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2월에 새 추기경들이 서임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에 새 추기경이 탄생하리라는 추측성 이야기도 들려온다. 기쁜 소식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도 있지만 사실 걱정이 더 앞서기도 한다. 평범한 신자로서 추기경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것은 내키지도 않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 주제이니 침묵만 지킬 수는 없다.
추기경 숫자가 늘어나면 현실적으로 한국 천주교회 위상이 높아지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언제부터 추기경 숫자로 교회 위상이 평가되었는가. 그런 권력지향적인 생각은 성서정신이나 예수의 생각과도 관계가 없다.
지금 한국에 추기경이 한 분 계시다. 그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르겠다. 정진석 추기경이 김수환 추기경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진석 추기경은 교황 베네딕토 16세 재임기의 교회 분위기에 어울리는 분인 것 같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노선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 분 같다.
지난 2월 11일 베네딕토 16세께서 건강상 이유로 자진 사임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그날 나는 남미 출신의 개혁적인 교황이 탄생하기를 바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교황 자리에 오르는 일도 그렇지만, 교황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 아름다운 모범을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최대 업적은 자진사임한 일이다. 그 업적은 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분이 사임한 덕택에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성령의 선물’을 가톨릭교회와 인류는 얻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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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5월 10일, 서울 명동 주교관 정문에서 열린 ‘제14대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임명 발표식’에 참석한 당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왼쪽)과 염수정 대주교 ⓒ강한 기자 |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최근 묘한 발언으로 한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내용적으로나 시기적으로 적절한 발언이라고 볼 수 없다. 양떼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목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발언이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와 평신도들의 시국기도회에서 드러난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와도 거리가 먼 처신이다. 결과적으로 염수정 대주교는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을 한국 사회에 거의 최초로 공개해 버렸다. 염수정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와 거리가 한참 멀 뿐 아니라 정반대되는 모습까지도 보인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고 배워야 할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다. 자신이 적격자가 아님을 모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배우고 실행할 일이다. 그런 자세가 하느님 보시기에도 떳떳한 일이다. 염수정 대주교에게 혹시 추기경 자리가 제안된다 하더라도 겸손하게 사양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사절하겠다는 뜻을 미리 교황청에 전달하거나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곧 출판될 로메로 대주교의 일기를 번역하면서 내가 절실하게 느낀 점이 있다. 적절하지 못한 주교의 존재는 교회와 민족에게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지난 일만이 아니고 남의 나라 일만도 아닐 것이다.
이번 새 추기경 임명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운영 방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이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진지한 목소리를 내는 교황의 생각과 처신에 걸맞은 추기경들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나누는 추기경을 우리는 바란다.
개혁적 성향의 새 추기경이 한국에 탄생하길 빈다. 그리고 새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 자리를 맡게 되길 빈다. 그러면 한국 천주교회에 새로운 희망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다시 가난한 사람들이 명동성당을 즐겨 찾을 것이다. 명동성당은 다시 국민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성지가 될 것이다. <평화방송>과 <평화신문>이 진실과 정의의 언론으로 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만일 염수정 대주교가 새 추기경으로 임명된다면, 그것은 한국 천주교회에 아주 실망스런 소식일 것이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우리 국민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주 슬픈 소식이 될 것이다. 염수정 대주교께 개인적으로 죄송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분보다는 한국 천주교회를 나는 더 사랑한다. 한국 천주교회보다는 우리 민족을 나는 더 사랑한다. 우리는 기쁜 소식을 듣고 싶다. 진리의 성령, 정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기도드린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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