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주는 의인을 찾이 않으신다.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원하여
율법을 613가지로 나누어 지켜왔습니다.
그중에 안식일에 관한 율법은 39가지입니다.
안식일에는 바늘도 몸에 지니고 다니면 노동을 한 것이요.
허리 띠를 두 번 연속해서 졸라매도 노동이고,
안식일에 한 번에 다닐 수 있는 거리는 2,000규빗 이상 걷지 않고
그들은 안식일에 철저하게 지키는
정통보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복음으로
철저히 살려는 자들보다 더 정통보수 자들이 주님을 두고 불평하였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불평을 아시고 하신 말씀을
우리 같이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마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믿는 주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그들의 사정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불평에, 대답하실 때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듯이
주님은 죄인들에게 절대 필요 하시는 주님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주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깨닫도록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환자는 육체적 건강을 손상을 입고
그 질병을 고쳐야 건강하게 살 수 있으므로
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질병으로 대학병원에 가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병든 것처럼 느끼도록,
대학병원에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것을 보면,
환자들에게 의사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병든 자를 위해서 존재한 것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은
어린아이들까지도 다 아는 일입니다.
주께서 어린아이들도 알아듣기 쉬운 비유로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주님이 절대 필요하심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당뇨 치료에 권위자인
건국대학병원에 최수봉 교수는
그의 부모님이 서울의대를 나온 의사인데
그분도 부모님 따라 이어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의사로서 치료하는 중
젊은 여성이 당뇨병으로 자녀를 두고 죽은 것을 보고
너무나 충격받아 어떻게 하면 당뇨 환자를
효과적으로 치료를 할 것인가 고민한 끝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지혜를 구하여 개발한 것이
인슐린 펌프를 개발한 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 몸 췌장에서 인슐린이 자동으로 분비되어 건강을 유지하는데
췌장에서 인슐린이 적게 분비되거나
아예 인슐린이 분비되지 못하면 당뇨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췌장에서 인슐린이 적게 분비되면
약을 먹어 췌장을 자극하여
강제로 인슐린을 분비하게 하여 당을 조절하게 됩니다.
오래도록 혈당조절 하는 약을 먹어 췌장이 지속으로 자극하면
췌장의 기능도 떨어지고 면역이 생겨
더 많은 약을 먹게 되므로 몸에 부작용이 일어나
그 젊은 여성이 결국은 죽게 된 것을 보고
최수봉 교수가 젊은 엄마가 어린아이를 두고 이렇게 죽다니 라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최수봉 교수는 췌장에서 분비한 부족한 인슐린을
인위적인 방법인, 인슐린 펌프로
몸에 부족한 인슐린을 필요한 양만큼 투입하게 해서
인슐린이
음식물을 먹으면 혈관을 통하여 포도당을 옮기는 일을 하도록 하여
많은 환자의 건강을 찾게 한 사람입니다.
병원에서 당뇨로 인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환자들이
인슐린을 정상적으로 공급함으로 말미암아
면역력이 회복되어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 건강하게 회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주님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죄가 없이 의롭다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런 의인들은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주님도 죄인이라고 판단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죄인이라고 판단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과
주님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은
주께서 죄인들이라고 판단된 자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죄를 해결하려고 죄인들을 찾아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그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판단하기를 주님이 죄인들인 줄 모르고
죄인들과 친한 것인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면
그들이 죄지을 때는 잠잠히 계셨다가
죄를 범하고 난 후에 죄인을 구원하시러 오셨다는 것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면서
인간이 죄를 범할 때는 모르거나 잠잠히 계셨다가
죄를 짓고 난 후에야 죄인으로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우리 손으로 죄를 범할 때 손이 상하거나, 부러지고
눈이 죄를 범할 때 눈이 아파서 고통스럽게 해도
계속 죄를 범하면 눈동자가 빠지든지 앞이 보이지 않게 되거나,
말로 범죄 하면 말하는 혀가 빠져버리면
죄를 짓다 말고 두려워서 죄를 범하지 않게 되겠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제자 요한과 야고보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배척하여
분하여 주께 부탁하기를
이 성을 불을 내려치소서! 라고 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마음입니다.
(눅 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내가 잘못하면 매를 때려서라도 회개시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은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 것은 좋지만,
이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심성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이 잘못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드시 벌을 내려야 합니다.’라고 하는 기도하면
우리가 바리새인들을 지긋지긋하게 정죄하고 심판하면서도
곧바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왕 바리새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죄인들이 죄를 범할 때마다
주님은 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고난을 느끼며 기다리십니다.
죄인들이 죄를 범하고
더는 살 수 없다고 항복할 때까지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며 기다리신 것이
곧 긍휼과 인자심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들이 죄를 지을 때
방관하시는 것처럼 보이거나,
주무시고 모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께서 죄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다가,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거나 낙심할 때
주님은 그때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해 주시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시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범죄 하여도
모르신 것처럼 잠잠히 계신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머리카락도 다 헤아리시고
우리의 체질을 다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죄를 짓는 것을 보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며 기다리십니다.
(시 40:12)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주께서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마음을
한 아버지에게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찾아가
‘아버지! 내게 주실 분깃을 주소서!’라고 할 때
아버지는 아들의 요청대로 아버지는 소유를 아들에게 상속해 주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다 정리하여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께 물려받은 모든 소유는 다 탕진되자,
그 나라에 흉년으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탕자가 돈 떨어지자 흉년이 든 것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굶주린 탕자를 보고
‘들로 나가면 돼지 치는 곳에
돼지 먹이로 사용되는 쥐엄 열매를 구할 수 있다’ 해서
그것으로 생명을 부지하려고 들로 찾아갔었지만,
그것마저 구할 수 없어 굶어 죽게 될 처지가 되었습니다.
탕자는 죽게 되고 난 후에야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도 배부르게 먹는데
그 집의 아들로서 나는 주려 죽겠구나! 생각한 끝에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 자신의 잘못을 빌어야지 하고서 아버지께 돌아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가
‘내 아버지여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으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부터는 나는 아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라 하지 말고 나를 품꾼으로 써달라고 할 때’
아버지는 ‘내 아들아 너는 잃었다고 다시 찾았고
죽었다 다시 살아난 아들이라’라고 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목욕을 시켜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상속할 때부터
아들이 그 모든 것을 허비하고
그날로 죽었고 다시 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아들이었습니다.
죽을 인생이 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버려둔 것입니다.
인간이 가르쳐 주면 배우는 것이 있지만,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인생은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아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인생을 깨닫게 되어 아버지께 돌아간 것입니다.
그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아버지를 찾지 않는 것처럼
인생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처할 때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품어 주시고
회개시켜 구원하여 잔치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오리까?
찬송하며 하나님을 찾을 때
죄인을 찾으러 오신 주님은 우리를 품어 주시고
죄 용서하시고 영혼이 양약이 되는 생명의 양식을 주어
영생을 베풀어 주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