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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불교 성지라 부르는 명산대찰(名山大刹) 속의 국립공원 팔공산으로 오른다.
국립공원 팔공산 끝자락은 오계산에서 가산과 한티재 그리고 주능선을 지나 명마산까지다
주능선 아랫동네는 칠곡군, 군위군, 영천시, 경산시를 품으며 그 속으로 흐르는 일곱의 七川이 있고 지금까지 6개를 걸었고 하나만 남겨 두었다.
일곱 하천을 모두 걸음해 보고 팔공산 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는 천년 고찰을 묶어 백팔 순례란 이름으로 걸어본 다음에
마지막으로 예전의 도립공원이 아닌 5천 종 이상의 생물(生物)이 살아가는 국립공원으로써 예(禮)와 품격을 다하고자
팔공산 주능선 종주와 왕복을 걸음해 봐야 할 것 같다.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을 비춘다는 비로봉이 안갯속에 홀로 있다.
팔공산의 유래는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 시대별로 살펴보면 신라 때는 부악(父岳) 혹은 중악(中岳), 고려 때 공산, 조선시대에 들어와 팔공산이라 불렀다
공산 앞에 팔자가 붙은 내력을 보면
조선후기 사적기에 산자락 아래 여덟 고을( 구미시. 칠곡군, 군위군, 영천시(신령면), 경산시(하양읍), 대구시,)이 있어 지명을
얻었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 보면 , 영천 신령면. 경산시 하양은 중복되기에 제외해야 할 것 같다
두 번째로 고려를 위해서 목숨 바친 여덟 장수(동수대전 때 순절한 분들 신숭겸 , 김락, 전이갑, 전의갑, 전락, 김철, 호원보, 손행)가
계셨다고 했지만 몇몇 분은 동수대전에 전사했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다만, 일제 강점기 무렵에 달성군지에 八장군이 순절했다고 해서 팔공산이라 쓰여있다"는 기록이 있고
세 번째로 원효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 경상남도 양산땅의 천성산에서 천명이 득도를 했지만 그분들 중에서 공부가 싫었던 여덟 명
은 득도를 하지 못하자 원효대사께서 "이곳 천성산은 그대들이 공부할 곳이 아닌갑다"며 팔공산으로 모셔와 팔공산의 오도암(梧道
庵)에서 다섯 분이 도를 깨우치셨고 나머지 세분은 지금의 서봉 아래 삼성암에서 득도를 하셨다는 설(서봉의 옛 이름은 삼성봉 )이 있다
마지막으로 서기 382년 무렵 중국의 남, 북조시대의 진나라 팔공산 자락의 비수(淝水)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동진과 전진군대 간
(백만 대 20만 싸움에서 전진국(國) 지휘관의 무능으로 동진이 이겼지만 결국은 두나라 모두 멸망)의 전투를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
비들이 공산 전투(동수대전 桐藪 )에 빗대여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는데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설에 무게를 둔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그저 개인적인 생각일 뿐 고려를 위해 전사한 여덟 장수가 순절했다고 해서 붙여진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팔공산 정상에는 전체단이 자리하는데 예전에 제왕봉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비로봉이라 부르고
삼국시대 때는 신라의 국운(國運)을 위해 전국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던 곳(산으로는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팔공산이
있고 강으로는 곡강천, 낙동강, 금강, 한강이 있겠다)이라 하여 천왕봉이라고 불렀다는 곳이다.
정상 하나에 이름이 셋이니 어느 누가 정상에 멋진 이름을 올릴지
동봉은 (미타봉) 그리고 서봉은(삼성봉) 정상에 어떤 비석을 올리느냐에 따라 하나는 없어지고 또 다른 이름을 얻는다.
비로봉에서 미타봉(아미타불)인 동봉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통일 신라시대 때 만든 6미터 높이의 석조여래 입상을 만난다.
오늘도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게 기원드리고
잠시 오르면 동봉 정상에 도착한다.
동봉(미타봉)
이슬비가 내리고 안개가 가득한 동봉 정상에는 아무도 없고 바람만 시원하게 불어준다.
오늘은 이곳 정상에서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지나 대구시 북구 동변동에서 금호강으로 흘러가는 짧은 21km의
동화천이며 이른 아침에 택시로 팔공산 수태골에 도착해서 1시간 정도 쉽게 걸음해 올라온 동봉이다.
하천 190개 누적거리 1만 0504km
비가 조금씩 내리고 동봉에서 동화사 방향으로 길을 잡고 내려가면 안갯속에 뿌연 모습의 절벽이 내려갈 수 없음을 알리는데
짙은 안개로 인해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내려갈 곳은 보이지 않고
산행에 있어 힘들어도 결코 노빠구는 없다며 호기롭게 내려왔는데
힘들게 내려왔던 곳을 다시 기어 올라 우측의 릿지길로 이동한다
계곡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오래전에 다니던 짧은 릿지길을 이용해 걸음 하면
부처가 뒤로 돌아 앉은듯한 바위를 지난다
나름의 바위 통천문도 지나고
날씨 맑은 날이면 조망도 좋고 바위구간도 좋은 곳이다
다시 안개 자욱한 계곡으로 들어오니 금방이라도 뭔가 나올 듯하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이리저리 다니면서 물길을 찾아본다.
동화천 첫 물을 찾아서 일단 맛부터 보고
동화천은 이름 그대로 동화사 (桐華)에서 따온 말이며 후삼국시절에 신숭겸 장군이 견훤의 군대와 동화천을 마주 보며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길이가 꽤 긴 암반인데 미끄러져 2미터가량 브레이크 파열된 달구지 마냥 허덕대며 내려가다가 겨우 나무 잡고 멈춘다
쭉 내려갔으면 저 아래 어딘가 꼬구라져 어디 한 곳 부러졌을 곳
미끄러진 곳인데...
가속도가 붙어 계속 굴렀으면 이곳에 쳐밖혔을듯
내려온 곳이고
염불암에서 철탑 사거리로 오르는 일반 등로와 만나면서 계곡길은 뒷전이고 염불암으로 내려가는 등산로 따라 내려간다.
거친 곳보다 안개가 자욱하니 나름의 운치도 있어 보인다
때로는 모두 다 보이는 것보다 이렇게 보일 때가 더 좋을 때도 있다.
방금 내려온 곳으로
염불암으로 내려가는 등산로 길
동화사 말사의 부속암자인 염불암 극락전
뒤쪽에 큰 바위 속에서 염불소리가 난다고 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염불암이라 불렀다고 하니
극락전에 들러 오늘 비록 한번 꼬구라졌지만 안전하게 이곳까지 보내 주심을 감사드리고
뒤편에 점잖은 모습으로 앉아 계시는 문수보살님을 뵈러 가본다.
커다란 바위 전면에는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문수보살이 조각되어 있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크레용으로 꾹꾹 눌러가며 그린 그림처럼 편안한 모습이다
서쪽에는 연꽃 위에 앉아 계시는 마애여래 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늘 그렇듯 회원님들의 안전산행 기원드리고
동화사로 향한다
읽어 보시고
염불암 극락전과 마탕 한편에 청석탑(靑石塔:벼루 만드는 돌)이 투명 유리 보호막으로부터 보호되고 있고
동화사에서 염불암으로 올라오는 길은 차량 통제되어 찾는 이 없어 조용하기만 하다
스님께서도 포행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으셨고 깊은 산중의 적막강산 속의 적막강산이다.
동봉에서 흐르는 물과 염불봉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계곡으로 내려오면 만나는 돌탑군이 이어지고
한때는 서슬 퍼런 면도날 같은 수행자로서 삶을 사셨지만 지금은 세월을 못 이겨
걸음에 힘이 없으신 노(老) 스님의 무거운 발걸음이 전해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맑은 정신으로 수행을 하셨을 수도자로서 삶
스님께 가벼운 마음으로 합장하며 성불하시라 말씀드리고 동화사로 내려간다
잠시 비가 내리다가 그쳤지만 이런 날씨는 더욱 후덥지근하니
온몸 구석구석 땀구멍에서 물을 무단 방류를 한다
조금만 내려가면 동화사 입구이기에 땀에 쩔은 옷이며 더러운 흙을 씻어내고
계곡에서 임도길로 올라와
동화사 부도암 부도탑
동화사 내력에 대해서 읽어 보시고
창건주 극달화상과 진표율사의 법상종과 사명대사만 자세히 알면 될듯하다.
동화사 사천왕상을 모신 옹호문이 보이고
동화사 바로 옆 사명대사 기념관에 들어갈 조형물들이 나열해 계시고
어지간한 절을 찾아다녀 보면
신라시대 자장율사, 원효와 의상 그리고 9산선문과 5 교종
고려시대 나옹선사와 도선
조선시대 무학과 사명과 서산을 알면 거의 절반 이상은 맞춘다
옹호문에서 봉서루까지 부처와 사명대사 그 외 여러가지 조형물이 줄지어 서있는데
불전함 일곱개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기다린다
좁은 터의 동화사가 더 좁게 보이는 곳을 지나면 봉서루 오르는 계단이다.
봉서루를 지나면 대웅전
절하고 나와
읽어 보시고
산신각에는 할배가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 계시고
그 뒤로 쑥과 마늘을 싫어한다는 호랭이가 살찐 고양이 모습으로 엎드려 있다.
봉서루
봉서루 옆에는 통일 범종누각이 있고
오래된 전각은 많이 없고 대부분 40년 정도 된 사찰 부속 건물이다.
동화사 아래에 자리 잡은 약사 대불
법화보궁으로 내려가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만날 수 있어 잠시 들어가 본다
대장경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알려주는 지도
부처님 진신사리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 가져오신 사리인데 출처는 늘 그게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가 맞느냐!로 마무리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때 자장율사께서 가져오신 사리를 최고로 치는데
자장께서 당나라에서 사리를 가져오셨는데 자장율사만이 알고, 자장율사께서도 그렇게 부처님 것이라 믿고 가져왔을 뿐
당나라에서도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도 결국은 진짜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지만
결국은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께서 1,363년 전 중국 오대산에서 21일간 기도를 마치고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부처님 진신사리 100과와 가사, 그리고 400여 편 경전을 가지고 와 봉안한 5대 적멸 보궁
자장율사께서 당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신라땅으로 돌아가고자 "중국 장안현의 종남산에 계시는 원향선사에게 머리를 조아려
"대사!~ 이제 돌아가야겠습니다! 인사를 드리니"신라땅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우면 발해의 여러 나라가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자장이 신라로 귀국하여 이를 왕(선덕)에게 알리자 왕은 진흥왕께서 창건한 황룡사에 9층목탑을 만들도록 허락을 하셨고
645년 황룡사를 건립하여 이듬해 병오년에 황룡사 9층목탑을 완공한다.
자장율사께서 가장 애지중지하셨으나 고려 고종 25년 때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없는 곳, 흔적만 남아 있는 황룡사와 태화사
그리고 한국 삼보 사찰의 대표적인 계율종의 통도사 지금은 두 곳은 불타 없고 통도사만 남아있다
*당대 최고의 절집 경주 황룡사는 70년대 후반에 발굴과정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5과 출토되었으며 지금은 불국사 무설전에 보관 중이니 친견하시기 바라고 울산 태화사의 사리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다
5대 8대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곳을 말하며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중대암, 영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를 말하고
3대는 강원도 건봉사, 선산의 도리사, 대구 현풍의 용연사가 있다.
성지중의 성지인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이기에 그 뜻하는바도 아주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부처님 진신사리 보이시죠
하늘을 보니 얼마나 더울지
감자 삶거나 찌는 날이다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
문경 희양산 봉암사 봉황문, 부산의 범어사 조계문, 순천 선암사 일주문,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특별하게 관리받는 귀한 문이다.
봉황문 아래 보물인 마래여래 좌상이 계시고
지난번에도 만났던 보살님께서 경을 읽고 계시더군요
물은 흐르고
팔공산 국립공원 동부지역임을 알리는 간판이 서있고
동화천 옆의 기생바위와 굿당
시골집 어머니 혹은 할머니께서 목욕재계하고 정화수 떠 놓고 천지신명께 올리던 기도가 있는 반면
이곳은 팔공산 국립공원 안이며 전국에서 드물게 대구시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하여 편하게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
굿당은 늘 굿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으며 북과 징소리 그리고 1m 넘는 굵은 양초 수십 개가 한꺼번에 타는 냄새로
정신이 혼미하며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기생바위가 조그맣게 보이고
예전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는데 그 무렵 전국에 줄타기 대회가 있어 기생이 줄을 매고 연습을 하던 중에 떨어져 죽었다는 그런 믿지 못할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기생바위를 내려오다 보면 만나는 국립공원 안내판
차가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 그리고 물길이 다니는 길이 서로가 다르고
팔공산에서 흘러온 물은 아래로 흐르며 왕건의 공산전투 지역을 소리 없이 지난다
갓바위 인근의 노적봉 아래 자리 잡은 북지정사 가는 길
물은 상수도 보호구역이라 단속요원이 단속하는 곳이다.
시인의 길에 자리 잡은 돌들
돌 그리고 야산집에 줄지어 서 있는 것들
어디서 모았는지 많이도 모아 두었는데
몇몇 아주머니들께서 찾아오셔서 고놈 잘생겼다 한마다 씩 주고받더니 나가셨고
당신이 어디로 가던 그 길에 있어 처음을 뜻하는 0
가장 중요한 첫걸음을 상징하죠
동봉에서 흘러온 물은 갓바위나 환성산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면서 세력이 커져 공산댐으로 흐르고
작은 송사리 가족도 보이고 물은 아주 깨끗하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송사리 녀석들이 이리저리 헤엄치는 모습을 넋 놓고 보다가 일어선다
팔공산 비로봉에서 흘러온 물이 동화천과 만나는 곳에서
지척으로 필공산 능선길이 길게 이어진다
내려온 곳으로
신숭겸 장군께서 왕의 옷으로 갈이 입고 왕건을 살린 왕산과 그 뒤로 도덕산이 있고
우측으로 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길게 이어진다.
공산댐 들어가 전 물빛은 맑고
쓰레기는 하나도 없다.
저짝에 문암산이 겨우 고개를 내밀고 있고
조금만 더 가면 공산댐이라 두 발이 어디로 가던 돌아가는 곳이다.
예전에 대구에서 동화사 방향으로 넘던 고갯마루인데 지금은 도로 아래에 공산 터널이 생겨 데이트 족들이 자주 찾는 곳이란다.
약간 경사진 곳이건만 어지러울 정도로 덥다.
공산댐에서 흘러나온 물은 신숭겸 장군이 지혜로운 묘책을 써서 왕을 살렸다는 뜻의 지묘동(智竗洞)을 지난다.
이번 장마로 인해 상류에서 갈대 줄기가 많이 떠 내려와
곳곳에 갈대 무더기가 갈 곳을 잃고 쌓여있다
공산댐이 겨우 보이는 곳에서
동화천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왕건과 견훤의 동수대전
918년도 왕건이 관심법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다
태조 10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 서라벌로 진격해 경애왕을 죽게 만들자 신하들이 개경으로 말을 달려 우리 신라 좀 살려고 청하니
왕건이 "까짓 그라자"그렇게 성사된 고려의 말년 병장 신라 구하기
왕건은 5천병사와 함께 문경땅 백두대간 하늘재를 넘어 상주 낙동강 건너 칠곡 천평동, 팔공산 끝자락인 소야고개를 넘어 동명 그리고 도덕산 자락에 도착한다
견훤은 왕건에게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며 왕건을 차근차근 밟아주니 왕건은 팔공산 자락에서 세 번 싸워 모두 패하고 여기저기 도망 다니다가 겨우 개성 집으로 갈 수 있었던 전투다
신숭겸 장군 순절단
서기 927년 후백제왕 견훤이 신라를 침입하고 올라올 때
왕건이 신숭겸, 김락, 전의갑, 전이갑 장군과 함께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고려의 5 천군과 함께 거의 몰살 위기에서 신숭겸 장군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왕의 옷으로 입고
백제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곳이다.
고려 장절 신공순절지지비
참수된 신숭겸 장군의 시신은 왼쪽 발아래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근거를 두고
찾았지만 머리는 이미 견훤에 보내진 상태였다
왕건은 오열하였고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었으며 춘천지방에 무덤을 썼는데 봉분은 도굴을 염려해 무덤을 세 개 만들었다고 전한다.
왕건이 얼마나 깊은 원한을 가졌으면 훗날 차령고개 아랫동네 인물은 크게 등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내린다.
왕건과 견훤의 팔공산 전투를 동수 대전이라 부르는데
첫 번째는 은혜사 방향으로 가던 중 견훤과 싸워 대패하였고
두 번째 싸움은 현재의 영천까지 도망갔으나 다시 지원군 신숭겸장군을 만나 이곳 동화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거의 전멸에 이르는 싸움에서 신숭겸 장군 전사
세 번째 대구시 동구 평광동 불로천 인근에서 또다시 견훤과 맞짱을 떴으나 크게 패하였고 이 싸움에서 김락 장군이 전사했다
이후에 왕건의 행적을 살펴보면 동구 안심을 지나 반야월과 금호강을 건너 고모동, 경산으로 넘어가는 담티고개
만촌동, 범어동, 봉산 육거리, 대구시 앞산의 안일사, 왕굴, 임휴사, 낙동강 건너 성주, 김천, 상주, 문경, 충주를 지나서 개성 집으로 올라간다
왕건으로서는 신라를 도우러 왔다가 팔공산에서 아주 식겁한 전투로 기억되었을 것 같다
순절단과 백일홍
순절단에는 모두 일곱 그루의 백일홍이 있는데 400년부터 200년 넘은 나무들이 서있다
읽어 보시고
신숭겸 장군 사당은 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하고
신숭겸 장군 유적지임과 동시에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붉은 홍살문과 장군의 동상이 서있고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변하지 않은 사랑을 뜻하는 백일홍이 많이 심어져 있다.
유적지에서 나와 동화천을 건너며
이곳 지명과 인근의 지명을 살펴보면 고려군이 후백제에 대패한 곳을 파군(破軍)이라 부르는데 현재의 파군재 삼거리다
만 명 이상의 군사들이 모여 싸우다 보니 어른들은 모두 도망가고 아이들만 남았다는 동구 불로동(不老洞)
백제의 추격군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을 놓았다는 동구 안심동(安心洞)
남은 병사를 수습해 천지신명 산천초목에 승전 기원제를 지냈던 초례봉(醮禮峰)이 인근에 있다.
날씨는 모두를 태워버릴 기세인데
헤어 드라이기 100개 정도 얼굴 앞에 틀어놓은 듯 엄청 덥다
대구 클라이버들의 성지인 연경동 암벽바위를 지나
지방하천 동화천
미루나무가 홀로 서 있는데
평상 하나 있으면 딱 어울릴 자리다.
오래전 같으면 농사일이 없을 무렵에 평상에 누워 계시거나 하천에서 피라미 잡아 매운탕 만들어 드셨을 텐데
이제는 시골길을 걸어도 그런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쯤인가
대구 날씨가 덥다는데 머리에 뚜껑이 날아갈 정도로 더웠던 곳
하천 중앙에 자리 잡은 미루나무
동변동과 서변동이 자리하는 곳
아직 물은 깨끗한 편이며 하천가 산책로는 장마가 지난 곳이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팔공산 동봉에서 흘러온 동화천이 금호강과 만나는 곳에서
이번 하천은 천년고찰 동화사나 왕건과 견훤의 동수대전 지역을 지나 금호강에서 마무리하였고
특히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 '태조 왕건"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길이다.
다음길은 가산에서 발원해 북구 태전동으로 흐르는 팔거천이다.
첫댓글 방장님의 강행기를 읽다 보면
계곡을 내려갈때 암릉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미끄럽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인듯 합니다.
어느 계절이나 상관없이 계곡길은 항상
습기를 머금어 미끄러워서
낙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요.
시원한 계곡과 땡볕이 내리쬐는
하천길 걷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설악산에서 깨우친것이 골짜기 내려갈때 밧줄보다..
공사장에 출입금지 테이프 슬링이 정말 용이합니다,,,100미터정도 가지고 다니면 50미터는 두줄로 잡고내려오기에..
왠많한곳은 다 돌파가됩니다...
염불암 위로 한번 계속올라가보니 길없느곳으로... 성축같은 돌담으로 쌓인곳이 있고..
바위가 비를 피할수있는곳도 여러보이던데요... 팔공산 영혼의 산...... 개인적으로저평가된 산으로 생각됩니다...
평산신씨의 시조이신 장절공 신숭겸장군
^^ 우리 집안 시조가 되시는 분으로
방장님 후기에서 이렇게 만나뵙게 되니
유전자가 찌릿하는지 찡~합니다.
팔공산과 동화사 절도 한번 가봐야지 싶구요.
더불어 시조 찾아서 두루두루~
뜨거운날 돌아댕기시면 머리 벗겨지시니
몸 먼저 살피시고
더위 사그라들면 걸음 이어가시길요.
늘 건강 몸이 우선이라...
석조여래입상의
지그시 내려다보며 호통하시는 모습의
살살좀 댕기라~^^
몸 축날라~한번 미소지어보며 후기 감사히 봅니다.
강행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바위에 미끄러져 큰일 날뻔 하셨네요
늘 조심하시길요.
왕건과 견훤 신숭겸 장군에 관한 역사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팔공산 자락에 그런 역사가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