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부모에게 말을 걸다
<가버나움>(나딘 라바키, 드라마, 15세, 2018)
1.
<가버나움>은 레바논 베이루트를 배경으로 난민들이 겪는 실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2019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아카데미에서 외국인 영화상을 수상했다. 그 밖의 많은 영화제에서도 수상의 행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영화의 작품성은 차치하고 무명의 아랍계 여성 감독이 전문 배우가 아닌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발굴한 현지인들과 함께 이런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가버나움>은 필자의 기억 속 영화를 소환하였는데 <아무도 모른다>와 <어둠의 아이들>이다. 전자는 일본에서 있었던 실화로 아파트에 유기된 아이들의 비참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었고, 후자 역시 실화에 근거한 영화로 태국에서 가난한 농부의 자녀들이 도시로 팔려 와서 마약 중개와 성매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심장을 적출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부모의 양육을 받지 못한 채 유기되어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야 하는 아이들의 상태는 쓰레기와 더는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과 아시아인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며 부자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는 참혹한 현실은 필자로 하여금 한동안 자성의 시간을 갖는 동시에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화로 폭로된 후 해당 국가와 사회는 충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조치를 단행하였다고 한다. 아이들은 아동보호기관으로 보내졌고, 아이들을 유기한 엄마는 처벌을 받았으며, 태국에서도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와 불법적인 장기매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내용으로만 보면 <가버나움>도 두 작품과 비슷한 이미지로 연상되는데, 가난 때문에 유기된 아이들이 겪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이야기의 얼개는 아이를 낳기만 했지 제대로 양육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부모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녀인 자인이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다는 내용이다. 자인은 가난하면서도 동생들을 돌보는 일에 큰 책임감을 보인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팔려간 여동생이 임신 상태를 감당하지 못해 심한 하혈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살인미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불행한 아이들이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부모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해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한다. 그리고 엄마의 태속에 있는 아이도 태어나면 자신과 같은 불행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한탄한다.
사실 부모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자녀를 낳고도 발각되면 집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 출생 신고조차 하지 못할 형편의 사람들이니 제대로 된 양육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 설탕물을 먹여 가까스로 생존하도록 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감독은 출생증명서가 없어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사람들의 처절한 실존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난민 신청도 할 수도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부각하면서 부모가 자식을 낳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양육의 책임이 있으며, 존재는 진정한 양육을 통해 보장받는다는 사실을 환기하였다. 또한 아동학대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는데, 비록 폭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양육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아동 학대의 하나임을 폭로하고 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의 말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영화를 통해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또 대답을 모색해야 하는 질문은 이렇다. 이런 부모 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자라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은 어떻게 끊어질 수 있을까? 난민의 현실과 가난한 자를 포함해서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적인 약자들의 실존 상황을 좀 더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2.
관점을 달리해서 이야기의 초점을 신앙양육에 맞추어보자. 유아세례와 관련한 문답에서 부모는 자녀에 대한 신앙적인 양육을 책임질 것을 서약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자녀를 낳은 후에 아이들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통해 세례를 받게 할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모든 부모는 자녀가 유아세례를 받도록 한다. 이것이 소위 모태신앙인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런데 만일 자녀가 유아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게 했지만 부모가 자녀의 신앙 성장을 염두에 두며 양육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영화 <가버나움>에 나오듯이 자녀가 이것에 불만을 품고 신앙성장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부모를 고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신앙 양육 때문에 부모에 대한 불만족을 표할 자녀가 얼마나 될지 의심이다. 경험에 비추어 추측하건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고 세상 안에 머물러 있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쾌락과 힘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도대체 이것에 대한 책임에서 부모는 자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 앞에서 부모는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3.
교회교육에서 부모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현실에서 먼저 이것 한 가지를 염두에 두면 좋겠다. 과거 구약시대에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녀들로 하여금 불을 통과하게 했다.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 행위가 비록 자녀들의 훈육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해도, 불이 헌신과 희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자녀를 우상에 바침으로 자신의 헌신을 입증하려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을 하나님은 매우 싫어하셨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을 엄히 명하셨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8:21)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우상으로 여기는 현대 그리스도인들, 특히 자녀를 둔 그리스도인 부모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진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성공을 위해 자녀들을 세상으로 내 모는 부모들이 떠올려진다.
기독교교육은 세상 교육과 달라야 하고 또 세상이 추구하는 목적과도 달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세상이 우상시하며 추구하는 성공을 위해 자녀들을 학원으로 또 세상으로 몰아붙이는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녀의 생명(신앙)을 희생하면서까지 인생에서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불신 부모의 경우는 예외로 하자. 그들은 자녀들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기독교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가정을 전제해놓고 생각한다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혹시 부모 자신이 뒤늦게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이들도 대학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어쩌면 자신도 학생 시절에 올바르게 신앙생활하지 않고 살았지만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또 그간 아무 탈 없이 잘 살아왔기 때문에 자녀들의 신앙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점에 따라 보는 건 아닌지. 혹시 학생시절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다른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도 못가고 좋은 직장에도 취직하지 못하고 결혼 생활도 그저 그런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닌지. 자녀의 성공을 부모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로 여기면서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기 위한 것은 아닌지 등.
한편으로는 그냥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로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마음이라 생각하고 간단히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간다면 악순환의 반복이나 더 악화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있다. 오늘날 부모들은 대체 어떤 이유로 자녀들로 불을 통과하게 하는지 궁금하다. 다시 말해서 아이의 신앙과 공부 사이에서 부모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한지를 두고 심각하게 갈등하든, 아니면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것을 선택하든, 부모의 결정과 관련해서 그 동기를 좀 더 자세히 따져보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교육에서 부모교육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