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의 기절할 뻔 했다. 본인 말로는 그중 반이 베스트셀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게, 지난 91년부터 14년 동안 일본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그에게, 어떻게 생활했느냐고 묻자 책 판 돈으로 먹고 살았다고 했다. 소설, 에세이, 배낭여행기, 일본에서 출간한 한국어 교습본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그중 단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미안하다. 17년전, 그의 소설 [청 블루 스케치]를 서점에서 만지작거리다 놓고 나온 기억이 선명했다. 시인, 소설가, 영화평론가로 글 쓰는 직업을 여러 개 갖고 있는 나보다 4배나 많은 책을, 그는 썼다. 양보다 질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양도 중요하다. 47살의 사내가 자신의 나이보다 많은 책을 펴냈다는 것은, 그가 인생을 열심히 살았다는 데 대해 어떤 반론할 수 없게 만드는 최고의 자산이다)
이규형은, 80년대를 관통한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나 역시 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행세하기 시작했지만, 대중문화의 중심축으로 들어오던 영화의 뜨는 별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처지였다. 80년대 가요에 조용필이 있었다면 영화에는 배창호가 있었다. [꼬방동네 사람들]부터 사회성을 담아내던 배창호와 다르게, 이규형은 방황하는 청춘에 초점을 집중하며 차별화된다. 전통적 기반에서 벗어나 빠른 속도로 도시 산업화되던 70년대식 최인호적 감성과는 또 다르게, 이규형은 소비문화가 핵우산처럼 활짝 펼쳐지면서 전개되던 80년대식 감성의 한 국면을 대표한다.
1983년, 지금은 [드림시네마]가 된 옛 서대문 [푸른 극장]에서 그의 첫 시나리오 [사랑 만들기]가 개봉되었다. 테멘의 김정률씨가 만든 그 극장에서 개봉된 문여송 감독의 [사랑 만들기]는, 이제는 낯익은 용어가 된 [...만들기]라는 유행어를 낳은 시발점이었다. 제목부터 인공적 냄새를 물씬 풍기며 꺼져가던 70년대 청년문화의 불씨를 새로운 감각으로 빚어낸 그 영화가 통속적이고 치기어리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 시대 가장 많은 청년들의 감수성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규형은 그렇게 등장했다.
이규형의 감독 데뷔작 [청 블루 스케치](86년)는 영어 제목을 인정하지 않는 공륜에 의해 앞에 푸를 [청]이 붙어서 개봉되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87년)는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했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이다. [어른들은 몰라요](88년)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 요즘의 김기덕처럼 그 당시 이규형은 1년에 한 편씩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 1995년 허무영 만화를 영화화 한 [헝그리 베스트 5] 이후 10년 만에 영화 현장으로 복귀하는 이규형 감독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아무런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약속 장소인 청담동 [A.O.C]는 사진작가 김용호씨가 운영하는 곳이어서 문화계 인사들이 자주 출몰하는 카페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먼저 와 있었다. 맞은편에는 8,90년대 한국 잡지 출판계를 평정한 민윤기씨가 앉아 있었다.
나도 실제 나이보다 많이 접어서 봐주는 편이지만, 이규형은 정말 동안이다. 누가 그를 57년 닭띠라고 믿겠는가. 일본 체류시절 국내 신문에 실리던 그의 칼럼 사진은 많이 살쪄 있었는데 영화를 개봉하려고 뛰어다니느라 힘들었는지 몸도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었다. [DMZ: 비무장지대]는 그의 청춘시절을 담보로 한 영화다. 이미 그가 소설로 발표한 [일등병 오딧세이]가 원작인 이 영화는 일본 도에이가 전체 제작비의 반을 투자했다. 앞으로도 이규형 시네마에서 제작하는 영화는 도에이가 지분의 반을 갖고 투자한다고 그는 말했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세속적인 풍파를 나름대로 많이 겪게 된다. 특히 돈 문제가 관련된, 더구나 영화산업처럼 수십억의 거액이 오고 가는 계약에는, 반드시 책임자가 서명한 계약서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문서화 된 계약서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담배를 한 대 문다. 계약서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도에이와 이규형을 연결해 준 사람은 일본 야쿠자의 거물. 일흔 살이 넘은 보스는 이규형에게 [쿄오다이붕]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나이를 떠나서 친구처럼 너를 대하겠다는 뜻이다. 문서에 도장 찍고 사인하는 법률적 약속보다도 훨씬 더 큰 위력을 지닌 말이다. 일본인들은 처음에 사귀기가 아주 어렵지만, 한 번 친교를 트고 나면 자신이 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해준다는 그의 설명이다.
이규형은 9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영화 기자였던 그의 부친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일본 문화와 접할 수 있었다. 일본의 대중문화를 보고 즐기면서 3년만 있다 올 생각이었는데 15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 문화가 개방되고 그는 한일 대중문화의 가교 같은 역할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원흉이라는 단어까지 쓰며, 그가 한국에 심어 놓은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의 저서 [일본을 보면 돈이 보인다]는 백만부가 팔렸다. 일본문화 개방에 대한 그의 주장이 대중들에게는 설득력 있었다는 반증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SBS 개국 때부터 일본 TV의 오락 프로그램을 접목시키는데 관여를 했고, 결국 공영방송인 KBS도 ENG 카메라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을 따라했다는 것이다. 요즘은 오히려 일본 사람들이 한국 TV를 보면서 재미있어 한다. [겨울연가]가 한국에서 떠 봤자 별로 돈 되지 않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인구 3배, 문화의 총량도 3배는 된다. 달력 하나 찍어도 개런티로 1억엔을 준다.
영화 [DMZ: 비무장지대]를 구상한 것은 78년 7월 입대해서 전방 비무장 지대 수색대원으로 근무할 때부터다. 제대한 후 황기성사단 등 여러 군데에 시놉시스를 이야기하면 군사정권 아래서 그런 소재를 어떻게 영화화할 수 있겠느냐고 다들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의 [JSA 공동경비구역]이 나왔다. 그 영화를 보고 이제는 때려 죽여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 2001년 9월 [호텔 코코넛]이란 이름으로 촬영 들어간 이 영화는 월드컵 공원이 되기 전의 난지도에서 비무장 지대 씬을 촬영했다. 분위기는 최적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펀딩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촬영이 중단되었고 주연배우 김래원 등이 교체된 뒤 지난해 촬영을 재개하여 올 여름까지 보충촬영을 했다. 그리고 메이킹 필름을 일본에 돌려서 결국 도에이 영화사가 투자를 결정하며 극장 개봉하게 되었다.
그는 [DMZ: 비무장 지대]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반드시 이 영화를 일본에서 개봉하겠다고, 그리고 일본인들을 적어도 3번은 웃게 만들고 3번 이상 울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일본에서 15년을 산 그의 자존심이었다. 지난 11월 9일, 일본에서 첫 시사를 한 결과 그는 일본 관객들의 눈에서 눈물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목에는 아직까지 군번줄이 매달려 있다. 영화 개봉할 때까지는 스스로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목에 군번줄을 차고 다닌다는 것이다. 공수 마크라도 하나 있는 힘든 부대에 들어가야 군대영화를 제대로 만들 것 같아서 그는 수색대에 자원했다. 그런데 수색대 들어간 며칠 후 지뢰밭을 걸어야 하는 임무가 떨어졌다.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런 장비 없이 계급이 낮은 순으로, 지뢰가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을 걸어 가야 한다. 그때의 공포, 그는 하늘에 기도를 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 주시면 좋은 군대 영화 만들게요, 하나님 이야기도 할게요. 그런데 무전병이 대인지뢰를 밟았다. 판초우의에 조각난 시신들을 담아 운반했다. 그는 이 친구들의 죽음이 헛된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일등병 오딧세이]다.
[인생에서 제일 힘든 게 나이를 먹는 거다. 후배들에게 치여 사라질 때 제일 비참하다. 영화만이 아니다. 40대의 눈물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감각이 있다면 나에게는 이제 인생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난 서른 살에 만든 영화가 흥행 1위를 했는데, 그때 당시를 생각해봐도, 나이 먹은 분들이 나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지금 대학생들의 말투를 그들이 어떻게 알아, 그랬지만 이제는 거꾸로 내가 그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없는 힘, 나에게는 살아온 인생이 있어, 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는 인생의 바닥까지 도달했다. 나는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느 날 월트 디즈니의 생애를 보니까, 인류가 발명한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인가. 그는 사랑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전쟁이라는 것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행위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싸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끝없이 공부해가면서 변해가는 저 테마를 풀어갈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의 폭이 넓어졌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야말로 내 영화의 가장 소중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