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전투의 영웅 몽클라르 기억하세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한국전쟁의 끝은 아니었다.
수많은 전투와 위기가 남아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위인들과
이를 헤쳐나갔다. 1951년 지평리에도, 유엔군 북진의 발판을 만든
프랑스인 장군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면 육군 중령이라도 좋다.
계급을 낮춰도 좋으니 나를 한국으로 보내 달라."
김태형 주간조선 기자, 편집=이창훈
1950년 7월, 당시 프랑스 막스 르젠 국방차관에게 육군 중장이 던진 말이다.
이 말을 한 주인공은 프랑스의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1892~1964) 장군이다.
당시 중장이었던 그가 계급장까지 떼며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1950년 6월 25일,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남한을 기습공격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연합군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역시 유엔군의 파병이 결정되었지만 한국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알제리 등에서의 식민지 전쟁으로
병력 보충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프랑스는 1950년 7월 12명의 시찰단만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반기를 든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이다.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몽클라르 장군은 전국을 순회하며 모병(募兵)을 실시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13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모였다. 몽클라르 장군은 직접 이들을 이끌고
한국전쟁에 참전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막스 르젠 국방차관이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중장인 당신이 대대장을 맡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이에 몽클라르 장군은 중장 계급장을 떼고 중령의 신분을 자처했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한국을 돕는 일이라면 몽클라르 장군에게 강등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에 왔을 때 나이는 58세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중장에서 중령으로
지평리전투가 끝난 지도 6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몽클라르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사단법인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지평사모)이다.
지평사모는 지난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수림아트센터에서 ‘몽클라르 장군 추모 유품·사진전’을
무료로 개최한다. 지난 9월 20일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 118 수림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이젤 위에 고정된 몽클라르 장군의 사진들이 보였다.
몽클라르 장군의 빛나는 훈장과 군모 역시 프랑스에서 건너와 전시 중이었다.
흑백사진 속의 안경 낀 몽클라르 장군은 카리스마가 넘쳤다. 여러 사진 가운데 파병 직전 찍은
몽클라르 장군의 빛바랜 가족사진이 한눈에 들어왔다. 몽클라르 장군 옆에는 만삭의 부인과 아들이 있었다.
어린 아들과 딸을 임신한 부인을 두고 몽클라르는 6·25전쟁에 참전한 것이었다.
이 전시회가 개최될 수 있었던 건 지평사모의 김성수 대표(법무법인 아태)의 노력 덕분이다.
수림아트센터에서 만난 김성수 대표는 전시회를 개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당시 유럽에서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였다.
그런데 한국의 자유를 위해 계급장까지 떼어내고 온 사람이 몽클라르 장군이다.
비록 국적도 인종도 다르지만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이라고 생각한다.”
김성수(73) 대표가 지평사모를 결성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나와 판사를 거쳐 법무법인 아태 대표변호사로 있다.
사건을 맡을 때마다 늘어나는 송사(訟事)기록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다.
수소문 끝에 구한 장소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이었다. 공교롭게도 용문군은 지평리 부근이었고,
김 대표는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지평리를 자주 지나치게 됐다.
그때 지평리전투의 영웅 몽클라르 장군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김 대표의 설명이다.
“지금까지 이런 분을 몰랐다는 게 부끄러웠다. 오늘의 한국이 있었던 배경에는 몽클라르 장군 같은
외국 용사들의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대표는 2009년에 지평사모를 결성했다.
현재 회원 수는 100여명에 달한다. 전시회에 참여한 정희주 사진작가는
“몽클라르 장군이 승리로 이끈 지평리전투를 통해 청년들이 깨닫는 바가 컸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선을 방문한 맥아더 사령관(오른쪽)과 만나는 몽클라르 장군(왼쪽). /지평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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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지평리전투는 중요하다”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지평리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산악 전투이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내며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지평리까지 무너지면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몽클라르 장군이 이끈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을 강타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총탄이 완전 바닥나자 총검술로 중공군과 맞섰다. 결국 중공군은 프랑스군에 패퇴했다.
지평리전투에서 승기를 잡게 되자 사기가 높아진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재개할 수 있었다.
몽클라르 장군은 1951년 12월 지휘권을 인계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1964년 작고했다.
김성수 대표는 2010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앙 몽클라르 여사와 사위인 듀포 대령을 한국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그때 파비앙 여사는 당시 아버지가 지휘소로 사용하던 지평리 주조장을 직접 찾았다.
당시 파비앙 여사는 김성수 대표에게 “조국인 프랑스에서도 아버지의 삶은 잊혀져가고 있는데,
한국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해주다니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평리 전투 프랑스군 참전용사 추모비 앞에서 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느 몽클라르씨(왼쪽)가 남편 버나드 듀포씨와 함께 비문을 읽고 있다.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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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파비앙 여사는 아버지의 자서전을 책으로 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그 어떤 출판사도 출간을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성수 대표는 파비앙 여사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프랑스에서 출간이 어렵다면 한국에서 먼저 출간하는 건 어떻겠느냐.
내가 한국에서 몽클라르 장군의 자서전을 출간할 수 있도록 돕겠다.”
이렇게 2011년 탄생한 책이 바로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라는 제목의 몽클라르 자서전이다.
2년 뒤 이 자서전은 프랑스에서도 출간이 됐다. 파비앙 여사 역시 아버지처럼 한국에 대한 사랑이 크다.
지난해 그는 조선일보의 통일나눔펀드에 동참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한국의 통일을 본다면 ‘
신이 우리의 희생에 보답을 주시는구나’라며 매우 기뻐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김성수 대표는 몽클라르 장군을 알리는 일이라면 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김성수 대표는 “어린 학생들이 반드시 이 전시회를 봤으면 한다”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후손들이 오늘의 한국을 만든 분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일이 더 빛나는 한국이 될 것이다.
젊은 친구들이 몽클라르 장군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첫댓글 지평리에 가서 지평막걸리도 마시고 참배도 하고 그런 날을 막연히 기다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