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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진 시집 해설>
삶의 비애(悲哀)와 정한(情恨)의 세계
신규호(시인, 문학박사)
1.
이여진 시인의 제4시집 <너도 꽃이었구나>의 원고를 통독하고 그 소감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삶의 비애와 유한함에서 비롯되는 짙은 정한을 노래한 순수 서정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제3시집 <저 눈물江 건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시집에 실린 이여진 시인의 시가 상기해 주는 정서 역시 눈물 어린 ‘한’의 세계라 하겠다. 슬픔으로 대변되는 ‘비애와 정한의 정서’는 이별과 고난으로 점철되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 누구나 겪는 근원적 정서이지만, 이여진 시인의 경우 작품 편편마다 눈물 어린 한스러움이 직설적으로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국인의 대표적인 정서에 관하여 이제까지 논의해 온 학자들의 견해도 그것이 바로 ‘한(恨)의 정서’라 하는 데에 대부분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국문학 분야에 있어서 고전문학이나 개화 이후의 근대문학을 막론하고 보편적, 대표적이라 일컬을 수 있는 한국문학의 정서가 ‘정한(情恨), 곧 ‘한(恨)’이라고 말하는 바, 특히 민요나 고시조 등, 과거의 고전적 시가는 물론이고, 근대의 시인들, 예를 들면 김소월이나 서정주, 박목월, 박재삼 시인을 비롯한 대표적인 시인들의 경우에도 그 점이 확인되고 있음을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미학적으로 불 때, ‘비애(悲哀)’는 ‘비장(悲壯)’과 구별되는 정서이다. 비애나 비장이나 다 같이 슬픔의 감정과 더불어 일어나는 정서란 공통점이 있지만, 비애는 비장과는 달리 삶에서 비롯되는 역경이나 모순된 상황에 소극적, 수동적, 정태적으로 반응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처럼 비애는 대부분의 한국 서정시에 흔히 나타나는 정서인 반면, 비장은 영웅극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강한 인격이 운명이나 환경과 적극적으로 대결한 후 고뇌 끝에 몰락함에서 비롯되는 비극적 정서이다. 이여진 시인의 경우, 시의 내용이 대부분 비애의 특징인 ‘정한’으로 대변된다는 점에서 김소월이나 박재삼 시인의 경우처럼 시적 정서가 나이브하고 연약하며 소극적 특징을 지닌다고 본다. 참고로 이여진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다루고 있는 비애와 관련된 대표적인 시어를 열거해 보면, ‘슬픔’, ‘서러움’, ‘한’, ‘허무’, ‘허망’, ‘고뇌’, ‘아픔’, ‘죽음’, ‘멍’, ‘응어리’, ‘핏빛’, ‘울분’, ‘망상’, ‘애환’ 등을 지적할 수 있는 바, 그 사례를 일일이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여진 시인의 제3시집 <저 눈물江 건너>와 마찬가지로, 이번 시집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정서의 특징을 ‘눈물과 한탄’으로 표상되는 ‘비애의 세계’라 본다. 하지만, 그 한의 정서를 직정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에둘러 보편적으로 형상화 한 작품들도 다수 있는 바, 비애를 직정적으로 나이브하게 진술하고 있는 작품보다, 먼저 그 정서를 에둘러 표현한 몇몇 작품을 예로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여러 해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책꽂이에서
분신들을 내려놓는다.
좁은 집에
새 살림 거추장스러움에
삶의 흔적들이
쫓김을 받으며
구석방 방바닥에 쌓이고 있다.
넓은 응접실
전원주택 마당
벤치에서 손때 묵은 책들을
다시 펴 볼 날 있을까
삶이 꿈이었던 만큼
꿈으로 끝나고
가난한 흔적들
구석방에 묻어 둔 채 그리
떠나야 할 세상
불편하겠지만 내 죽으면
무덤 속에 손때 묻은 삶의
흔적들 몇
넣어 주시게.
시 <책장을 정리하며> 전문
문인이나 학자들의 삶은 대체로 서적과 씨름의 연속이다. 그에 따라 자연히 세월의 흐름과 함께 쌓여만 가는 낡은 서적들은 책장을 정리할 때마다 큰 짐이 된다. 먼지 쌓인 채, 좁은 집 구석방 방바닥에 쌓이는 ‘쫓김을 받은’ 서적들을 바라보면, 그 모습에서 세월과 함께 늙어가는 삶의 마지막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그래도 한 평생을 벗하여 온 그것들을 언제인가 죽음이 다가올 때가 되면 ‘무덤 속에 몇 권이나마 넣어 달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한다는, 한 몸이 된 책과의 일체감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그 모습을 일컬어 ‘삶이 꿈이었던 만큼 / 꿈으로 끝나고 / 가난한 흔적들 / 구석방에 묻어 둔 채 그리 / 떠나야 할 세상’이니 ‘불편하겠지만 내 죽으면 / 무덤 속에 손때 묻은 삶의 / 흔적들’로 삼아 묻어 달라고 당부한다. 문인으로 일상 속에서 겪는 서책에 관련 된 체험을 소재로 삼아, 그 느낌을 담담하게 인생의 종말의식으로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다. 낡은 서책의 모습에서 그와 유사한 모습으로 세월과 함께 늙어 가다가 종말을 마지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식을 상시시켜 주는 작품이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아야겠다
황량한 바람 끝
파도의 주름으로 부딪치는
한 서림을 들어야겠다
길 잃은 밤 물새
울지도 못하고 해송 숲 둥지 숨어
팔딱거리는 숨결 모아
떨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눈 내리는 겨울 바다
빈 소라껍질 되어
파도의 조롱을 이겨내는
인내도 배워야겠기에
겨울 바다에 가 보아야겠다
쌓인 연륜에 가슴 속 깊이깊이
묻어 둔 한 덩이 뱉지 못한 채
중환자 되어
걸어가는 슬픈 노정이
천 년을 부서지는 파도의
아픔보다 더 하는지---
시 <겨울 바다에> 전문
시인은 마음속에 겨울 바다를 떠올리며 그 정경을 상상하면서, 천 년을 두고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의 모습에 ‘중환자 되어 / 걸어가는 슬픈 노정’의 아픔을 오버랩하여 파도보다 더한 인생의 한스러움을 아프게 진술하고 있다. 미루어 보건대, 시인은 깊은 병고에 시달리는 고통을 겪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년에 접어든 이여진 시인의 질환이 깊은 상태에서 펴내는 이 작품집은, 그러므로 읽는 이로 하여금 아픔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그의 제4시집 속에 절절하게 진술되고 있는 ‘한’과 ‘슬픔’과 ‘눈물’이 부분적으로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한의 정서를 새기고 새겨, 끓어 넘치는 슬픔을 제어해 가면서 겨울 바다의 정경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황량한 바람’, ‘파도의 주름’, ‘길 잃은 밤 물새’, ‘팔닥거리는 숨결’, ‘빈 소라껍질’ 등과 같은 구체적인 소재를 들어 바다의 모습을 담담한 이미지에 담아 시상을 전개하는 시인의 절제된 시정이 가슴에 와 닿는 작품이다.
풍성한 결실 뒤에 숨은
공허의 숨결을 보지 못하는
눈 먼 그리움이다
가을은 맞이하고 보내는
인간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리움의 병을
허무의 나락으로 추락시키며
모르는 듯
결실의 풍요를 누린다
풍성한 결실 뒤에 숨은
공허의 숨결을 보지 못하는
눈먼 그리움
가을은.
시 <가을은> 전문
가을에 예감하는 것은 풍요의 열매 속에서도 미구에 다가올 생의 종말의식, 곧 허무와 공허감이라고 진술하는 일종의 잠언적인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봄철이 여성들의 계절이라 하는 반면, 가을은 남성들의 계절이라 한다. 봄이 되면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감정이 더욱 고조되는 반면, 남성들은 가을에 보다 더 외로움을 느낀다는 일면의 진실이 있지만, 이러한 보편적인 생각을 벗어나서 시인은 가을의 ‘풍성한 결실 뒤에 숨은 / 공허의 숨결’을 예감하지 못하는 ‘눈 먼 그리움’의 계절이 가을이 주는 정서라고 노래한다. 같은 이치로 푸르른 잎이 우거져 풍성함을 지닌 숲의 모습에서도 풍요를 느낄 수 있지만, 그 다음에 올 가을의 나목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상정임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그러기에 가을이란 계절은 ‘맞이하고 보내는 / 인간을 조롱하고 / 비웃으며 / 그리움의 병’을 ‘허무의 나락으로 추락시킨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락의 계절인 가을은 풍요 속에 내장되어 있는 본질적인 허무를 동시에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표현 속에는 청춘 시절에 누리는 젊음의 삶 가운데에서도 미구에 다가올 인생 말년인 노후의 시절을 예감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눈 먼 그리움’이라 규정하고 있다. 인생의 역정 가운데 젊음 속에 숨어 있는 허무한 종말의 진실을 예감하지 못하는 몽매함을 시인은 한탄한다. 그리하여 ‘가을은 눈 먼 그리움’인 것이다.
나비도 지나치는 꽃잎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스치는 바람이 되어
잠시 머물다
네 향을 음미하는
꿈길에서조차
꽃이기를 거부했던 몸짓
네게도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내는
옹아림의 산고가 있었고
암술과 수술의
감미로운 사랑을
갈망하던
고뇌의 날이 있었구나
아! 몰랐다
작은 꽃으로 피어
사랑의 몸살을 앓다
그렇게 지고 마는
너도 꽃이었구나.
시 <너도 꽃이었구나> 전문
예로부터 꽃과 나비는 문인이나 화가에게 작품 창작의 대표적인 소재가 되어 왔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그것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어서, 복잡한 도시생활과 거리가 먼 까닭에 어찌 보면 낡고 평범한 소재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현대적 예술 작품의 소재로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꽃과 나비가 지니고 있는 뛰어난 미학적 특징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영원한 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시인은 꽃이 떠올려 주는 단순한 아름다움만을 찬탄하는 것이 아니다. 꽃이 피어나기까지 치를 수밖에 없는 산고의 고통을 ‘사랑의 몸살’이라 노래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하여야 한다. 여기서 꽃과 나비의 관계는 남성과 여성으로 표상되고, 한 쌍의 연인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추측하게 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누리지 못한 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쳐 버린 생의 ‘절정의 순간’을 못내 아쉬워하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아쉬움이 연인관계를 너머 부모자식 간이나 형제 간 등,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잃어버린 보편적 사랑 때문에 생기는 일일 수도 있으며, 아울러 꽃으로 상징되는 찬란한 삶의 순간이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극한 산고의 고통 끝에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잠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는 데에 이 작품의 묘미가 있다.
해송 숲을 지나는 밤바람
소리를 들었는가
짙은 해무를 뚫고
서둘러 스치는 밤바람
아직 둥지를 찾지 못해
끼-룩 울고 가는 밤 물새
울음까지 더하면
어느 새 벌떡 일어서
밤바다를 본다
끝도 없이 주름져
해변으로 밀려드는 저 아우성
어찌 편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겠는가
긴 인생의 방랑 속에서
깊은 통곡이라도 해 버리고
나면 이 처절한 마음
연륜과 함께 쌓인 한 속에서
작은 위안이라도 되지 않을까
가슴 무너져 내리는
해변의 밤바람
자칫 허무의 자충수로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고 말겠지.
시 <해변의 밤바람 소리> 전문
해송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해변의 밤바람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는, ‘밤 물새의 울음’과 ‘파도치는 아우성 소리’에 한스러운 인생의 비애를 느끼는 심정을 읊은 작품이다. 이 시의 소재로 쓰인 낱말들인 밤바람 소리와 밤 물새의 울음, 파도의 아우성이 시인에게 신산한 고난으로 점철되는 삶의 허무함으로 인해 잠들 수 없게 한다. 그러기에,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아직 잠잘 둥지를 찾지 못한 채 울고 가는 밤 물새의 울음이 스스로의 울음으로 치환되는 것을 느끼며, ‘긴 인생의 방랑 속에서 / 깊은 통곡이라도 해 버리고 / 나면 이 처절한 마음’에 작은 위안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고 카타르시스의 효험을 기대하게 한다.
여기서 밤 물새의 울음과 끝없는 파도의 아우성 소리가 슬프게 느껴지는 까닭이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그것이 시인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을 작품 중에서 찾는다면, 밤 물새의 울음은 다름아닌 ‘아직 둥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긴 인생의 방랑으로 인한 깊은 통곡’ 때문에 유정하게 들린다고 볼 수 잇다. 시인은 이 작품을 빌어 독자로 하여금 ‘긴 인생의 방랑’ 속에서 가슴 깊이 한스러움을 지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비극성을 깨닫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푸른 수평선 어디쯤
그리움 시작 됐는가
파도의 주름 모아
쉬임없이 부서지며 나를 부르고
연륜 깊은 소사나무
너마저 지친 그리움에
휘어 자란 아픔으로
이그러진 표피
참 마음의 응어리짐을
대신해 주는구나
돌아서는 발걸음에
무심한 파도의 외침
가지 마, 가지 마
그리움 재워두고 가
십리포.
시 <십리포에서> 전문
‘십리포’는 영흥도에 있는 포구로,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시인은 십리포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 가득 차오르는 회한에 찬 ‘그리움’의 정서를 느낀다. 바다의 먼 수평선은 무어라 일컬을 수 없는 향수와 함께 그리운 추억을 불러일으켜 준다. 수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를 망연히 바라보며,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지난날을 회고하게 됨으로써, 온갖 과거사에 얽힌 정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가족 간의 인연에 얽힌 것이기에 더욱 가슴 아프기도 하다. 그러기에 해변에 서 있는 늙은 소사나무마저 ‘지친 그리움’에 휘어 자란 듯이 보이고, 그 일그러진 나무의 표피도 아픔으로 응어리진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휘어진 채 키도 크지 못한 소사나무의 모습에 시인의 감정을 이입하여 동화함으로써, 더욱 애틋한 동질감을 공감하게 한다.
소사나무는 중부의 이남 해안과 섬 지방이 원래의 자람 터이다. 다 자라도 키가 얼마 안 되고, 나무 밑둥의 지름이 한 뼘 정도가 고작인 작은 나무다. 그것도 똑바로 선 나무가 아니라 모진 해풍에 비뚤어지고 여러 갈래진 모양새로, 인간관계에 지쳐 삶에 찌들은 인생의 모습과 유사해 보이는 나무다. 하지만, 소사나무는 메마름과 소금기에 강하며 줄기가 잘려져도 새싹이 움트는 등, 척박한 조건에도 잘 적응하는 나무다. 그래서 소사나무는 최소한의 영양분으로 겨우 삶을 이어가는 분재(盆栽)로 흔히 키운다. 이처럼 끈질긴 소사나무의 생명력 대신에 뒤틀리고 모지라진 모습에만 시인이 관심을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 까닭은 과거사에 얽힌 시인의 추억이 ‘불협화음이 되어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이며, 아울러 지상에서 허무하게 사라진 인연으로 인하여 상처 받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소사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표현하기보다, 상처 받아서 뒤틀린 모습을 강조하여 표현한다는 점에서, 대상에 대한 시인의 정서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비애의 정서를 주조로 삼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바다에 들물이 시작되면
모두가 부산해지기 시작한다
바람이 먼저 알고 파도를 일으키며
개선장군마냥 밀려오고
성급한 해조들의 날갯짓은
더욱 바쁘게 파닥거리며
바닷고기들의 작은 심장을 놀라게 한다
만선의 기쁨에 깃폭을 높이 달고 어항으로의 귀향
들뜬 어부의 눈에 선착장의 아내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들어날 때부터는
어부의 팔뚝에 힘이 솟고 검붉은 팔뚝으로
닻 내릴 준비를 한다
들물이 시작되는 작은 포구는
그렇게 설레임과 생동감으로 모두가 부산하다
내 삶이 그랬을까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나의 주변엔
많은 형제들의 소란스러움과
앙증맞은 모습 인형 같은 재롱에
즐거운 함상 함성으로 소란했다
(중략)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바닷물이 다 빠져나간
갯벌 위의 황혼 핏빛으로 불타고 있다
탄생과 함께 했던 사람들
질곡의 삶속에 함께 했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조용하다
물이 빠져나간 갯벌 위로
살벌한 겨울바람이
간장을 태우는 불협화음이 되어
내 마음을 짓누를 때 쯤
어촌의 불빛들이 하나 둘 꺼져간다
시 <밀물처럼> 일부
첫 연에서 시인은 밀물이 몰려 들어오는 바다의 풍경을 차분하게 묘사한다. ‘바람이 먼저 알고 파도를 일으키는 모습’을 마치 ‘개선장군’이라 은유하면서, 밀물에 밀려 흔들리는 해조와 바닷고기들이 파도에 놀라 헤매는 바다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그린다. 제2연에서는 만선의 기쁨을 안고 귀항하는 어부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선착장 아내들의 들뜬 모습을 표현하고 나서, 앞의 1연과 2연을 이어받아, 제3연에서는 그것이 ‘부산한 어항의 설레임과 생동감’이라고 정의한다. 곧, 1,2,3연은 함께 이 시의 전반부가 되어,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작은 어항의 부산함과 생동감’의 표현이라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4연부터 시작되는 후반부에서 시인은 앞 부분의 풍경 묘사와 달리, 어부들 생활의 생동감 넘치는 풍경에서 눈을 돌려 그 광경을 자신의 삶과 연관지어 표현한다. ‘내 삶이 그랬을까 /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나의 주변’에 ‘많은 형제들의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던 지난날을 상기하면서, 막내의 재롱에 ‘즐거운 함성’으로 행복했던 옛날을 추억한다. 이 때 양자를 연결해 주는 공통분모는 ‘부산함, 설레임, 생동감’이다. 하지만, 지나간 어린 시절을 회고해 보면 그처럼 행복했던 일로 떠들썩하기도 하였지만, ‘8.15 해방, 6.25 전란’과 함께 형제들 간의 이념투쟁으로 겪었던 고통스런 추억이 주마등처럼 아프게 느끼기도 하여, ‘들물처럼 썰물처럼 / 설렘과 소란함으로 뒤범벅이 되는’ 심회를 술회하게 된다. 이제 모두 사라진 그들은 간 곳이 없고, ‘살벌한 겨울바람이 간장을 태우는 불협화음이 되어’ 마음을 짓누를 뿐이다. 활기찬 어항의 부산한 모습과, 여러 형제들 가운데에서 소란스럽게 겪었던 과거사를 연관 지어 대조적 수법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숱한 세월 오고가고
내 곁을 맴돌며 함께 한 바람들!
휘이--쌩쌩!
어느 핸가
온금동 산동네 초가지붕을
하늘 높이 높이 휘저어 버리던 고향 바람
가자고 고향 산 옛 산에 가 보지고
온 몸을 흔들어대는 유년의 바람!
원고지 값이 아깝다고
늘 걱정이시던 우리 엄마
서러운 막내 바람까지
온통 휘몰아치며 마음 구석구석
산란하게 흔들어 버리는
바람 바람 바람들
많은 세월 함께 해 온 바람들이
지금 내 마음 깊은 곳의 애환들까지
속속들이 휘저어
산란하게 하는 세월 같은 바람
바람 같은 세월.
시 <바람이 분다> 전문
평생을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고난과 역경을 흔히 바람에 비유해서 표현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 역정 가운데 갖가지 바람을 체험하게 되지만, 바람의 경험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하는 미풍(微風)이 불던 시절이 있기도 하지만, 견디기 어려운 광풍(狂風)이나 태풍의 경우가 오히려 더 흔하기에, 흔히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말한다. 이여진 시인은 이 시집에서 순탄한 미풍의 체험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그가 살아오면서 모질게 겪은 갖가지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바람의 체험’을 여러 모로 변용하여 증언하고 있다. ‘바람 잘 날 없이 살아온’ 느낌일까.
따라서, 이여진 시인이 겪은 체험을 상징하는 바람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여러 형제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부대껴 온 파란만장한 삶인 ‘바람의 세월’을 이 시가 증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숱한 세월 오고가고 / 내 곁을 맴돌며 함께 한 바람들’로 대변되는 시인의 생애는, 그러므로 평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것은 어린 시절 ‘온 몸을 흔들어대던 고향 바람’이기도 하고, ‘지금 내 마음 깊은 곳의 애환들까지 / 속속들이 휘저어 / 산란하게 하는’ 슬픈 오늘의 바람이기도 하다.
3.
앞에서 살펴 본 작품들 대부분이 역경을 상징하는 ‘바람의 의미’를 여러 모습으로 데포르메 하여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여진 시인에게 있어서 바람이 의미하는 ‘비애와 정한의 세계’가 이 제4시집의 공통된 주제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오늘 우리 시단을 풍미하고 있는 시가 대부분 독자들이 감상하기 어려운 난해성을 지니고 있어서, 이러한 현강을 가리켜서 시의 위기라 하기도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의 죽음’이라 한탄하기도 하지만, 이여진 시인의 경우처럼 ‘순수하고 솔직 담백한 서정’을 감상하기 쉽게 표현하는 시인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의 위기가 난해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보화 시대의 도래로 말미암아, 나날이 진보 발전해 가는 T.V, 컴퓨터, 스마트 폰, 대중음악 등이 대중의 시청각을 지배하고 있어서, 시의 독자가 점점 사라져 가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여진 시인의 제4시집 『너도 꽃이었구나』의 작품들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단에 순수 서정시가 아직은 살아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고 하겠다. 근래에 와서 갑자기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능력을 위협한다고 하여, 미구에 닥칠 문화와 문명의 위기를 염려하게 되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인간 본성에 변치 않는 순수한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이여진 시인의 경우처럼 감상하기 어렵지 않은 ‘친근한 서정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