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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평양, 조선의 평양(3-1)
『고려사』지리지에 따르면,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는 오도양계(五道兩界) 중에 북계(北界)에 포함되어 있다. 즉, 서경은 평양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책에 써있는데로 밖에 인식할 수 없다면, 고려가 평양에 서경을 두었다고 믿고 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원이 그간 고대 지명의 위치를 연구한 결과, 고려가 서경을 둔 곳은 평양이 아니라 요동(遼東)이었다.
그 근거는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이 990년에 서경(西京)으로 행차하면서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웅도(雄都) 평양(平壤)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990년 9월 7일 기묘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기회에 부응하여 세상에 내려와서 큰 덕으로 사람을 대하시니, 모든 고을이 내조(來朝)하여 삼한(三韓)이 편안해졌다.
존귀한 자리에서 남면(南面)하면서 서경(西京)을 처음 설치하고, 종실(宗室)의 친족을 보내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으며 직무를 나누어 맡김으로써 각자 권한을 가지도록 하였다. 매년 봄과 가을을 맞아 직접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오랑캐를 막아 국경을 굳건히 하고자 하여 웅도(雄都) 평양(平壤)에 의지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패업(霸業)을 공고히 하셨다.'(중략)"
즉, 서경(西京)에 행차하러 가면서 평양(平壤)을 웅도(雄都)라고 기록했는데, 웅도(雄都)가 도읍지(개경)를 의미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경(西京)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고려 서경이 당연히 평양에 있었다고 믿고 있으며, 자기 자신이 높은 학문의 경지에 올랐다고 스스로 감탄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윗 교서(敎書)에서 웅도(雄都) 평양(平壤)은 당연히 서경(西京)을 의미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상기한 '교서(敎書)'의 뒷 부분을 보면, 서경(西京)이 요성(遼城)이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중략)... '이제 하늘과 사람이 같이 경사를 누리고 원근(遠近)이 다 평안하며, 모든 농사꾼이 풍년을 함께 축하하고 곡식들도 모두 잘 여무는 데 올랐으니 10월을 택하여 요성(遼城)을 찾아가 조상들의 옛 규범을 행하고 나라의 새로운 법령을 펴고자 한다. [이번 행행(行幸)은] 다만 관문(關門)과 산하(山河)의 형세를 살필 뿐 아니라 장차 아울러 백성의 안위(安危)를 알아보고 지방 관리의 숫자를 덜거나 더하며 산천(山川)에 올리는 제사를 깎거나 정하려는 것이다.
그 행차(行次)의 의장(儀仗)과 모시고 따르는 관료, 식사[御膳]와 악관(樂官)은 모두 마땅히 줄이고 덜어내며 서도유수관(西都留守官)과 연로(沿路)에 있는 주현(州縣)의 수령(首領) 및 여러 진(鎭)의 지휘관은 잠시라도 임소(任所)를 떠나지 말도록 하라.
(이번 행차를) 검소하게 하라는 나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대들의 번화(繁華)한 풍습을 경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즉, 요성(遼城)이 서도(西都)이며 서경(西京)으로서 요동성(遼東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결코 요성(遼城)이 요동성(遼東城)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요성(遼城)은 어디에 있었고, 요동성(遼東城)은 어디에 있었는지 명백히 밝혀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요성(遼城)과 요동성(遼東城)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겠는가?
또 서경이 평양에 있었다면, 평양에 요성(遼城)이 있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누구든지 봐도 사료상으로 주목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고려사』지리지에 써있는 기록과 『고려사』에 써있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즉, 『고려사』지리지에는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에는 서경(西京)이 요성(遼城)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기록이 올바른 기록이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기한 두 기록 중에서 어느 기록이 올바른 기록인지를 판정하기에 앞서 사서(史書)에 왜 틀린 기록이 존재하고 있는냐를 신중히 고려해봐야 할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제까지 왕왕이 역사왜곡에 관하여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 원인이 일제의 역사왜곡이라고 울부짓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 어용학자들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하여 어떤 역사를 어떻게 뜯어 고쳤는가?
현재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다수설로 인정받으면서 국사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들이 일제 어용학자들이 뜯어 고쳐논 역사인가, 아니면 뜯어 고치기 전의 올바른 역사를 되찾은 것인가?
만약 일제 어용학자들이 뜯어 고쳐 논 역사가 아니라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청(淸), 명(明), 원(元), 송(宋) 등등등 누가 역사를 왜곡시켜놨겠는가?
아무튼 신라왕 김부가 935년에 고려에 나라를 바쳤는데, 태조 왕건은 두 딸을 김부에게 시집보내면서 '낙랑공주'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즉, 낙랑(맥국)이란 곳은 바로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공주들이 태조 왕건을 떠나서 지방(낙랑)에 따로 살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935년 당시에 고려의 도읍지는 옛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으로서 낙랑(맥국)이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또 고려 태조 왕건이 초기에 919년에 송앙군에 도읍을 두고 개경(개주)이라고 불렀지마는 최소한 935년 이전에 도읍지를 송악에서 평양으로 옮겼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그간 본 연구원이 고개 지명들의 위치를 연구한 결과. 송악군, 평양(낙랑), 요동 등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계속)
[그림 1] 송악군, 평양(낙랑), 요동 등 추정지역
첫댓글 끊임없는 연구에 위로와 칭송을 드립니다.
고려의 요동서경은 고구려 국내성인 평양이며 고려도읍은 국내성 동쪽의 개성입니다. 모두 감숙성이지요.
요동서경과 요동성은 위치가 다릅니다. 요동성은고구려요동성입니다. 낙랑은 감숙성, 하남성동북(산동성서부), 북경지역, 한반도 4곳에 있으나 원래위치는 감숙성 한 곳 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이동조작된 것이지요. 혹시 참고가 되었으먼 좋겠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안녕 하십니까
한반도와 만주를 떠나 내몽골 몽공 파레스탄 지역 까지 넓혀 보십시요
우리의 고토古토는 동서2만리 남북5만리 아닙니까
산동반도에서 아라비아 만 가지면 2만리 아닐까요
요즙 서장 위구루지역 =고려지역 백성들 입니다
달라이 나마가 독립운동하는곳도 옛 신라가 당나라와 마지막 혈전토번이란 나라가 현 티벳지역이지요
백두산도 현 북한에 잇는 것은 왜곡된것입니다
백두산=白頭山=흰머리산이죠=흰머리사
희머리산=흰말리야 현 세계최고 높은산 희말리야가 옛 우리민족의성지 백두산 입니다
그곳에 티벳과네팔 쓰리랑카 단군의백서임을 증명하는 단=탄 파키스탄 앞칸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스탐 키리키스탄
단군의 배성임을 표방하여 탄으로 국가명을 표벙하여 모두탄이란국가로 건국한 나라들을 살펴보십시요
우리나라를 형제국이란는나라 카자흐스탄은 단군을 저희 시조라고 합니다
터키도 우라를 형제국이라 하지요 우리 역사를 잃어 버렸으나 그 나라들은 고유한 역사를 가졌으니
그나라 역사책을 구하여 읽어 보시길
지금 왜 역사가 주ㅜㅇ요 하느냐= 성경에 기록상 희년 입니다
희년이란 =옛땅을 되돌여 받어야할 대 고구려의정신 多物정신의 때라 이말 입니다
옛 古土回復 고토회복을 하겟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