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죄악을 행하여 사는 길은 고속국도와 같습니다. 속도제한이 없는 독일 아우토반과 같은 것입니다. 한 번 들어서면 돌이키지 못하여 죄악의 길을 달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비유하기를 보행자와 말로 비교하였습니다.
(렘 12: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아무리 양심으로 아니라고 소리쳐도 그 악으로 달려가는 본성의 길은 막을 장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데 실수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죄를 범한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였습니다.
(렘 2: 23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24)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죄악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 본성이라는 것을 짐승의 본능에 비유하였습니다. 들 암나귀가 짝짓기가 될 때 그 성욕을 누가 절제를 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도 절제 시킬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한 번 죄의 길에 들어서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지옥의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지옥의 열기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길에서 서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 합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받아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죄악의 넓은 길에서 돌아서서 주님과 함께 좁은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좁은 길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복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로 갔습니다. 그들의 힘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로 간 것이 아닙니다. 이성(理性)을 가지고 광야 길을 간 것이 아닙니다. 보름이면 가는 길을 40년에 걸쳐 돌아간다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영적인 복된 즐거움에서 산 것입니다.
(신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죄악의 길에서 돌아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주님과 내가 십자가로 하나로 묶여 십자가의 길, 골고다의 길을 가는 자가 복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갈 수 없지만 주님과 함께 날마다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움을 누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로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오만한 자리라고 하는 말은 원어로 ‘레침 로 야사브’, 이는 조롱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오만한 자리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자리, 찬송하는 자리는 있어도 남을 비난하고 저주하는 자리는 없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을 돌이켜 보면 나도 모르게 오만한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번 그 자리에 빠져들게 되면 하나님처럼 되는 그 기분에서 돌아서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만한 자리란 하나님처럼 높은 자리에서 진리에 대하여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통해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탄식하지 못해보고 양심적으로 종교심으로 완전하고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 자리에서 판단하는 것으로서 오만한 자리입니다. 그 오만한 자리를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히스기아 왕 시절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보낸 랍사게 장군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고서 어찌 예루살렘을 치겠느냐’ 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을 회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치러 왔으니 어서 항복하라는 뜻입니다.
(왕하 18:25) (25)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 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는지라
유다 백성들이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니 랍사게 장군은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기를 ‘너희 믿는 하나님이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왕하 18:33) (33)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앗수르 왕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했습니다. 이를 들어 오만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오만한 자리에 앉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엄숙하게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타나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성전을 더럽힌 것을 청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불쾌하게 여기고 주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 악한 마음으로 주님을 없앨 계획을 세웠고, 결국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주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 있다고 여겨 주님을 비방하고 조롱하였을 때, 오만한 자리에 앉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을 구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하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원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주님을 원망한다고 하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오만한 자리에 앉아 주님을 비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의 흔적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 높은 자리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환경으로는 낮은 자리에서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높은 자리에서 주님을 비웃고 조롱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자는 복이 아니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한 강도는 주님과 함께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생으로서 가장 낮은 자리, 비참한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은 교만하여 주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주님을 비방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찌 복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도 교만한 마음으로 오만한 자리에 앉아 주님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복이 있는 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눅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그 낮은 자리에서 가장 영화로운 자리,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만한 자리에서 내려 앉아 주님과 함께 십자가 지는 자리에서 주님을 찾을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이 깊이 깨달아져 율법을 즐거워하는 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매듭을 짓는 말씀
(롬 7:21)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 말씀은 바울이 성화단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영의 생각은 지극히 피동적으로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는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났어도 스스로 육신의 생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점을 탄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살아 역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만이 우리의 속에 죄의 법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악인의 꾀를 포기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죄인의 넓은 길에서 돌아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로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능에 따라 올라간 하나님 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리로 내려앉아서 간구하기를, 주님의 나라에 갈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이스라엘 백성을 업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듯이 영생으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이런 자들이 천국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여야 합니다.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영적인 승리자만 영의 생각으로 따르는 법, 성령의 법 하나님의 율법의 즐거움이요 또한 영적으로 승리하는 성도만이 승리자로서 영적인 행복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