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개신교가 타락하게 된 근본 원인이 되는 제도적 장치로서 담임목사제도를 지적하고자 한다.
교인 수가 몇 백명 정도에 불과한 시절에는 담임목사라고 해야 세상에 영향을 끼칠 만한 힘도 없고 그런 교회의 목사가 하는 말에 대해서 세인들이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그냥 일부 소수의 무리들이 종교적인 활동의 일환으로 그들끼리의 목소리를 내는가 보다 하고 지나쳐 버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시스템이 대도시화 되고 그에 따라 대형 교회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터 담임목사라고 하는 직책이 가지는 의미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바티칸 같이 교황을 머리로 하여 모든 교회를 중앙집권 체제로 운영하는 카톨릭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크게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 체제에 속한 회원의 수가 엄청나고, 그에 따른 재정이 막대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모든 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이 중심이 되어 구축된 체제는 세속화 된 집단으로서 인간적인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이 생길 수 있다.
개신교는 개교회 중심이어서 카톨릭에 비해 그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힘든 측면이 있었다. 한 데 뭉쳐야 하는데 날이 갈수록 새로운 교단이 만들어지고 분열되면서 개신교회는 힘을 잃게 되었다. 교단이란 체제 자체도 중앙집권적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체제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에 개신교회는 카톨릭에 비해 지리멸렬한 존재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필자의 논지는 개신교가 카톨릭 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를 펴려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개신교가 세상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오히려 세상 일에 무관심한 것이 카톨릭보다 나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땅위의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의 모형이고 그림자로서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왕국을 바로 세우고 바른 모습을 그려내는 일이 교회에게 주어진 올바른 사명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오늘날 개신교회가 예외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담임목사제도가 아론의 금송아지 이고 우상이며, 이 제도가 개신교회를 썩어 들어가게 만드는 근본 원인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출애굽 사건에(출 20:18~19) 비추어 볼 때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줄 사람을 세우고 그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사람도 없지만 직접 말씀하시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출 20:18~19
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현 시대에도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대부분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으며, 능력도 없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감당할 수도 없다. 그래서 다른 어떤 대언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바란다. 그러한 대언자의 역할로 목사라는 직분이 세워졌는데 이러한 개신교회의 목사제도가 오늘날에는 크게 변질되어 "금송아지"로 둔갑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의 음성을 직접 듣고 그 내용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충실한 대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때 대언자의 역할은 엄청난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충실한 대언자가 오래 동안 보이지 않게 되면 (출 32:1) 백성(교인)은 대언자를 기다리게 되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신을 세우게 된다. (출 32:1)에서 백성은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한다.
출 32:1~4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 구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모세는 이미 그들을 인도하는 신의 위치에 놓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개신교회에서도 목사가 하나님의 음성을 충실히 대언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면 교인들은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대신하여 "자기들을 인도할 다른 신"을 내세우게 된다. 오늘날 개신교회는 그러한 "다른 신"의 자리를 보통 "담임목사"라는 사람이 꿰어차고 앉아 있다.
목사가 모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충실하게 교인들에게 전달한다면 교인들은 그나마 하나님의 뜻을 바로 듣고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목사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자가 교인들을 이끌고 간다는 것은 바로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과 같이 목사가 금송아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을 강단에서 읊조리고 있을 때 그런 목사는 금송아지 행세를 하게 되고 그를 따르는 교인들은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그런 일이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이미 금송아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개신교회가 바로 서고 제자리를 찾으려면 담임목사 제도를 말끔히 걷어 치우고 여러 목사가 돌아가면서 설교하는 공동목회나 임기제를 도입해야 한다. 담임목사가 교회에서 주인행세하는 교회는 아무리 잘 해도 썩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대통령 단임제를 도입했듯이 중대형 교회에서는 목사의 임기를 4년 단임제로 하고, 절대 중임을 허용하지 않는 것도 한 방편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회의 타락의 근본 원인을 알았다면 그 해결책을 찾아 나서기에 망설임이 있을 수 없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담임복사 제도보다는 팀 목회 제도가 바람직하다.
오늘날 한 그리스도인을 양육하려면 최소한 30-50명 이상의 전문 사역자가 필요하다.
개교회주의가 아주 큰 문제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결국은 목회자의 권력욕구에서 비롯한다.
교회는 주인이 그리스도이시다. 통치자도 그리스도이시다.
교회의 정치는 감독 교황 장로 회중 그 누구 중심도 아니다.
정형화된 제도로 교회가 움직이면 그리스도의 직접 통치를 대적하는 교회가 된다.
개교회주의를 방지하고 한 교회를 특정 목사나 장로 세력을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것을 방지하고
주님이 직접 통치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팀 목회 공동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0-50 명 정도의 전문 사역자를 갖춘 그룹이 형성되어
교회를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사역하고
서로 같이 연구하고 같이 의논하여 교회를 경영해 나가야 한다.
단순히 전문 사역자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경영한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의 통치를 모든 성도들이 함께 읽고 순종하는 일에 전문 사역자들은 섬기는 사역을 해야 한다.
교황제 감독제 장로제 회중제 만장일치제 그 너느 것도 정답이 아니다.
교회 하나님 나라는 역동적이고 유기적이다.
변화가 있어야 한다.
고정된 교단과 교회법 정형화된 체제가 왜 문제가 되는가?
살아계셔서 통치하시는 주님을 정형화 된 틀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신학 제도 교회법 교리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시대의 산물이다
성경과 하나님은 그 위에 있다.
신학은 영감된 성경이 아니다. 비판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사람의 주관이 개입하는 신조 신앙고백 교리가 늘 비판 점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전통 정통이 되어 올무가 되어 왔다.
그것이 성경에 의해 늘 비판 점검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잘 안된다.
그래서 좋은 취지로 만든 것이 우상이 된다.
그 상황에서 필요햇던 것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혁이 제대로 된 적은 없다.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하다.
어떤 신학자 유명한 지도자도 오류와 한계가 있다.
교회의 설교나 가르침도 항상 비판 점검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오늘의 필요한 것이 내일에는 변화되어야 한다.
늘 사람도 자라야 하고 상황도 변한다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교회가 되려면 성장에 맞게 변해야 한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교회는 늘 점검해야 한다.
교회가 공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성경의 하나님만 아니라 그 분이 역사를 통해서 오늘에 어떻게 통치하고 계시는지 연구해야 한다
오늘의 하늘정부의 통치를 공적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교회가 움직여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가?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교회가 죽은 하나님을 섬긴다.
예수님은 과거의 역사적인 에수 뿐이다.
오늘날 21세기 4차 산업혁명 수도 서울에서 통치하시는 그 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실제로 살아계신 분과 동행하기 위해 성경도 역사도 현실도 알아야 한다.
신앙의 실제이다. 영적 전투도 실전이다.
교회가 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무시한다.
그리고 제대로 알려고도 않고 마음대로 결정해버린다.
하나님 나라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허수아비 꼭두각시가 되어 버렸다.
유대교 구교와 마찬가지로 개신교도 예수님을 허수아비
에수님이 입으로는 주님이고 왕이시다
그러나 교회 공적인 제도로는 부정한다.
교회법, 교회제도 행정 정치과정 등 모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곳에서 에수님은 들러리이다.
교회가 성도들이 예수님을 바보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예수님을 실제로 우리의 머리 왕으로 인정하는 교회생활이 아니다.
실제로 삶에서 통치하시는 분
그 살아계신 주님의 하늘정부와 소통하고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교회가 공적은 물론 사적으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에게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실제로 현실 속에서 통치하는 분은 관심이 없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실 속에 도래했다.
아직 완전한 도래는 아니지만 성령을 통해 통치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역사 속에서 진행된다.
우리의 삶은 거기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
신학교 교단 목회자들 무수한 사람들 겪어보았지만
오늘날 실천적인 무신론자 투성이이다.
신학적으로는 분명히 고백한다.
그런데 실제로 삶으로 제도와 행정을 보니까
살아계신 주님은 허수아비이다.
한 마디로 이용당한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종교생활 종교사업한다.
그 중심에 담임목사 제도가 있다.
목사나 장로 회중 그 누구도 교회 중심이 아니다.
교회는 실제로 주님이 통치해야 한다.
그런 교회를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절막한 실천적 무신론
그 중심에 담임목사 제도가 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
교회가 없다는 책도 나온다.
교회가 이런 상황이 되니까
이런 교회 상황을 비판하고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는 자들까지 생긴다.
그야말로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을 모곡하고 능욕한다
바로 내가 현실 속에서 통치하시는 주님을 모른다.
관심도 없고 연구를 안 한다.
그것을 가르쳐주어야 할 목회자들이 두루뭉실 멋대로 가르쳐도
성도들을 가지고 장난질 치고 사기를 쳐도 항의하는 사람도 없다.
신학과 성경계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수십년 교화를 다녀도 관심이 없다.
이 세상 학문의 영향을 반은 혼합화된 지성으로 형성된 신학이 기독교 타락의 주범이다
그 신학과 성경적 지성이 아닌 혼합주의 지성으로 된 종교화된 기독
그 종교화된 기독교가 판을 처도
성경과 신학과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속이고 장난질 해도 분노하는 사람들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서양철학에서는 학문 과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전개되어 왔다.
내부고발 내부연구 자체검증에 의해서 그 허위성이 폭로되었다.
그런데 이교사상을 도입한 신학의 명목으로 성경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농락하고
자기들 멋대로 지배하는 신학자 목회자들이 어려운 철학 신학으로 장난질쳐도
누구 하나 제대로 이를 지적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가나안 성도가 는다는 말이 곰감이 된다.
사실 일주일을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주일을 예배를 잘 드리려면 일주일을 질 살아야 한다.
일주일을 주님과 동행 동역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맞추어 사는 삶
21세기 오늘 하나님 나라의 진행이 감이 잡히는가?
주님과 동행이 가능한가?
수십년 교회 열심히 다니고 부지런하 공부했어도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이 지구촌 사회에서 주님의 경륜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
성경을 연구하는 일도 정말로 쉽지가 않다.
히브리어 헬라어 연구하려고 하신 적 있나요?
실제로 연구해 보면서 문법책 교제들 주석들 보면서 문제가 뭐지요?
말씀 말씀 하면서 실제로는 신학자들마저도 장난하고 조롱하고 있는것
정말 말씀을 갈망하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추상화 객관화 논리화 개념화된 신
조긱 신학의 이 신론이 살아계신 주님
성경의 자기계시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주님을 얼마나 농락하는지
살도 피도 언약적 맥락도 성정성 서사성 심미성 역동성 등 다 제거해버리고
어렵고 철학적인 개념화된 신지식으로 얼마나 살아계신 주님을 모독하는지
성경은 성경의 언어도 그 분을 감당못해서 상징 비유 모형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부분적으로 주님을 계시한다고 고백을 하는데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렇게 난도질하면서 권력자로 행세해왔던 현실
지금도 버젓이 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고 군림하고 있다.
그 신학과 교리와 제도가 살아계신 주님을 농락하고
성경을 위하는 말을 하면서 랍비들처럼 성경 위에 서서 농락한다.
한마디로 기독교 세계관 논의 중 혼합주의를 이야기하면서도
비열한 논객들은 혼합주의 말을 꺼냈으면서도
무서워서 신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한다.
개혁주의 복음주의 정통신학이 이 세상 철학 학문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혼핮주의 신학이다.
혼합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혼합하면 게시가 공격을 당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말하면서 철학이 신학을 가지고 계시를 농락해 왔다.
그 신학으로 만든 교리 제도 법이 성경 살아계신 하나님 위에 있다.
결국 신학자 목회자들이 만든 정형화된 제도 법 행정이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만든다.
교회를 실천적인 무신론의 장으로 만들었다
교회를 종교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 성경이 이렇게 신학과 교회 제도
신학자 목회자들에 농락을 당하고 있다
진보신학만이 아니다.
복음주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이 자신을 비판 안한다.
아직도 신학은 성역이다.
개혁주의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죽어도 개혁신학은 비판 안한다
그것이 실제적으로 누구를 모독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를 지배하는 것뿐 아니라 에수님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을 공적으로 제도적으로 바보로 만들어버린 현실 제도이다.
이래도 가만히 있는 것은 나도 바보이고
나도 그들에게 동조하고 있는 것이 된다.
나도 그 편이다.
칼빈 루터 웨슬리 등 무수한 신학자 목회자들이 우상이 되었다.
그들을 비판하면 신앙이 없는가?
어거스틴이 순수하게 성경적인가? 그에게 헬라철학이 영행을 주고 있음은 천하가 인정한다.
루터 칼빈 웨슬리? 개혁자들도 인문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의 신학이 성경적인 사고방식과 방법을 따라서 전개되는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고, 하나님의 주권을 외쳤지만
그들의 신학은 성경적이지 못했고 혼합주의를 멋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실천적인 교회제도와 목회는 하나님의 주권을 절저히 무시한 정형화된 틀이다.
이것이 과연 제대로 비판이 되고 시정이 되었는가?
전통을 맹신한 가톨릭을 비난한 개신교가 정작 이런 잘못된 전통
계숭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그대로 맹신하고 있다.
종교개혁신학 그리고 그 이후의 신학도 얼마든지 비판되어야 한다.
성경을 떠나서 진보신학처럼 이 세상 철학으로 비판하면 그것은 안 된다.
그러나 서구신학이 역동적이고 유기적이고 언약적이고 일상적인 성경의 계시를 정태적인 학문
철학의 쳬게로 연구하면서 얼마나 성경에서 빗나갔는가?
진보신학은 그렇게 맹렬히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비 성경적인 이런 혼합주의는 비판 안한다.
성역화하면서 결국 유대교 구교나 다를 바가 없다.
그 증상들이 오늘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토착화 신학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
아니다.
참으로 성경계시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계시를 인간의 철학 학문으로 풀면 안 된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고 하면서 신학을 해석의 요소로 집어 넣었다.
신학에 이 세상 철학이 들어가 있다.
성경적인 것인양 말하지만 우리 누구에게도 이 세상 학문 철학 사상이 깊숙히 들어 있다.
그래서 공적으로 항상 비판 점검해서 바로잡아야 한다.
신학교가 이런 일을 하는가?
교회에서 이런 일을 하는가?
정말 교회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는가?
정말 교회가 성경계시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신학이 성경계시를 이토록 무시하고 농락해도 그것이 왜 그런지
과연 보수주의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이런 문제 제대로 문제삼고
하나님을 그토록농락하고 무시하고
실제로는 안 믿고 제도적으로 거역하는
이런 문제 가지고 씨름을 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에배하고 활동해도
개혁은 안 된다.
하나님을 허수아비 바보로 제도적으로 농락하고 있는 마당에서
가나안 성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환경
당신은 어떻게 느끼는가?
실제로 살아계신 주님이 중심이 되고 있는가?
과연 21세기 하나님 나라 진행에 맞춰 교회생활하고 있는가?
교회 일의 영순위가 이런 하나님의 통치를 알고 순종하는 일인가?
아니면 선교 교회성장 봉사 등이 살아계신 주님이 농랃당하는 것보다 중요한가?
정말 실제로 예수님이 머리 주인 통치자가 맞는가?
우리는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
인간의 전적타락 전적인 무능력을 빋으면
자신의 신학도 비판해야 한다고 내놓아야 옳다.
종교개혁 신학은 가톨릭을 철지히 비판했다.
그런데 정작 그들 자신이 과연 성경적인지 자신들의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 안 했다.
후진들이 자신들의 오류를 수정하도록 길을 열어 놓는 겸손이 없었다.
그래서 종교개혁 신학도 오만하고 교만하다.
루터 칼빈이 자신을 철저히 비판하고 바로잡도록 길을 열어 놓았어야 한다.
정말 그들의 신학이 옳은 것이라면 바로 이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 교회제도 교회 법들을 우상화 할 여지를 남겼다.
정작 자신을 몰랐다.
진정으로 성경적이라면
내 신학 내 주장 완전하지 않음을 고백해야 한다.
비판하고 성찰해서 바로잡도록 열어 놓아야 한다.
주님이 주권적이니까 교회를 세워나가신다.
내 신학 내 깨달음을 너무 내세우면 오만방자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현재는 물론 후대까지 강제하는 전통 우상을 만들어 놓으면 안 된다.
어그스틴 루터 칼빈 웨슬리 등 무수한 사람들의 신학 사상 속에 이 독소가 있다.
정작 자신의 신학과 주장이 가진 죄성은 보지 못한 것
그것이 얼마나 교회에 해악을 가져왔는가?
하나님 앞에 목이 독은 것 그것이 문제이다.
복음주의 개혁주의 보수주의 문제가 무엇인가?
말로는 하나님 성경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아니다.
하나님 주권을 주장하면
목이 곧은 신학 제도 교회 법 이런 것들을 상대화시켜야 한다.
목이 곧으면 안 된다.
정형화된 틀이 무섭다.
성경은 살아계신 주님을 내세운다.
그런데 정형화된 신학은 사람이 만든 신학 제도 법 행정으로 하나님마저 지배한다.
그 법에 주님을 가둔다.
이것이 반역이다.
그래서 교회의 제도나 법이나 행정은 목이 곧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
주님의 행보에 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도 살아계신 주님 앞에 머리 숙이고 복종하는 것인데
사람이 만든 것 영감되지도 않은 것들이 지배하려고 든다.
왜 어렵게 어렵게 자기 돈으로 교회개척을 하려고 하는가?
결국 교권이다.
오늘날 신학교에 왜 사람들이 몰려드는가?
정말 성경과 하나님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다.
결국은 고난이 아니라 교권이다.
영생은 삼위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몸이고 하나님의 상속자들이다.
그들의 신분이 엄청나다.
그들을 올바로 가르치고 훈육해서 하나님 나라 전사 일꾼으로 세우는 일
이 사역을 혼자서 결정하고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 지구촌 시대는 진정한 교회라면 민족 국가를 초월해서
지구촌 교회들이 명실상부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선교는 가서 돈으로 도와만 주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된다.
내 교회 네 교회가 아닌 한 가족 가정이 되어야 하는데
다른 나라 교회와도 가족이다
한 교회 안에서도 너는 너 나는 나이다.
교회 직분이 게급이다.
목사도 담임 목사가 보스이다. 두목이다.
문제가 목회자들에게만 잇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마찬가지이다.
형제 지체는 다른 나이다.
이 예수님들을 예수님의 몸들을 어떻게 우리는 생각하고 있는가?
사실 하나님 나라도 교회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도
날마다 배우고 가르치면서도 실상은 모른다.
너는 너 나는 나 우리 목사님 장로님은 두목님?
이것이 빗나가면 아예 권위고 무엇이고 다 무시해버린다.
요즈음 이 신세대들은 정당한 질서와 권위도 깡그리 무시해버린다.
교회도 정당한 것마저도 그렇게 될 날이 금방 온다.
담임 목사제도의 문제점
거기에 성직자주의 교권주의 제도주의 형식주의가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 해 주는 신학이 주동자이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내는 신학자들과 신학자들 그룹이 존재한다.
그들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 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국 교부들이 혼랍주의 신학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갔다.
종교개혁이 구교를 비판하고 벗어나려면 이 교부까지 벗어났어야 한다.
그런데 교부를 옹호했고 아직도 옹호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신학을 옹호하면서 신학 신학자가 성경 위에 있고
결국은 그들이 랍비처럼 성경과 하나님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
그 뒤에 마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콘스탄닌주의가 교회를 부패시켰다고 한 것은 맞지만 정확하지 못했다.
그 이전에 이미 속사도시대부터 교회타락은 시작되었다.
신학의 정립과 감독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교회에 성직자주의 제도주의 도덕주의 형식주의 등이
침투하여 성도를 신학자 감독들이 지배하고 예수의 통치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이미 세속화된 교회를 콘스탄틴이 완전히 장악해버린 것이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사도가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을 비판해야 한다.
종교개혁이 잘못한 것을 버려야 한다.
사도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유기적 역동적 언약적 주권적인 하나님 나라
직접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통치하시는 교회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가야 한다.
제도화된 교회 이미 권력화된 교회에서 개혁이 된 적 있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한 곳도 없다.
그래서 이미 공고하게 자리잡은 교회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거짓이다.
종교개혁자들도 모두 다 나와서 새롭게 시작했다.
개신교치고 결별 후 새로 세운 교회이다.
그런 후 이제는 교회 안에서 개혁을 하라?
개혁이 이제까지 된 교회가 교단이 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개신교도 교회를 박차고 나와서 따로 세웠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개혁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나안 성도가 는다.
진정한 교회를 개혁하려면 우리 자신이 심히 문제가 많은 것을 인정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사상 경험 정서 습관 사고방식 생활방식 등
성경을 바로 아는 일도 그렇고 참으로 김피 집중적으로 치료해도 안 고쳐진다.
중병 수술이 필요하다. 오랜 기간의 집중적인 치료와 회복 변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것 없이 무엇을 해보겠다고 해도 안 된다.
참으로 그리스도 교회를 갈망하는가?
정말 초개와 같이 버리고 자신들을 치유하면서
변화를 갈망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믿고 그렇게 같이 할 사람들이 너무나 없다.
참 믿음의 사람들을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성도인지 헷갈린다.
현실 상황이 너무나 어렵다
성경도 신학도 신앙생활도 오엽되고 부패하고 독소가 많아서
사람들도 순수한 사람들을 찾기가 너무 힘들어서
서로 불신을 하고 그래서 정말 힘들다.
교회 비판을 하기가 겁난다.
이단 삼단들도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만나야 한다.
참으로 참 교회가 너무나 서럽게 그립다.
그런데 개혁을 외치면서 왜 이리 이리 늑대들이 많은지?
그래도 참 교회들이 세워지기를 학수고대한다
목사 중심도 장로중심도 회중 중심도 사람 중심의 교회는 안된다.
신학교는 앞으로는 폐지되고
대신 성경학교 기독교 학교와 연구소 및 목회연구소 체제로 가는 것이 좋다.
개교회주의를 없에고 전문 사역자들이 교회를 봉사한다.
전문 사역자들은 성경학교 기독교 학교를 통해서 배출이되고
그런 학교 사역을 하면서 신학도 신앙도 목회도 배우면 된다.
그러니까 교회사역자들은 그런 활동을 하는 교사들이다.
같이 연구하고 가르치고 교회도 봉사한다.
그러니까 교회의 중심 인물이 없다.
모든 일들은 서로 합의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에 평신도 성직자의 구별을 없앤다.
성도들 누구도 나름대로 전문성을 확보하고 봉사할 자격을 갖추면 봉사한다.
담임목사나 중심 인물이 없이 주님 중심으로 운영하는 체제
유기적인 역동적인 체제를 갖춘 교회 정치 행정이 이루어진다.
기존의 교회는 특정 지도자가 지배했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 행정은 전문성은 인정되지만 독재는 안 된다.
교육 직업 삶의 하나님 나라 문화가 무잇되어 왔다.
방치되어 온 이것이 하나님 나라 삶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성경연구나 역사 문화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이 하나님 나라 연구활동과
실천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실현되는 구조이다.
정형화된 틀이 아니라 주님의 중심으로 열린 체제이다.
앞으로는 소수라도 이런 체제로 가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해봅니다.
교회에 일단 참 지체로 인정이 되면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교회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니라 성도가 되면
결혼하고 같은 가족으로 호적을 하고
비록 따로 살아도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런 전폭적으로 헌신한 삶
예수와 함께 죽고 같이 산 사람이라면 가능하죠
당연한 이 믿음이 사실은 안 가르쳐지고 있어요
말로는 지체 형제 해도
사실 자신도 내가 예수님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엄청난 상속자라는 사실을 교회가 삶으로는 부정합니다.
이것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만사가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너는 너 나는 나이지만 예수 믿으면
결혼 한 것 보다 더 가까운 사이입니다.
나의 또 다른 분신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리고 내가 죽어서 이제 바로 내가 예수님의 분신이라는 사실
이것이 믿어지고 인정이 되고 내 목숨도 인생도 재산
모두 바쳐져야 비로소 교회가 제대로 되지
그냥 너는 너 나는 나
교회는 동호회 정도로 종교생활을 하는 한
참 교회로서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종교화된 교회 동호회이지요
예수 안에서 죽은 것 없이 내가 삽니다.
에수님도 성령님 하나님도 내 수호신이지요
다른 지체들도 내게 유익을 주는 동호인들이지요.
교회생활이 이런 거래 관계 이익을 주는 동호회 수준입니다.
외롭고 힘든 세상에서 친구 만나고 왕래하며 주거니 받거니
그런 사교장으로 생각하고 삽니다.
이런 것을 목회자들은 이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천명 모으면 자기도 사장 회장님 두목이 되고
군림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에수 이름 빌려 장사하는 곳
면죄부판배소
오늘날 교회가 그런 장사하는 곳입니다.
그런 교회다니면 철저히 예수님을 능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독하는 불법입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교회는 구제기관도 자선봉사단체도 아닙니다.
사회개혁을 해서 변화시키는 곳도 아닙니다.
영적 전쟁을 하는 군대이고
하나님 나라 사회 문화를 창조하는 일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치유 양육 훈육해서 무장시키고
하나님 나라 사회 문화 창조하는 일에
주님과 동행 동역하도록 하는 사회이지요
새로운 인류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이 엄청난 신분과 영광과 특권을 가진 자들의 사회
이 교회가 도둑들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그 도둑들이 신학자와 목회자들만 아닙니다.
교인들도 이용합니다.
정치가들이 태극기 부대로 이용하고
이승만 등 장로들이 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사업가들 다들 나름대로 자기의 이용대상으로 삼아요.
그런데 정말 무서운 곳이 교회입니다.
명분상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을 함부로 이용하면 불법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심판 받을 자
아마 신학교 신학자들이 제일 먼저 서기관 바리새인들처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신학교 목회자 지도자 되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 함부로 나서다가 불법자가 됩니다.
교회를 무서워할 줄 모르는 이 무서움
이 무지와 어두움이 간이 부은 신학자 목회자
교회에서 교회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설령 다 가라지들이라고 하도라도
이름이 교회이기 때문에 함부로 했다가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 무서움을 교인들이 모르고 신학자 목회자들에게 없는 것
이것 이 견고한 어두움이 부서져야 합니다.
교회 대단히 엄청나게 무서운 곳입니다.
예수님 함부로 때리고 찌른 자들 무섭듯이
교회 함부로 만들고 이용하는 사람들
이스라엘 역사를 보고
역사를 잘 살피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런 무서움이 없이
더 나아가서 경외함이 없이 사는 것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우리의 죄악입니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항시 고칠것은 고치려고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중 도전도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