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자랑-봉산탈춤 1967년 남한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봉산탈춤은 7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과장은 4상좌춤, 제2과장은 8목중춤, 제3과장은 사당춤, 제4과장은 노장춤(제1경 노장춤,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 제5과장은 사자춤, 제6과장은 양반춤, 제7과장은 미얄춤으로 되어 있고, 채록본은 “송석하채록본(1946)․임석재채록본(1975)․이두현채록본(1966)․최상수채록본(1967)” 등이 있다. 남한의 봉산탈춤보존회의 자료에 따르면 봉산탈춤은 “원래 봉산구읍 경수대에서 연희되었으나 1915년경 군청 기타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기고 경의선도 개통하게 되어 이 놀이도 그후 사리원 경암산 아래에서 놀아왔다. 해방후 월남한 몇 분의 연희자들에 의해” 1958년 복원되었다. 한국전쟁 뒤 페허 속에서 북녘땅의 전통민속놀이를 재현한 것은 남한이었다. 남한에서 먼저 재현되었지만, 북한에서도 봉산탈춤은 다시 재현되었다. 북한에서 발간된 《우리 나라 민속무용》은 봉산탈춤 놀이가 “11과장으로 구성(61쪽)”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화보《조선》(주체90(2001)년 3호)에는 “12개 장면으로 구성된것이 많이 알려지고 있다.”고 했다. 이는 북한이 야외에서 연희되는 봉산탈춤놀이(《조선》, 35쪽, “봉산탈놀이”)가 무대에서 공연되는 “민속무용《봉산탈춤》”으로 탈바꿈하면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1958년 6월 25일에 발간된 《조선 민속 탈놀이 연구》(저자 김일출, 과학원출판사)는 ‘봉산탈놀이’의 대본이 세종류가 있다고 했다. ‘(1)봉산 탈 보존위원회 리 동벽의 대본 : 11과장. 일제 시대인 1940년대의 대본이지만 8.15 이후에 정리된 것. (2)리 장산의 대본 : 7과장 (3)박 성찬, 김수정의 대본 : 12과장’(151쪽)이다. 2009년 2월 22일자 <로동신문>에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자랑 - 봉산탈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 중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오늘 봉산탈춤은 애국애족의 최고화신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의 손길아래 선군시대의 요구와 인민들의 정서에 맞게 더욱 개화발전하고있다. 지난날 야외에서만 진행되던 봉산탈춤이 무대에 오르고 봉산탈춤의 원형에 기초하여 탈춤의 다양한 형상이 재창조되여 여러 극장들에서 공연되고있다.”는 것이다. 이건 민속예술의 진정한 계승 발전이 아니다. 처음 것을 완벽하게 만든 뒤에 ‘재창조’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원래의 대본과 상이한 민속놀이의 재현은 한반도 문화 발전에 역행하는 짓이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 함께 다음의 2009년 2월 22일자 <로동신문> 기사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자랑 - 봉산탈춤”을 읽어보기로 한다. ※주체98(2009)년 2월 22일 《로동신문》: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자랑 -봉산탈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민족성에는 민족자주정신과 민족문화전통이 체현되여있으며 그것은 나라와 민족의 귀중한 재부로, 사회주의건설의 중요한 밑천으로 된다.》 봉산탈춤은 황해북도 봉산지방에서 전해져오는 민속무용유산의 하나이다. 고려말엽부터 보급되여오는 봉산탈춤은 황해도일대에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고 그 주제사상과 예술적측면에 있어서도 진보적일뿐아니라 우수하고 인민적인것으로 하여 우리 나라의 탈춤을 대표하는것으로 되여왔다. 지난날 봉산탈춤은 년중 한번 추어졌는데 처음에는 음력 4월초에 춤판이 벌어지다가 점차 5월초에 많이 진행되였다. 봉산탈군들은 1년에 한번 하는 《탈춤행사》를 성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였다. 리조후반기 봉산탈군들은 탈춤을 공연하기 한달전에 봉산군에 있던 《백운암》이라는 절간에 가서 충분히 련습을 한 다음에야 관중들앞에서 공연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공연은 지금의 봉산군 구읍리에 있던 《경수대》앞에서 진행되였다. 《경수대》는 마루가 없는 단층집이였는데 그앞으로는 자그마한 개울이 흘렀다. 이 개울너머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있었는데 봉산탈춤놀이는 바로 여기에서 일정한 기간 진행되였다. 1910년 봉산읍이 사리원으로 옮겨간 후에는 《경암루》앞마당에서 진행되였다. 이때에는 반원형의 다락을 만들고 그안에 멍석을 펴고 탈춤을 추었다. 지난 시기에 진행된 봉산탈춤은 극성이 짙은 춤과 노래, 재담 등으로 구성되여있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봉산탈춤대본에는 7과장, 11과장, 12과장으로 구성된것이 있다. 이렇게 봉산탈춤대본이 여러 종류인것은 일반적으로 탈춤대본이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기때문에 전수자들의 개성적인 창작의도에 따라 내용과 형식이 부단히 변화되여왔기때문이다. 세가지 종류의 봉산탈춤대본가운데서 널리 알려진것은 사상좌춤, 팔목춤, 법고춤, 3인무, 로승, 신장사, 취발이, 사자탈놀이, 량반, 포도비장, 미알, 남극로인 등 12개 과장으로 구성된 탈춤대본이다. 봉산탈춤은 주로 춤으로만 구성된 부분과 일정한 극적인 이야기줄거리를 가진 부분으로 나뉜다. 봉산탈춤의 극적내용을 주제별로 갈라보면 크게 3개의 부분 즉 중을 풍자조소한것, 량반통치배들을 풍자비판한것,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여주는것으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무려 30여명이나 된다. 봉산탈춤의 매 과장들에서 추어지는 춤동작들과 재담들도 다채롭고 특색있었다. 특히 타령장단에 맞추어 한삼을 뿌리치거나 휘저으면서 추는 춤들은 약동적이며 활달한것으로 하여 관중들의 흥취를 돋구어주었다. 봉산탈군들은 매 역인물에 해당한 이채로운 차림새를 하고 공연에 나왔다. 탈군들이 쓰고나온 봉산탈은 그 제작방법과 모양에서 봉산고유의 특색을 가지고있는것이 적지 않았다. 봉산탈은 종이로 만든것이였는데 이러한 탈은 먼저 흙으로 모형을 빚고 그우에 종이를 여러겹으로 붙여 말린 다음 흙모형을 떼내고 종이우에 눈, 코, 입 등을 그리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봉산탈춤은 저녁에 우등불을 사방에 피우고 그것을 조명으로 하여 추었는데 탈군들은 춤이 끝나면 쓰고있던 탈을 모두 우등불에 던져 불태워버리고 이듬해에 다시 탈을 만들어 리용하였다. 때문에 제작자에 따라서 탈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하였으며 또 제작자가 같은 경우에도 그 모양이 약간씩 차이나게 되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봉산탈의 기본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봉산탈군들은 대를 물려오며 진행하는 탈제작을 대단히 신성한것으로 여기면서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에서 탈을 만들었다고 한다. 봉산탈춤의 반주는 피리, 저대, 장고, 북 등을 가지고 연주활동을 벌린 민간기악단인 삼현륙각(륙재비)이 맡아 수행하였다. 이렇게 수백년이라는 긴긴 세월 인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해져온 봉산탈춤은 19세기말~20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애국적인 봉산탈군들에 의하여 그 예술적형상이 더욱 세련되게 되였다. 봉산탈춤놀이는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통치속에서도 조선의 넋인양 자기 모습을 간직하고 널리 진행되였으며 봉산인민들은 탈춤판을 계기로 여러가지 반일모임을 벌리군 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끈질기고 악랄한 민족문화유산말살정책에 의하여 봉산탈춤은 사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일제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찾아주시고 우리 민족을 식민지노예의 멍에에서 해방시켜주신 다음에야 봉산탈춤은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비로소 재생의 봄을 맞이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건국사업의 바쁘신 속에서도 친히 봉산탈춤을 예술공연종목의 하나로 지정해주시고 공연이 성과적으로 진행되도록 보살펴주시였을뿐아니라 봉산탈춤을 계승발전시키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환히 밝혀주시였다. 그리고 봉산탈군들로 《봉산탈춤보존회》를 결성하여 봉산탈춤을 보존하도록 국가적인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오늘 봉산탈춤은 애국애족의 최고화신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의 손길아래 선군시대의 요구와 인민들의 정서에 맞게 더욱 개화발전하고있다. 지난날 야외에서만 진행되던 봉산탈춤이 무대에 오르고 봉산탈춤의 원형에 기초하여 탈춤의 다양한 형상이 재창조되여 여러 극장들에서 공연되고있다. 특히 봉산군과 사리원시를 비롯한 황해북도의 여러 지방들에서는 봉산탈춤이 다양하게 형상되여 인민들속에 널리 보급됨으로써 봉산탈춤이 련련히 이어지고있다. (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소 박사 류만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