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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神 의 如呼!禪(여호선)
인간세계에서 구축된 진리안의 말씀중 여호아 선을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이해해야하는 당위성은 역사적인 사건을 진리로 펼친 이야기라 할 수 있읍니다.
그럼에도 성경말씀에 대한 시간적 장애요인이 없는 직관적 자각의 양태를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우리들은 이를 펼 수가 있고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가 극소수로 제한되거나 아예 불가능한 力事(역사) 인지도 모를 정도로
난해 한 면도 있읍니다.
성경말씀역시 이심전심이 되어져야 하기 때문애 인간과 통함인데.
이게 어려운 것이지요.
진리의 말씀이라 함은 항상 현실적 초점으로 기준하면 항상 괴리가 일어나는 사건이고
이해의 맥심원은 전체의 바운다인 물리적 공간 인 시간의 장애도 없는 십방의 범주를
한꺼번에 지침하여 진행 시키기 때문에 맨 처츰 성경말씀을 대하면 어리둥절하게 되어있읍니다.
보편적이며 일상적으로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단 할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여호선(如呼禪)와중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 같음이여! 진리의 총체적인 의지와 행적을 드러내는 순간의 감흥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자각하게되면 이미 회개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는 것을 반영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게되면 모든 세상이 전부 황금입니다. 이거 이해가 되겠읍니까?
돌배이도 황금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논 하면 아! 저넘 진짜 돌았다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아차다는 명제의 최고의 수단은 회개라는 뉘우침에서 문을 열게 됩니다.
뉘우치면 깨는 것입니다. 야훼신은 이것을 피조물이기도 한 인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구는 법칙으로 요구하는 것이지 절대 감정이나 정서로 호소하는 법이 없읍니다.
누구나 에게 적용해야 하는 불문률로서 정감의 불평등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하지 않읍니다.
이를 여호선이라 는 이름으로명명 할 수 있는 것이고
불교의 진리를 펴시는 부처님도 중생의 어리석음을 제도 하고자 하는 것 역시 진리안의 여래선을 이해해야 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래선이라 함은 같음이 오는 자리에 머물러 유지하는 이심전심의 십방의 확연한 물리적 과정을 함축한 사건을 포괄적으로 하여집중해서 한꺼번에 보는 관점이므로
이러한 물리적 시간 이해도는 여호아 선 도 똑 같이 작용하면서 펼쳐진 진리망원경이 성경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불교의 여래선과 그리스도 의 여호아 선 그 것이 비유하여 왜 서로 다르다라고 하는 것입니까?
다르다라는 명제도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이 불가피한 진리의 묘연한 행적들의 비교우위 놀음이라는 것에 휘둘리며 속고있는 인간세상들입니다 .. 간단하게 언급할 수 있다면 모르면서 비교하는 것 따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모르는데 모르는 데 무엇을 깨어나는 것인지 알리가 있겠읍니까?
결국 깨어나지 못햇다는 것을 말 합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절대 진리를 논 할 수 도 없읍니다.
단지 믿음으로 해결할 수 밖에는없읍니다.
그러므로 성인된 말씀에 대하여 오로지 믿는 것이 최고 입니다.
이를 이미 다 보고 아시는 성인께서는 "믿으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보더라도 모두 성인의 이름으로 돌려야 합니다.
이미 성인들께서 다 이룩한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성인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추구하고 이 말씀을 계속 함께하며 믿음을 지니는 자세...
이 뚜렷한 행위로서 역사는 증거 되는 것이므로 달리 구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어떤 도리도 없다 이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고 믿읍니까?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늘 나를 위하여 함께 하셨기에 믿는 것입니다.
성경과 함께 하게 되면 깨어남과 같은 맥락이 되기 때문에 늘 성경말씀과 함께하는 습관만 가지면 됩니다.
하루 십분간만이라도 그냥 한줄 읽으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물론 목사를 믿어야 하겠지만 성경말씀을 믿으십시요.,
이 세계는 온전한 진리인 성경 불경 코란경을 믿지 않고 그 예언자만 믿거나 성직자들만
믿다가 큰 코 다치는 역사를 계속 써내려 가고 있읍니다.
그들은 성직자이지만 믿을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성인의 말씀을 인도하는 가이드 이므로 중개인일 뿐입니다.
그대들은 중개인들 말 믿고 부동산을 매입하고 팝니까?
그냥 참고하고 이미 진리의 길목을 이해하고자 하시는 분들의 추천을 받는것이고
결국은 스스로 부동산을 다 보고 확인하며 객관적인 안목을 길러 부동산을 거래하듯이
성경말씀 불경의 가르침 코란경 베다경 등을 직접 대면하고 반복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게하는 방법은 자비심과 보리심 그리고 사랑함을 실천하는 행위의
공덕이 없거나 공양함이 없으면 절대 믿을 수 도 없고 진리안이 열리지도 않읍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전에 공양을 한다. 이는 수행자들이신 스님과 부처님 법을 모시는
분들에게 일정한 공양의 예의를 지키는 것도 공덕이지만
같이 만나는 일상의 사람끼리도 일상적인 공양을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산 부처님께 공양하는 여래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서로 공유하고자 하는 필연성의 태도! 이 자세는 분명 많은
행위소산의 결과치이거나 진리의 확산적인 개념을 행하는 것이고.
마음작용에 내재한 여래선 자리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복이 들어온다 이 말입니다.
진리를 논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아무리 최고의 경지에 올라간 자들이 논한다 하여도
논리로서 헤게모니를 논하는 것은 뜨악질 밖에는 아니됩니다.
바다물에서 물 한국자 떠 가지고 바다 전체를 논하는 것 밖에는 아니된다 이 말입니다.
바다는 이미 바다가 아닌시절인연이 주어져 있기때문에 본질적으로 틀린 이야기일 뿐입니다.
기름 한방울로 차를 타고 세계여행이가능한가 이 말입니다.
한 주먹의 물을 담고 집중하면 여래선이 보이고 여호선이 보일때가 있으니 이것을 주목하라 이 말입니다.
물만보고 그냥 비로서 한주먹 담은 물이 전체를 대변하는 안목으로는 불가하다 이 말입니다
물론 한 주먹에 쥔 물이 바다전체를 잡고 있는 것이 된다 라는 안목이 열리면 여호아 선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명제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비유하여 소개했읍니다.
단지 사고영역의 미흡성으로 논리를 전개 한다면 바다물을 시각적 이해도에 따라 물을 논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밖에는 아니될수도 온전할 수 도 있는 소식을 이해하는 수준이 여호아 선을 행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이 말이 됩니;다.
세례를 왜 물로 합니까?
아기 부처님께 왜 바가지로 물을 떠서 목욕시킵니까?
우리들은 왜 목욕합니까?
이 공통적인 행위의 소산점은 결국 물이지요.
왜 물로 신과 대면하는 기회를 지닌다음 신 앞에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알아차림이라 이름하지요.
진리를 대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사소한것 같은 세부적인 요인을 죄다 십방의 전체적인 아우라를 지니고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점은 이미 자기존재 로서만 생각을 낼 수 없는 한계치를 분명지니고 있읍니다.
이를 먼저 자각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차치하고
불교의 화엄경과 구약성경 신약성경, 코란경, 힌두경 당시 시대적 배경과 지형적 요인이 유사한 환경에서
드러난 진리의 의사표시는 동일한 명제를 구축하고 있읍니다, 이는 비교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능합니다.
여래선을 이해한다면 전체 무엇이든지 이해가 되고
여호아선을 이해한다면 전체 무엇이든지 이해가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진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짓말도 진리입니다, 죄도 진리에 속합니다. 회개해야 이해하게 되는과정만 남았고 단지 알아차림으로
해결되는 행위의 소산점은 여전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대 하는것은 물리적 시간대의 어떤 지점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하여 온존한 시각이라 할 수 있는
여호아 의 여호선을 전제 하지 않으면 부분적 소양으로서 전체를 그릇되게 하기 때문에 이해도가
난해하고 전혀 그 맥락을 잡지 못하게 되어있읍니다. 오히렬 불교경전보다 더 어려운 것이 성경말씀이십니다.
그럴 수 밖에는 없읍니다.
성경말씀은 비유하지 않읍니다, 그냥 직설이며 직관화 하여 단언하는 의사표시를 행 하시므로서
경외성을 더 많이 지니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야훼신의 말씀을 적은 성경은 무엇인가? 이 부분의 맥락을 이해하는 전제하에 올바른 해의가 되지
않더라도 이심전심으로 흐르게 된다시는 충격요법을 더 많이 행하신다 이 말입니다.
숭배라는 측면으로 보면 일정한 효과를 지닌다에 충분한 요소로 인간세계에 자리는 잡았읍니다.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녀야 존경을 받기 때문이지요.
여기에서
신이라는 개념은
절대신에 포괄되는 신 들의 입장으로 같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 여오하 선이 되고
부처님의 불성이라함도 신들의 시각적으로 펼치는 만상의 활동을 포괄하여 같음을 행하는 것이
여래선이므로 일체의 용어적 차이이지 본질의 차이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합니다.
신의 개념은 반드시 보이는 示(보일시) 가 펼쳐지는 만상의 소식과 모습을 신의 작용이라
지칭합니다 (神) 생명은 전부 신일 수 밖에는 없는 작용을 하는
생명을 근거한다 이 말입니다. 이를 전반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고로 인간도 신이 개연합니다. 함께 하고 있음인데 몰록 전체를
논하면 신이라는 이름자체도 없다는 것입니다, 공통적이며 보편적이기
때문이지요, 자기 아내를 부를때 항상 아내 아내 합니까? 그와 같읍니다.
이렇게 해야
늘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아멘-
말이라는 것, 생각을 내어 이해도를 추구하는 것으로는 시간적 제약을 받는 공간의 범주에서는 이를 몰록 포섭을
하기에는 불가능한 영역인데 이를테면
한 사건의 지점에 대하여 전체 십방을 아우르며 시간적 공간의 삼세지간 과거 현재 미래 세사건의
시간적 범위를 함께 동시에 나타내시는 성인된 말씀의 대한직관을 펴는 것들은 논리적으로 따라가기에는 이미 늦으며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간속에 살면서 공간을 잊고 이야기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모르는 것과 같은 상태에서 논하는 고기생명줄이 무엇인지 모르는 고기와 같은 논리만
지닌다 는 것과 같읍니다.
성경말씀을 이해해야할 까닭을 믿음으로 극복함에 있어 이러한 시행착오를 부단하게 가지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성경의 말씀이해역시 반복적 학습논리 밖에는 다른 제간이 없는 것입니다.
늘 함께 하시고...
그러므로" 믿으라" 입니다. 우선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지니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이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탄신하신 예수님께서 짧은 생애를 지니시는 가운데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기적이라함은 사실 인류 보편적인 사고와 인식 에 의존하는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가히 파격적이며 이를 행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사고로 목격할 수 없는 모순으로 보이기에 적합한 것 들입니다.
이 격차는 기적이든간에 많은 모순을 인간적 사고에 크게 충격파를 던지고는 하는데
진리의 분기점을 노출시키기도 하는 것이지만 온존한 이치로서 행간을 잡으신 말씀인 것을 , 역사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신약성서 마태복음 부터 시작되는 신약성경의 모든 소식을 이해할 수 가 없읍니다.여호아선으로 해의하지 않으면 해의가 분분하고 기독교의 구약성서부터 그 파가 갈라지고 이해도가 달라지므로서
분열의 양태를 겪게 되며 갈등과 혼란, 그리고 땅에서 넘어지면 그 넘어진 땅에서 다시 일어서라는 듯이
일련의 과정을 증거하시는 방편으로 나아가시는 맥락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됩니다.
유태민족은 사실 역사적으로 국가를 잃었으며 그 멸망한 국가의 터전을 다시 복원 하고 그 새로움을 위하여 극복하는 과정을
현재 겪으면서 진행중입니다, 이것이 성경말씀의 예언으로 다 나온다 이 말입니다.
구체적인 실증에 대하여 함게 지니고 간다는 의지의 표출을 여호아 선으로서 다 말씀하시는 중이다 이 말입니다.
성경의 출연의 소이연의 말씀의 본거지는 이스라엘입니다,
고로 이스라엘을 기준하여 성경말씀과 이스라엘 인과율에 대하여
항상 성령적으로 예언이 되고 계시가 이루어지면서 성인 말씀의 이치를 항상 증하는 모습으로
일관하여 역사한다 이 말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로서 모든 일체의 삶의 진리안을 비유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바로비터의
샘풀링이 이스라엘 역사를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우리는 관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서약의 역사흐름에 척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태인은 좀더 우뚝하고 조금은 더 보편적인 인류의 공존 앞에서 삐딱해져 있읍니다.
그것은 자만이다 이 말입니다. 자만은 자기 만족에 빠지므로 다른 것은 간과한다는 명사의
가장 위험한 용어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도 자만에 빠진지 오래 되었읍니다. 다시 원상태로 가야 합니다.
자만을 파괴하려면 파괴해야지요, 그냥 뭉개야 합니다.
이 뭉개는 작업이 어렵지요, 남들한테 많은 무시를 당해야 하고 장애지는 것을 만나야
철이 납니다. 여래선 여호아선은 그와 같음을 작용합니다.
도 는 마음의 작용점을 의미합니다, 작용에서 찾아내는 것이지요.
앉아서 공자왈 맹자왈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실행이지요.
여래선 여호아선은 마냥 작용을 행하기 때문에 이치가 그러합니다.
이를 알아차리기에는 고난을 맞이한 연휴에나 아니면 반복 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난 후에도
모르는 인간 스스로 파 놓은 지식의 교만감 으로 인해 어리석어졌기 때문입니다.
고로 인간을 가장 어리석다 성인들께서 전제하신후에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넘어진 곳에서 손을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본질적인 가치와 이치 그리고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족적을 남기신 것을 볼때
그 기준점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님은 과연 무엇인가. 왜 하나님 독생자로서 출현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하여
이 역시 이해하고 까닭을 확고하게 여민후에 성경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언적으로 나름 이해하건데
예수님께서는 여호(如呼) 禪(선) 으로 성령을 행하신 구세주 이십니다.
이는
구약성서의 여호아의 창세기 부터 창세기의 성령으로 창조한 이 세계에서
백성들이 여호아의 禪(선) 으로 집약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O 의 운동을
백성들이 배반한 이래
이를 성령으로 계속 백성들의 부패한 삶을 뒤집어 버리십니다.
뒤집는 다는 것은 O 으로 성령을 여호아께서는 시간적 장애에 걸리시지 않으므로 임의로 백성들이 모르시게
은밀하게 행하시는 것이며, 이를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성령의 이치로 주관하신다 이 말씀입니다.
그 O 을 행하심이니 그 본연의 여호아 의 로드쉽은 정직함을 뿌리에 두시고 성령의 법으로 행하시는
것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백성의 삶을 멸망하려는 의지를 보이신 야훼 의 입장으로 보신다면
그만큼 인간들과 생명들이 타락을 심화하게 저질 렀다는 반증을 이해하고 성경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은 구약의 야훼이신 하나님은 질투의 신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해석이 크게 오바 한 것입니다.
모든 삶의 작용과 의지는 인간들의 몫입니다. 그 작용하는 만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야훼는
여호선 으로 그 것을 비추어줄 따름입니다.
죄지으면 죄 를 돌려주시는 여호선으로 행하셔 비추어주고
복지으면 복을 그만큼 돌려주시는 여호선으로 행하시어 비추어줄 따름이지
주) 하나님께서는 항상 반작용만 하지 작용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읍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상주하시며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보고 아는 자리에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질투의 신이라고 푸념하는 논리는 정녕 아니고 너무 엇나간 어리석은 오해로서 왜곡만 쌓아놓은 해석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겁을 주지 않읍니다.
단지 쉽게 말하자면 몽둥이로 부패한 행위에 대하여는 뒤집어 그 몽둥이를 멸망시켜야 함에
그 몽둥이를 없애고자하는 큰 몽둥이로 상계하여 같음의 서비스 용도에 적합하게 같은 몽둥이를 가하여 제로로 O 작용을 행해야 하는 이치로서 작용한 몽둥이 를 원상태로 없앤다는 것을 말 합니다.
겁준게 아니지요. 겁을 먹는것은 스스로 몽둥이를 작용시킨 당사자가 발생시킨 것이지요. 그와 같읍니다
하나님게서 지으시고 만드신 자식같은 생명들에게 철퇴를 가하는 것은 불가피한 자식의 잘못이니
이를 거슬러 비추어주어야 했고, 그 죄를지은 자식을 인도하시고 제도하시려고 늘 계시를 하고
미리 알려주지만 이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늘 아파하시는 것을 부모가 자식의
탈선을 근심하는 것과 같음으로 스스로 성령되어 이행하는 것이 마음 아픔으로 비유 할 수 있음과 같읍니다.
창세기를 보게되면 왜 인간들은 부패하였는가에 대하여 나오는 구절이 있읍니다.
창세기 1장 28,29,30,31절
28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읍니다.
(복이라 함은 하늘아래 땅과 땅을 기르고 먹을 양식을 주신 것을 복이라 합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워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29절
또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땅 위의 온 갖 씨 맺는 식물과 씨가 든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그러니 너희는 그것들을 너의 "양식"으로 삼아라.
30절
또 땅의 온갖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명 있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푸른 식물을 먹이로 준다" 그러자 그렇게 되었읍니다.
31절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매우 좋았읍니다.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되니, 이 날이 여섯째 날이였읍니다
백성들은 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여섯째 날의 창세기 1장의 30절 처럼 땅의 온갖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위를 기어다니는모든 생명있는 모든 것에게 내가 "른 식물"을 먹이로 준다 하셨읍니다.
이 세상에 천지때깔로 주어진 녹조류의 푸른 식물 과 나무는 전부 모든 생명들이 먹으면 평화하고
순수하고 정서가 고요하고 여호선 의 성령의 이치대로 따르는 것이나 평화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녹조류 는 바로 중성이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의 가장 주된 계율인 것입니다.
푸른 초식녹조류를 취하지 않고 다른 것을 취함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를 어긴것이지요.
인류의 불을 발견하고 움직이는 짐승의 피를 취한 사실은 천지창조를 어긴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서 난폭해지기 시작했고 잔인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짐승들을 잡아먹으면서 짐승과 가축의 피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까닭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피를 취할 수 록 광폭하고 거칠며 죽임을 습관화 하고 힘과 힘의 불길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일으켜세우는
욕심만 가득하면 온 세계를 혼란과 갈등 구덩이로 끌고 간 것입니다.
다시 소개하건데
빛의 종류는 칠보이고 칠색입니다. 이를 색계라 하고 모습있고 형상이있으며 몸을 받아지니며 생명유지하는 최고의 만물을 다스리는 영장이 인간일 진데.
빨주노초파남보 의 색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오로지 초록색의 식물만이 먹이로
취하라 하신 연유는 창조하신 생명의 순수하며 삶의 부작용이 없는 녹조류만 음식으로
취하게 한 것을 배반한 것을 인간의 타락의 시작이라 한 것입니다..
땅위에 소식처 녹조류 가 중도(中道) 이며 자기장의 영향을 받지 앉는 것입니다.
녹조류만 취하고 생명번식 발전 문명의 확립등을 전개한다면 늘 평화를 전제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이것을 망각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길에 솟은 인간의 정서를 여호아 이신 하나님은 물로서 이를 상계하는 방법으로 행하십니다, 이를 노아의 방주라 이름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무지걔를 노아에게 보이십니다.
빛은 휘어지고 칠색의 천지 창조를 하신 원인을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녹조류의 초록 빛은 중간에 자리잡고 있읍니다.
성경에서 나오지 않읍니까?
입에 피칠을 해서도 아니되며 오로지 녹조류를 음식의 전부로 취하고 이를 해결하는 시점에서
인간의 멸망은 아니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창세기의 전반적인 소식을 펼쳐 놓은 귀중한 말씀인 것입니다.
창조 6 일 되는 모든 것을 어긴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를 본 인간에 의하여 동물들은 스스로 경계하고 돌아다니면 항거나는 잔인성에
스스로 정신이 다른 생명을 잡아먹어야 하는 그러한 디엔에로 점차 진화 되어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훼이신 하나님은 인간들 대부분을 멸하심에 물로서 멸하십니다.
불을 일으킴에 이를 악용하고 정신이 불길에 사로잡혔으니 반연하여 물로 생명을 끄는
여호 선 을 행하신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은 이러한 돌이킴의 성령운동을 전혀 인식치 못하고 무지하여
6 일의 6 에 걸려 습관화 되고 점점 어리석어 무명에 쌓여 갔던 것입니다.
고로 구약성서는 대단히 험난하고 엄정하며 세상의 삶의 질과 그 양태를 뒤집어 버리게
됩니다, 청정한 O 의 반연함으로 빛을 비추어 상계 해야 성령의 법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도 항상 물리적 공간과 시간에서 시간의 장애를 받지 않는 직관을
가지고 바로 선명하게 성령을 보아야 하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으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란 6 을 거슬린 그 모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존한 O 을 보지 못하고
반경만 보고 판단하는 습관에서 비롯한 어리석음을 범하였기 때문에 온존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아 선을 이해한다는 것은 6 을 벗어나는 길이며 6 을 어기지 않는 전제를
가지면 됩니다.
모세의 십계중 맨처음이" 살아있는 생명을 해 하지 말라" 입니다.
먹자고 다른 생명을 해 해서는 아니되는 것이 6 을지키는 일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온존한 계시를 이행하고 믿은 다윗은 나라를 건설한 것이고
죽어서는 시온 산에 묻힌 것입니다, 시온이라 함은 지금도 흘어진 유대민족을
다시 모우고자 하는 의지로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산으로서 온전한 O 의 기운이
감도는 표상이 되어지고 깃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왜 이러한 글을 소개하는가?
앞으로 화엄경 6,7,권 과 주역을 소개할때 성경의 말씀과 함께 소개하면서
공부와 이해에 주력하기 위한 기본적인 성경말씀을 이해가 쉽도록 하기 위한 바램의
글인 것입니다.
화엄경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성경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길목을 열어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은 아주 구체적이며 현실적입니다, 단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루는 시간적 장애를
느끼지 않는 직관의 상태에서 집중하게 되면 무엇 도 다 셩령의 말씀이 보인다 이 말입니다.
같은 구약성서의 후손이기도 한 마호멧트의 예언자가 직관으로 편찬한 코라경을 보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행하는 것을 코란경이라 하거니와 구약성서에 충실한 역시 여호선(如呼禪)을 의미합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 말씀처럼 신약의 예수님 말씀도 역시 여호선 으로 모든 말씀을
하시고 예언하시고 계시하시고 사도바울 역시 여호선으로 직관하여 성경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러한 대의를 어느정도 이해하면 성경말씀을 소개하여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사실 진리의 이야기는 어렵습니다만 이것을 가장 쉽게 간단하게 이해가 된다면
종교는 통일 됩니다, 이것이 어렵다 이 말입니다. 인류의 고난도의 복잡한 습관으로
문화가 굳어져 있어서 그러합니다.
제가 이러한 목적이 있는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렇게 이해하셔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오로지 공부를 위함입니다.
구약 창세기의 제 6일의 6에 걸렸다 하는 것으로서 성경말씀은 전개된다는 것을
꼭 이해해야 합니다. 6에 걸린것을 예수께서는 6,6,6 에 걸렸다 하셨읍니다.
성령은 삼위일체론입니다, 삼위일체론이므로 6 의 3 개로서 비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6 이라함은 결국 피를 취하지 말라하심에도 이를 어기고 나타나는 인과율을 말합니다..
짐승을 전부 정복하고 다스림에 그쳐야 하지 잡아먹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을 발견한 인간의 잔인성이 내포되어 진화하면서 입에 피츨을 하면서 문명을 세웠음인데
그러므로 갈등과 혼란 그리고 끝내 말세를 성인된 분들께서 예언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동양적으로는 개벽이 온다 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읍니다.
신약성서의 예수님 출현을 예언하신분은 하나님께서 B/C 745년-680 년사이
구약 아사야 본서 66 장는 성경을 축소한 것과 같을 정도로 일부분인데
39 장은 회개하고 하나님게 돌아오기를 거부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는 구약내용과 비슷하고 뒷 부분 27 장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에 초점이
모아진 신약의 내용과 (예수님 출현) 유사한 성경말씀입니다.
예언서 입니다.
이를 일단 보기로 합니다.
예수님의 출현이 구약성서에 이미 예언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아사야 (하나님께서 아사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다)<그러므로 아사야는 예언자입니다>
1장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왕 웃시아의 요담과 하하스와 히스가야 시대에 본 환상입니다.
하나님게서 이사야에게 유다와 에루살램에 일어날 일을 보여주셨읍니다.
(예수를 배반한 예수의 제자 12 인중 한사람)
하느님게서 이스라엘을 꾸짓으시다.
2절
하늘이여 , 들어라, (하나님이지 하느님, 하늘님이 아닙니다)
땅이여 귀를 기울여라,
여호화께서 말씀하신다.(불교의 부처님이시라면 여래께서 말씀하신다가 됩니다)
"내가 내자녀를 키우고 길렀으나 그들이 나를 배반했다"
(창조 6 일째를 배반하고 속였다)
3절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의 여물통을 알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창조 6일째 인 녹조류만 먹으라는 여물통을 주었는데 이를 어겼다는 말씀)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구나 ( 깨어있지 못하고 온존한 성령을 보지 못하는 도다,
지 밥그릇도 올바르고 취하지 못하고 피해를 주는 구나)
4절.
죄를 지은민족 ,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닥친다. 이 백성은 허물이 가득하다
그들은 몹쓸 짓을 하는 자녀요 악으로 가득한 자식들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저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하나님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창조 6 일째를 어겼다는것인데 6이세계를 (삼신)를 펼치고 이것만 백성이 보니 6,6,6 은 180 도 입니다., 이를 "반시원본"(反示圓本)이라 합니다.
"반연하여 원의 본래를 당해야 한다 " 입니다. 6의 삼세을 행했기때문에 180 반경만 보았으니 온존한 성령의 성령이치가
나머지 반을 거슬로 돌려준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360 을 행하는 성령이다 하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반의 행적이 O 의 이치 마져 어겼으므로 그 당사자 이스라엘은 재앙이 오는 것인데 그 연유는 성령의 온존함을 보지 못하고
깨지지 못하여 몸씁짓을 하는 자녀이고 악으로 가득한 자식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6,6,6의 특징은 자기 생각으로 자기 존재를 세우고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행위를 하는 어리석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돌이켜 성령을 행할 수 밖에 없는 경고의 말씀을 여호화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아 선을 행하는 자 로서 알아차린 인간으로서 직관이 열린 것이지요.
결국 이슬람의 코란경을 직관한 마호메트를 예언자라 함인데 그와 같음의 이사야도 직관하여 하나님 말씀을
옮겨 전한다 이 말입니다)
5절
어찌하여 너희가 맞을 짖만 하느냐? 어찌하여 자꾸 하나님을 배반하느냐?
너희 머리는 상했고, 마음도 병들었구나.
참고) 모세의 10 계율에서 단연 맨 처음 산 생명을 죽이지 말라 를 어겼으니
생명에 대하여 죽임을 행하였음이니 죽임으로 돌려 주어야 하니 죽임을 당해야만
온존한 성령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10계를 모세에게 내렸는데 그 말씀을
지키지 못했으니 배반입니다. 그러면 배반을 당해야지요. 배반한만큼 배반을 당해야 하므로
상계되어 청정한 본래의 성령과 함게하심을 유지할 수 있는 피조물로서 인정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 배반을 하였으니 하느님 심정이 있다면 기가맥히다 라는 의미입니다.
머리가 온존하지 못하니 머리가 상한것이고 마음도 온존하지 못하고 반만 가동하는 육신을
유지하니 병이 아닙니까? 벙이 걸리면 비실 비실 한 것과 매 한가지 입니다.
다음시간에 계속 소개 하겠읍니다. 불자 도반님도 이를 공부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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