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의 거짓말
민중의 눈으로 다시 쓴 조선 역사
지배계급이 주체인 역사는 절반의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더 일찍 망했어야 했다
조선 지배계급의 위선과 탐욕, 반민중적 행보를 신랄하게 비판한 책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던 조선의 왕과 지배계급의 위선과 탐욕, 반민중적 행보를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역사 비평서. 당대 지배계급의 거짓과 위선을 드러내는 애민(愛民), 사림(士林), 사대(事大), 반정(反正), 민란(民亂)이라는 5개의 테마를 중심으로, 조선 500년사를 조선 민중의 입지와 눈높이에서 다르게 해석해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조선시대를 다룬 역사서들은 임금과 왕실, 그리고 양반 사대부들의 생각과 시선, 행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책이 대부분이다. 오랫동안 조선사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기초 사료들은 물론, 방대한 분량의 단행본과 학술논문을 섭렵하여 민중사관에 입각한 새롭고 전복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내내 잊지 않으려 한 믿음이 있습니다. 민중을 배제하고 나면 그 시대 역사는 절반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역사의 주체를 지배계급으로 국한한 역사는 절반의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 저는 대다수 역사 서적이 다분히 편향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해온 이 주제들을, 조선 민중의 입지와 눈높이에서 다르게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제1부 ‘애민(愛民)’에서는 입버릇처럼 조선 통치자들의 입에 오르내린 애민 사상의 허구와 실상을 들여다본다. 제2부 ‘사림(士林)’은 16세기 이후의 사대부들이 선비의 전형이라며 후손들을 오도한, 이른바 사림의 실체를 다룬다. 제3부 ‘사대(事大)’는 역대 임금과 사대부들이 그 불가피한 사정을 힘주어 변명했던 사대 관행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4부 ‘반정(反正)’에서는 당대의 역신들이 반정으로 포장했던 쿠데타와 왕위 찬탈의 전모에 대해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제5부 ‘민란(民亂)’에서는 500년 세월 동안 억압과 수탈에 시달린 민중의 항거를 민란으로 매도한 그 모든 거짓을 낱낱이 까발린다.
애민(愛民), “백성을 위하고 어여삐 여겼다”는 거짓말
유학을 숭상한 조선의 지배계급은 ‘다스리는 자라면 백성을 위한 길을 걸어야 하고, 민본을 정치 행위의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행적은 말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 백성은 자식같이 어여삐 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천한 아랫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어리석고 예절을 모르는 존재였으며, 영원히 가르치고 다스려야 하는 대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 양반 사대부의 권력 독점, 지방 수령의 권위적인 다스림, 백성을 수탈하는 조세 징수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구휼 장치인 환곡을 세입으로 변질시키고 병역 부담을 오로지 백성들 몫으로 떠넘겼다. 조선 지배계급의 머릿속에는 백성에게 되돌려주는 ‘복지’라는 개념은 그 맹아조차 찾을 수 없었고, 오로지 ‘수탈’뿐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사림(士林), “세속을 뛰어넘은 고결한 선비였다”는 거짓말
사림은 세속을 초월한 고결한 선비를 일컫는 말이지만, 조선 후기의 정계와 사상계를 좌지우지했던 보수 사림 세력이 꾸며낸 환상일 뿐이다. 사림의 상징적 인물이자 성현으로 대접받는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이황 같은 이들은 서울과 지방에 거대한 저택과 논밭 그리고 수많은 노비를 거느린 부자였다. 사림 사회의 주류는 이른바 보수 사림 사대부였다. 그들은 정치·경제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보수적인 현상 유지론자들이었고, 사상적으로는 주희 성리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성리학적 가르침을 따라 살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로울 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 사대부들에게서 일단 소인배라는 낙인이 찍히면, 같은 양반 사대부 신분일지라도 평생 집요한 공격과 조롱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했다. 특히 보수 사림의 정적인 경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사대(事大), “대국을 섬겨 나라를 지켰다”는 거짓말
조선의 임금과 양반 사대부들이 중국을 지극정성으로 사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약소국의 군신으로서 왕조와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과연 사실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주장의 진실은 조선 창업 초기, 즉 태종 즉위 당시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사대는 멀리 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어온 관행이며, 그것이 나라 안에 미치는 영향 또한 만만치 않게 컸다. 하지만 사대가 외교 관행을 넘어 군주의 정통성을 결정하고, 왕권을 좌우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조선왕조가 유일하다. 조선 땅에서 사대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임금 자리도 위협받을 수 있는 정치적 모험이었고, 정적들에게 반역을 시도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중국과의 관계가 외교의 전부나 다름없는 조선의 현실에서 대중국 외교정책은 곧 주종 관계를 의미했고, 독자적·자주적 외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지배계급은 국제 정세에 현명하고 냉철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한 상태에서 나라를 다스린 셈이다. 훗날 근대의 거센 파도 한복판을 표류하던 조선이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 앞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다가 주권을 상실했던 것도 이런 사대 관행이 빚은 결과다.
반정(反正), “바른 상태로 돌려놓았다”는 거짓말
조선 역사에서 두 차례 있었던, 이른바 반정은 과연 말 그대로 잘못된 상황을 바른 상태로 되돌린 의로운 행위였을까? 유교 사회의 혁명 혹은 역위(易位) 개념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두 번의 반정 모두가 역신들의 반란이었음이 명백하다. 연산군에게 반역한 무리가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더라도, 맹자와 주희 말에 따르면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는 반역에 지나지 않는다. 반역의 주역들이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 이역을 억지로 데려다 왕좌에 앉힌 것은 바로 이런 명분상의 약점을 덮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에게 반역한 무리 역시 마찬가지다. 반란 주체인 능양군 이종이 왕족인 건 맞지만, 어질고 현명한 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반역 이전에 광해군에게 충심으로 간언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광해군은 민생 구제를 외면한 폭군이 아니다. 역도들이 반란 명분으로 내건 광해군의 패륜이라는 것도 실은 날조되거나 과장된 것이고, 더구나 인조의 패륜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민란(民亂), “어리석은 백성이 소란을 일으켰다”는 거짓말
조선의 지배계급은 기본적으로 백성을 착취함으로써 왕조 체제와 통치 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려면 백성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이 꼭 필요했다. 백성들이 죽지 못해 들고일어나기라도 하면, 언제나 민란으로 규정해 무자비한 진압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나 조선 민중의 의식은 비록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성장했다. 평안도 민중항쟁을 시작으로 영원할 것만 같던 지배 질서에 균열을 내기까지, 조선 민중은 봉건 지배의 사슬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한편으로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려는 길고 고단한 여정을 묵묵히 걸어왔다. 특히 19세기에 벌어진 조선 민중의 싸움은 엄격하면서도 자발적인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며 진행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갑오년 농민전쟁과 그 시절의 집강소 농민 자치다. 이렇게 싹튼 조선 민중의 저항 정신과 민중 민주주의 구현의 자부심이 우리 가슴속 깊은 곳을 흐르다가 1919년에 이르러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정 선포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 지은이 소개
김학준
부산 출신으로 동인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한국가스공사를 비롯한 몇몇 직장에서 인사 업무를 맡아보았다. 평소 인간의 역사와 공동체의 미래에 관심이 많아서 꽤 긴 시간을 인문 서적 읽기와 자료 정리에 공을 들여왔다. 현재는 민중사관에 바탕을 둔 글쓰기와 노동을 병행하고 있다.
★ 본문 속으로
제가 이 글을 쓰는 내내 잊지 않으려 한 믿음이 있습니다. 민중을 배제하고 나면 그 시대 역사는 절반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역사의 주체를 지배계급으로 국한한 역사는 절반의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 저는 대다수 역사 서적이 다분히 편향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해온 이 주제들을, 조선 민중의 입지와 눈높이에서 다르게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6-7쪽)
조선 역사 전체를 대강 머릿속에 떠올려보더라도 지배계급의 백성 사랑은 얼른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진짜 사랑은 자기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조일전쟁과 조청전쟁이 터졌을 때, 백성을 버리고 가장 먼저 달아난 이들은 임금과 조정의 사대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후로도 느낀 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더니 결국 조청전쟁을 자초해 또다시 강토를 쑥밭으로 만들어 백성을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그러고도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외침을 두 차례나 겪고도 그들은 조금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언제나 놀고먹으며 땅을 늘렸고 자기 곳간 채우는 일에만 열심이었습니다. (19-20쪽)
생각해보면, 해방 이후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독재체제가 동시에 자리 잡은 것도, 체제 질서를 강조하고 신분 차별을 당연시한 성리학적 가치관이 이 땅에서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위선적이고 간교한 지배 이데올로기, 즉 지배계급의 거짓말이 만들어낸 결과는 그만큼 고약하고 질겨서 많은 희생과 시간을 바쳐서야 비로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