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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싱 여행5 - 노신의 마을 루쉰꾸리에서 노신이 썼던 문학 작품들을 떠올리다!
저장성 닝보역 宁波站(영파)에서 기차를 타고 사오싱베이짠 绍兴北站 (소흥북참)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832 路 버스를 타고 港鉞路口(항월로구) 에
내려 88 路 버스 를 환승해 루쉰꾸리 魯迅故里(노신고리)에 도착하니 관광객 천지입니다.
노신이 12살부터 다닌 三味書屋(삼미서옥) 을 구경하고는 노신이 살았던 집 을 보는데
중국은 1644년 산해관을 넘어온 여진족의 청나라 가 들어선후 강희제와
옹정제 및 건륭제때 영화를 누렸으나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망하던 역사 를 돌아봅니다.
100만에 불과한 여진족 이 어떻게 5천만에 달하는 중국을 정복해서 267년이나 다스렸는지
불가사의 한데... 1616년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 는 1618년에 무순을 공격해 점령하고
청하로 진격하자 명나라는 정유재란때 명군 총사령관이었던 경리 양호 에게 진압을 명합니다.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8기군 6만 인데 비해 명군은 임진왜란 8년간 연인원 25만을
동원하는 바람에 재정은 파탄나고 국력이 피폐해져서 이제는 불과 8만 8천
밖에 동원하지 못하는지라... 조선군 강홍립 1만 3천 의 지원으로 10만 정도의
군대를 중군은 심양 에 두고 4개군 을 편성해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 로 진격합니다.
이에 후금의 누르하치 는 기마대의 기동전으로 각개격파 전략을 세웠으니....
먼저 전공을 욕심내어 앞서서 진격해온 2만 5천 두송의 서로군 을 薩爾滸
(사르후) 에서 격파하고 이어 북로군 마림의 2만을 상간하다 전투 에서 쳐부숩니다.
이여송의 아우 중로군 이여백은 후퇴했으나 사정을 모르는 동로군 정유재란 서로군 대장
유정 은 계속 진격해 선봉 1만이 오르카시 숲 에서 여진 암마일리군 3만의 기습 을
받아 전멸하고 뒤따르던 후군 1만도 연속적으로 기습 당해 패하니 아부달리 전투 입니다.
이때 조총부대 보병이 주력인 조선군은 후방에 있었으니 이는 자금이 부족해 출발이 늦은
데다가 식량이 보급되지 못하니 굶주린채 행군 하느라 진군속도가 느렸기 때문인데...
명군과 김응하의 좌영이 앞장을 서고 중군과 우영이 뒤따르다가 여진군이 진격 하자
후미의 중군과 우영은 언덕으로 후퇴했으나 좌영은 평지에서 여진군 기마대 를 맞이합니다.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의 여진군 이 조선군 을 향해 진격해 김응하의 좌영이 기습당하니
이민환이 쓴 책중일록 에 보면 5천에 달하는 조선군이 총 한방을 쏜후 재장전하는 중에
여진 기병이 진중으로 난입 하니... 천보 뒤쪽 중영 병사들은 겁에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기를 버리고 주저앉아 움직이지 못하는지라 좌영은 우군의 목전에서 괴멸 당합니다.
좌영을 구하라는 지시를 받은 우영 병사들은 이동중에 역시 기습을 받아 흩어지니 좌우영
9천이 몰살당한후 포위된 중군은 장군들이 결사항전을 외쳐도 겁먹은 4천 병사 들이
호응하지 않는지라 화약상자를 모아 폭사 하려는 순간 적군이 통역사를 찾으니 부원수
김경서가 나서서 출병을 변명한 후에 도원수 강홍립이 항복하니 富車(부차) 전투 입니다.
조총은 탄환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으니 오다 노부나가 는 1575년 나가시노전투
에서 조총대를 3열 로 편성해 1열 사격, 2열 총구 소제, 3열 총알과 화약 재장전 으로
연속 사격을 실시하여 일본 최정예 다케다군 기마대를 몰살 시키고 일본의 패자가 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유성룡이 신립장군 에게 일본군 조총 대비책을 묻자 그는“쏜다고 다
맞는답니까?”퉁명스레 대꾸했는데... 조총 재장전 시간 을 생각해 두만강에서 여진족을
무찔렀던 조선군 기마대가 돌격하면 1진은 피해를 입어도 2진이 돌파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 는 17년전 오다 노부나가 의 3단 전법으로 연속사격을 실시했으니
조선군 기마대는 적 진지 까지 접근해 보지도 못하고 격파당하니, 전투의지를 상실해
겁에질린 조선군은 달아나 금강물에 빠져 몰살당했는데도 조선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네요?
하다못해 사서에는.... 적 기마대와 접전하면 들판이 아닌 산지나 계곡에 진지 를 구축하고
뾰족하게 깍은 말뚝 을 세우며 장애물 도랑 을 파야하고, 만부득이 평지에서 대전하면
말발굽을 찌르는 쇠붙이 장애물 을 뿌리고 장창대 를 준비해야 하며 3단 연속사격
해야 하거늘 당황해 한꺼번에 일제히 총을 쏘고는 재장전하는 혼란중에 전멸당한 것입니다?
후금 은 2년후인 1621년 요동을 점령한후 1625년 심양 으로 천도했으며 1626년
누르하치 는 13만으로 요하를 건너 만리장성 인근에 3만 원숭환의 영원성 을
공격하다가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명군 홍이포 에 맞아 부상당해 결국 죽습니다.
8남인 황태극이 태종 이 되어 다음해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인조의 조선을 굴복시킨후
조선이 군신의 예를 다하지 않자... 1636년 몽고군 8기를 포함해 10만대군으로 병자호란
조선을 정벌하지만,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다음해 죽으니 조선의 군신들은 환호작약 합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8년간 25만을 파병해 천문학적 전비로 거덜난 조정이 세금을 폭징하니
농민반란 이 일어나고 진압을 하는중에 여진족 이 흥기했으며 여진족 토벌에 집중하자
농민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나니, 이자성 은 군인이었지만 식량 보급이 끊기자 반란군에
합류하지만 토벌당해 죽게 되었을때 1636년 여진족이 명나라를 공격하는 바람에 살아납니다.
1639년 이자성은 명군이 장헌충을 토벌하는새 어부지리로 하남성에 진출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면서 인기를 얻어 1642년 낙양에 이어 개봉 을 함락하고 틈왕에 오른후 1644년
시안을 함락하고 북진해 4월말에 베이징을 함락하니 명나라는 망하고 숭정제는 자살 합니다.
이자성군이 이렇게나 쉽게 베이징을 함락한 것은 명군이 청나라군의 침입에 대비해 병력을
산해관에 집중 했기 때문인데... 명나라가 쇠퇴기로 접어들어 농민반란과 몽고족의
침입으로 기울던 1592년 제 분수를 알고 임진왜란에 파병하지 않고 압록강에 대군을
주둔만 시키고 여진족을 통제 했더라면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 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 이 오삼계 부친을 죽이고 첩 진원원을 차지하자 오삼계는 이자성군
에게 항복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청군에 항복후 군대를 돌려 이자성군과 대전 하는
중에 어린 순치제를 대신해서 섭정을 하던 도르곤 은 산해관으로 입성하니....
청군 기마대 는 이자성군의 배후를 쳐서 격파하고 베이징에 입성해 중국을 차지 합니다.
청군은 이자성군과 남경에 세워진 남명국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도가 지나쳐 "목을 자를래
머리카락을 자를래?" 라며 "변발 호복" 을 강요하니 중국인들의 격력한 반발을 초래해
수백만을 살육하는 혼란을 거쳐 평정되는데.... 노신은 "유맹의 변천" 에서 "협의 기질"
이 있는 과감한 사람들은 사라지고 중국인들이 오랑캐 앞에 굴종으로 떨어졌다고 한탄합니다.
1673년 운남과 귀주를 다스린 평서왕 오삼계 가 반란을 일으켜 호남성으로 진격하자 광동성
평남왕 상지신 과 복건성의 정남왕 경정충 이 합세하니 "3번의난" 인데... 스무살
강희제는 진압을 명하지만 오삼계군은 팔로군을 격파 하고 사천을 거쳐 서안(장안)
까지 진격하고 강남은 한족이 수복했으며 오삼계는 형양에서 주(周)나라 황제에 오릅니다.
조선은 병자호란후 심양에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효종 이 되어 명에 대한 의리와 삼전도의
치욕 을 씯고자 박서, 원두표 및 이완의 도움을 얻어 북벌을 위해 군대 를 양성했으나
죽고... 1673년에는 현종의 치세 인데 여진족은 인구가 100만에 불과하니 중국을 통치
하기 위해 대거 이주한지라 만주는 심양을 제외하고는 비어 봉금지로 묶인 상태 였습니다.
때문에 삼번의 난으로 중국 강남과 서부가 모두 한인의 손에 들어가 청나라가 곤경에 빠진
이때 진격하면 텅빈 만주를 차지하는 것은 아주 쉬웠으며 문제는 반격 인데, 청나라
자신이 위급한 지경이라 8기군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고구려땅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였으나... 소심하고 비굴하며 겁이 많았던 조선의 지도층은 끝내 결행하지 못합니다.
중국의 강남에서 3번의난을 일으킨 한족들은 자고나면 조선군이 만주로 들어왔느냐고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1674년에, 조선은 효종비 인선왕후의 상 을 당해 조대비가 상복을 9개월
(서인) 입을지, 아님 1년(남인) 입을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국운(?)을 건 당쟁에 빠집니다!
원나라가 홍건적 반란군에 쫃겨가던 1392년 우왕과 최영은 만주로 진격해 몽고와 명나라
사이에 솥의 세 발처럼 3국정립 을 하고자 원정군을 일으켰을때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수 없다며 회군해 최영과 고려왕을 죽이고는 명나라에 중추원사 조림을
보내 우리나라 이름을 지어 주십사며 조선(朝鮮) 과 화령(和寧) 2개 후보 이름을 바칩니다.
화령(和寧) 은 이성계의 출생지로 1393년에 영흥(永興) 으로 바뀌게 됩니다만 이후 조선은
중국에 사대(事大)를 국책으로 섬기니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정적
이인임의 아들 로 잘못 기록된걸 고쳐 달라고 수없이 애걸복걸하고 광해군 세자 책봉을
명나라가 윤허해 달라며 머리를 찧은 굴종의 역사 때문인지 만주 출병을 결행하지 못합니다.
청나라는 3번의 난 진압후 강희제 통치 61년 , 옹정제 13년 그리고 건륭제 통치 60년으로
135년간 세계 최강대국 으로 영화를 누렸으나 1,840년 아편전쟁 에서 영국에 패배후
난징조약으로 홍콩을 할양하고 항구를 개방했으며 영불 연합군에 수도가 점령 당하고
태평천국난을 자력으로 진압하지 못하며 철일전쟁에 패하니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합니다.
노신 은 1881년 사오싱(소흥) 에서 태어났으며 1902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센다이의학학교에 입학했으나 중국인들의 정신을 먼저 치료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자퇴한후 도쿄에서 외국 소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다가 1909년
귀국해 고향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신정부의 교육위원 으로 참가합니다.
노신의 옛날집 魯迅古居(노신고거) 를 보며 이런저런 중국 역사를 회상해 보고는 뒷문으로
나와 남새밭 을 지나 할아버지 집인 魯迅祖居(노신조거) 까지 찾아 들어가 보는데 노신은
세계적 수준의 작품 아큐정전 (阿Q正傳) 을 쓴 중국의 문학가 겸 사상가로 우뚝 서 있습니다.
본명이 저우수런 周樹人(주수인) 인 루쉰(魯迅 노신) 의 첫 작품은 1918년 5월 신청년
(新靑年)에 발표한 광인일기(狂人日記) 인데 피해망상광(被害妄想狂) 의 일기
형식을 빌려, 주위 사람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줄거리로 하여 중국의 가족 제도와 유교 도덕의 위선과 비인간성 을 고발합니다.
사상적 내용에 있어서나 새로운 구어체 문장 을 창출한 점에서 유교에 대한 비판과 구어문
제창을 2개 기둥으로 삼았던 문학혁명의 대표작 으로 루쉰뿐 아니라 중국 근대문학
제l작이 되었으니 제목은 고골의 광인일기 (狂人日記) 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공을기 (孔乙己 쿵이지) 는 1919년 4월 신청년(新青年) 에 발표하였으며 1922년
까지 쓴 소설 14편을 수록한 단편소설집 (납함) 을
1923년 8월에 출판하였는데... 공을기(孔乙己) 도 그 중 한 편에 속합니다.
만청(晩淸)시기 과거제도에 찌들린 건달 지식인을 통해 양반의 위선 과 식인적(食人的)
인 봉건적이고도 현학적인 외형을 풍자한 작품으로 봉건제도 밑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한 박해를 받은 하층 지식인 들이 봉건제도의 희생물이
되어가면서도 끝내 각성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일생을 마감하는 내용을 다룬 작품입니다.
대표작 아큐정전(阿Q正傳) 은 1921년 베이징의 천바오(晨報) 부록판에 연재 되었다가...
1923년에 납함(呐喊)에 수록되었는데 신해혁명(辛亥革命) 을 전후한 농촌을 배경으로
정확한 성명도 모르는 최하층 날품팔이 농민인 '아Q 의 전기' 라는 형식으로 쓴 소설입니다.
혁명당원을 자처했으나 도둑으로 몰려서 싱겁게 총살되어 죽는 아Q 의 운명 을....
혁명 앞에서도 끄떡없는 지배력을 가지고 마을에 군림하는 지주(地主)
조가(趙家) 와의 대조로 그려냄으로써 신해혁명의 쓰디쓴 좌절 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욕을 받아도 저항할줄 모르고 오히려 머리 속에서 '정신적 승리' 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아Q 의 정신구조 를 희화화(戱畵化) 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이 자기가 바로 모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중국 구(舊)사회의 병근(病根)을 적나라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루쉰의 집 魯迅故居(노신고거) 은 어찌나 크고 넓은지 부자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가
어릴때 놀았다는 뒷 마당 백초원(百草園) 은 이제는 채소도 심지 않고 그냥 빈터로
방치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옆에 자리한 魯迅祖居 까지 보고는 집을 빠져 나옵니다.
노신기념관 은 수리중인지 문이 닫혀 보지 못하는데 상해엔 홍구공원에서 이름이 바뀐
노신공원 안에 있는 노신기념관 을 몇 년전에 본 적이 있으니 그로써 위안을 삼습니다.
사오싱과 상해 외에도 광동성의 중산대학 구내와 산동성 청도(靑島)에도 노신기념관 이
있으니 어디서든 기회가 나면 한번 들여다 보아도 좋겠는데, 중극 근대화 과정에
사회 상황과 선각자와 지식층 사상의 흐름과 방향, 철학 등의 흔적들을 엿 볼수 있습니다.
1909년 일본에서 귀국한 루쉰이 작품을 쓴건 조선의 이광수 처럼 중국인의 무지와 게으른
국민성을 개조하며 계몽 시킬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여긴 때문으로 보는데 모택동은
노신에 대하여 “위대한 문학가일 뿐 아니라 사상가이자 혁명가”라고 극찬을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달아난 대만 에서는 노신을 좌파 로 여겨 모든 작품을 금서 로 지정하고 1990년대
말 까지 시중에서는 노신의 이름조차 볼 수 없게 했다고 하는데.... 소총과 박격포에
구식 대포로 무장한 120만 모택동의 공산군에 비해, 미군의 전폭적 군수 지원으로 신식
대포와 탱크에 비행기와 군함을 갖춘 430만 대군의 장개석군이 패한 이유를 알것도 같습니다?
루쉰이 쓴 소설 공을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들리던 함형주점(咸亨酒店) 은 개업후 2년만에
영업이 잘 안되어 문을 닫았다가 1980년대에 다시 그 자리(지금은 소흥시 노신로)에서
영업을 하는데 지금은 소흥시 명소 가 되었다니 들를까 하다가 심원 을 먼저 보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