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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교회소식1933 원문보기 글쓴이: 노들강변
예수교회의 예수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교회는 1933년 교회의자립, 신학의 자주,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여 한국인들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예수교회의 가르침과 역사를 연구하여 예수교회를 홍보하고
나아가서 예수교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카페가 되겠습니다
<예수교회소식1933 카페 대문에 있는 카페 안내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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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교회는 이러한 교회입니다].
1. 1933년 1월 3일 함경남도 원산부 광석동에 모인 성도들이 새벽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입류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이름
예수+교회의 창설 신령 역사가 일어난 그 날 새벽의 예배를
예수교회의 출발로 인정하는 교인들의 모임입니다.
*예수교회의 첫 시작을 언제로 보는가에 대한 역사적 논의입니다.
한국기독교사를 하는 학자들이나 이용도 연구자들은
예수교회의 출발을 1933년 3월 6월 8월 겨울을 주장합니다.
*이렇게 창립일이 언제인가를 규명하려고 연구할 정도면
이용도 목사의 생애와 예수교회의 설립 과정을 공부한 분들일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이렇게 이용도 목사와 예수교회의 설립 과정을 공부한 학자들이 몇 사람이
있을까?
우리 예수교회인들은 1933년 1월 3일 새벽 3시에 원산부 광석동 백남주 선생-
당시 원산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원 교수-의 집에 모인 새벽 예배가 첫 예배라고 합니다.
1월 3일에 대한 부인 내지는 외면, 무시는 왜 나오는 것인가
그 때 그 사실을 모르는 분들 무관심한 분들은 여기서 논외로 하고..
고의로 외면하거나 부인하고 무시하는 이들은 왜 그럴까?..
1월 3일 새벽예배에서 일어난 신령역사에 대하여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 은사. 계시의 연속이냐 중단이냐/ 이사와 표적이 현재에도 나타나느냐 아니냐 하는
교리적 판단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예수교회는 그 영이 주님의 臨在 안에 들어가 성령의 入流를 받은 신도들의 입을 통하여
(그의 육체적 감각은 정지되고 단지 음성 기관을 사용하여)
指名한 교회 이름이고 설립을 指示하신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성서적이고 신앙적이고
교리적으로도 가장 명확하고 純正하고 崇高한 교회 이름입니다.
따라서 우리 예수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예수교회 창립에 참여한 교역자와 평신도들을
성서 밖 別 默示를 인정한다. 성서의 신령성 완전한 계시성을 의심 내지
부정하는 자들이라고 하여 이단이라고 한 것입니다.
2. 예수교회는 1933년 6월 6일부터 8일까지 평안남도 평양부 신양리에서 116명이 참석 하여
이용도 목사를 포교 관리자 宣道監으로 선출한 창립 공의회를
예수교회의 첫 공의회로 인정하는 교인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은 1 항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수교회의 창립에 대한 여러 설이 있는데.
.
1933년 3월 설은 예수교회 평양예배당의 창립
(1933년 3월 21일 개천식)을 교회의 출발로 생각하는 것이고 .
6월 설은 창립공의회 일자를 창립일로 보는 것이고..
8월 설은 이용도 목사가 원산으로 간 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교회는 33년 6월 6일-8일 평안남도 평양부 신양리
십자상회 2층에서 116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공의회를 열어
이용도 목사를 예수교회 포교 관리자 선도감으로 선출하여 교단으로 출발하였습니다
.
창립 공의회 후 송태 대보산 별장에서 요양하던
7월 25일 이용도 목사 평양 행 버스 부인과 동승
간도에서 이용도 목사를 만나러 송태 행 버스를 탄 이호빈 목사를 길에서 서로 만나
이호빈 목사가 이용도 목사 부부가 탄 평양 행 버스로 갈아타고
신행상회에서 일박,
26일 서울 행, 현저동 집에 가서 여름 방학으로 집에서 쉬고 있는 아들
이영철을 데리고 서울 역 근처 여관에서 일박
27일 원산 행, 동행하는 송봉애 씨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남편에게 권하여 삼방 역에 내려
아는 교인 집에서 며칠 쉬다가 8월 1일 원산에 도착한 것입니다.
8월 1일을 장로교에서 이단으로 정죄 당하고
감리교에서 면직 당하고 병 들고 고단한 신세가 되어 원산을 찾아 온 無籍 牧師
이용도 씨를 원산 여선지파에서 받아 들였다는 설은 사실이 아닙니다
원산 여선지파는 존재하지 않고 이용도 선도감이 원산에 간 8월 1일에
원산부 덕원군 문천군 영흥군에서 교회 개천식을 준비하는 교역자 교인들이
이용도 선도감을 맞이한 것입니다.(유명화 씨가 원산파의 지도자 여선지자가 아닙니다)
한편 평양 예배당은 회중교회에서 나와 평양부 죽전리에 임시 예배처를 구하여
이호빈 목사 담임으로 집회 계속(이종현 한의정 여복음사)
33년
4월 30일 안주군 안주읍 칠성리 안주 예배당(복음사- 김희학 주선행 女)
6월 6일 평원군 검산면 송양리 동촌 예배당(복음사 -오인규 전치수 女)
8월 17일 해주군 해주읍 광석리 해주 예배당(복음사- 진하용 양명덕 女)
*진하용 복음사는 함남 영흥군 전 장로교 전도사로 8월 황해도 해주 예배당 복음사
이용도 백남주 두 분이 지시 지휘하여 교회들이 개척한 것이 아니고
평양 안주 평원 해주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교회가 성립된 것입니다.
겨울 설은 이용도 死後 정확하게는 11월 1일 중앙선도원의 공식 업무 시작한 날..
그 때 설립선포식을 하여서 그 날을 잡은 것이라 봅니다.
또는 이용도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백남주 목사가 평양의 이조근 이종현 등을 설득하여 예수교회를 세우고
그가 배후 조종자 역할을 하였다는 설과 유관합니다 이 설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종현 이조근 두 분은 32년 11월 초 평양 기도단 집회 주동자입니다.
처음 모인 장소가
이종현 씨가 경영하는 신행상회라는 건어물 가게(기도단 임시 집회장오로 사용)
그런데 산정현 장로교회 당회원들이 와서 집회 중지를 요구하여
장별리 이조근 집사의 집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용도 목사 백남주 선생의 추천으로
평양에 와 집회를 인도한 강사가 한준명 조사=전도사.
이 집회를 降神 이단 집회로 본 평양노회가 11월 28일 임시 노회를 열어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을 조회
12월 14일 <기독신보> 평양기도단 원산여선지파 황국주 일파 무교회주의자를
이세벨의 무리라고 지목하여 비판
12월 19일 감리교 경성 교역자회 이용도 사문회 이용도 목사 사임원 제출
일단 보류(내년 3월 중부 연회에서 논의하기로 결정한 것 같음)
1933년 1월 3일 원산 새벽 예배에 참석한 이종현 이조근 집사들이 평양에 돌아가
2월 기성 회중 기독교회 예배당을 빌려 이용도 목사 강사로 시작한 것입니다.
3월 21일 회중 기독교회 예배당에서 예수교회 평양 예배당 개천식
(담임 이용도 목사 한의정 복음사 내정)
이종현 복음사는 33년 5월 중순 서울 조선 총독부 사회과에 가서
교회 설립에 관하여 총독부 관리에게 진술,
6월 3일 평양부 대찰리를 주소로 하여(*이용도 목사가 이사하여 사는 집 주소인 듯)
예수교회 창립 선언 작성 / 창립 발기인은 이용도 백남주 이종현 3인
*예수교회 신전과 창립 선언은 1933년 6월 3일 작성하여 창립 공의회에서
인준을 받았다고 봅니다. 작성자는 백남주 선생
평양 이종현 이조근 두 분은 예수교회 창립의 준비 집회라 할 수 있는
평양 기도단 집회 주동자로 교회 당회에서 출교 특히 평양 기도단 집회에서
이조근 집사의 부인 이유신 집사는 성령의 입류를 받아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 집회 주동자 이종현 이조근 김지영 집사는 출석 교회 당회에서 출교 당하고
예수교회 창립에 참여합니다]
백남주 씨는 1933년 9월 9일 새벽 3시 이용도 목사 집례
예수교회 원산 예배당 담임 목사 임직식. 오전 9시에는 원산부 광석동에
원산 예배당 개천식을 하고 원산 신학산 수도감에 취임하였습니다.
10월 2일 이용도 목사가 병으로 원산에서 별세 10월 5일
임시공의회를 열어 이호빈 목사를 선도감으로 선출
장례식에 참석한 원산 덕원 문천 영흥의 교역자 교인 외에
평양 예배당 담임 이호빈 목사 이종현 복음사 안주 예배당 김희학 복음사 참석
백남주 목사는 이종현 이조근 씨들과 동지입니다
누가 누구를 조종하고 지휘를 하였다는 말인가?
*예수교회 창립일이 언제인가 하는 논의는
80년대 공의회에서 영인 발행한 <예수> 지 이후에 나온 것입니다.
운영자처럼 예수교회의 창립 과정을 시간 순서에 맞춰 조사하고
증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일은 타 교파 교단 학자들이 할 분야가 아니고
우리 예수교회 예수인의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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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교회 창립 과정을 다시 요약 설명합니다
예수교회는 1932년 10월 이용도 평양 금족령 이후 분립-형성-창립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32년 11월 초 첫주간에..평양노회의 이용도 금족령과 기도단 해산 압박에 저항하여
기도단 특별집회를 연 장본인들입니다..
원산의 한준명 전도사가 이용도 백남주 두 분의 추천을 받아
평양에 와 기도단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그 집회에서 대언 예언 방언 치유 등 은사가 풍성하였습니다.
산정현 교회 당회원들이 와서 그 집회를 해산하라고 종용하고 강권하여
닷새 정도 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降神劇 3일``은 한준명 전도사가 평양에 와서 일어난 것을 3일간이라고 봅니다.
[*30일 동안 집회를 하였다는 글도 있는데
3일을 누군가 잘못 인용하여 한 달 30일 간 강신 행사를하였다는 오보를 한 것이고...
한준명 전도사가 유명화 씨를 대동하고 평양에 갔다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 집회로 말미암아 11월 28일 평양노회가 이용도 한준명 백남주를 조회하기로 결정하고..
이어 12월 중순에 <기독신보>가 평양기도단과 원산여선지파를 이세벨의 무리라고 공격하였습니다.
(황국주 일파와 무교회주의자들도 비판 대상 이세밸이 여자인 것을 감안하면 기독신보의
공격 대상은 원산 여선지파와 평양 기도단. 그 사설에 실명으로 나온 인물은 이용도 한준명 황국주).
이종현 이조근 두 분이 원산에 가서 1933년 1월 3일 첫 집회에 참석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상의하여
2월 초부터 회중기독교회 예배당을 빌려 창립 준비 부흥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첫 강사-이용도 목사)
2월 중순 이용도 목사의 안주 집회가 교회의 제지와 방해를 받으며
추진자들이 강행하여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참석자들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부흥회를 준비한 김희학 주선행 김용진 최병수 등이 책벌을 받았고
안주노회는 이용도 한준명 백남주 황국주 유명화 등을 이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안주군 안주읍 칠성리에 4월 30일 예수교회 안주예배당 개천식 거행).
그리고 그 다음달 33년 3월 21일 춘분날에 서문통 기성 회중기독교회에서
평양예배당의 개천식을 열었습니다[담임 목사 이용도 복음사 한의정 내정].
3월 이용도 목사는 서울 집에서 병석에 누워있었고..
감리교 중부연회는 이용도를 휴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4월에 이용도 목사가 원산으로 갔습니다.
평양 안주 원산 지역 예수교회 창립을 준비하는 수백 명 교인들이 이용도 목사를
선도감으로 추대하는 연판장을 보냈습니다.
5월에 이종현 씨가 조선총독부에 가서 교회 설립에 대하여 진술하였습니다.
(이용도 명의로 교회 설립 관련 서류 총독부에 제출하여
총독부에서 이종현 복음사를 오라고 한 것)
이용도 목사 부부 평양 대찰리로 이사.
6월 3일 예수교회 창립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용도 백남주 이종현 발기인 대표 3인 이름으로)
6월 6일-8일 평양부 신양리 십자상회 (김지영 집사의 상점 2층)에서 창립공의회가 열려
이용도 목사를 포교 관리자 선도감으로 선출하였습니다..
(6월 6일 평원군 검산면 송양리 동촌예배당 개천식-오인규 전치수 )
*이용도 목사는 예수교회 포교 책임자가 되자 조선 감리회 총리원에
감리교회 목사 사임원을 제출 7월 10일 양주삼 총리사 명의로 퇴회 처리
이렇게 역사적 文證과 당시 교회 창립에 참여한 분들의 證言이 뚜렷한데도......
아직도..이용도를 無籍 목사 교계에서 쫓겨나 방황하는 불쌍한 목사로 인식하여...
1933년 8월 1일 원산 입류접신파와 접촉하여 그에 합류하였다는 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원산에 입류접신파= 여선지파는 없습니다. 유명화 씨를 여교주라고 보는 것인가?
있다면..함경남도 원산부 덕원군 문천군 영흥군 등지에서
예수교회로 모이며 개천식을 준비하는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이용도 선도감을 환영한 것입니다.
(6월 창립 공의회 8월 총독부에 포교계 제출, 대표자는 이용도 목사)
3. 예수교회는 예수교회의 창립 선언과 예수교회의 信典 그리고 生命歌에 나타난
역사 의식과 교리와 믿음을 이어받아 후세에 전하는 교인들의 모임입니다
*예수교회의 정신을 보여주는 문서들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소중합니다.
그것을 잘 연구하여 그 정신을 알려야겠습니다.
a] 창립선언은 萬有와 사회와 교회와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攝理主는
우리의 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闡明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류 사회의 창조주이심과 동시에 구원의 섭리주이신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창립선언은 유물론적 세계관 과학기술 문명 물질주의 국가 권력주의적 가치관에 반대합니다.
역사의 主宰者는 바로 주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창립 선언에 나온 교회관은 교회는 하나다 라는 한 교회관입니다.
그러면서 종파와 교단의 존재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희망하며
예수의 예수에 의한 예수를 위한 예수를 향한 예수와 하나되는...새롭게 되는 교회관을 표명합니다.
b]예수교회신전에 나타난 특징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 신관을 인정하면서
그 삼위일체신관의 중심=핵심은 바로 예수라는 점을 明示합니다.
예수의 오심과 사심과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과 영원히 살아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글이 예수교회 신전입니다.
c] 생명가=생명의 길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예수께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지옥을 이기시고 살아나시어
인간을 속량하신 그 구원의 역사를 10절 가사로 찬양합니다.
d] 예수교회 초창기에 신앙고백 중 유명한 것은 생명이요 사랑이며 하나님이신 예수라는 고백입니다.
4. 1933년 9월 9일 함경남도 원산부 광석동에서 문을 연 예수교회 원산 신학산에서
수도생들을 교육한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저술이 제시한 새예루살렘과 그 천국적 교리]를
기본 교리로 수용하는 교인들의 모임입니다.
*신학산은 원산부 광석동에 설립되었습니다 원산예배당과 한 건물을 사용..
신학산의 수도감은 백남주 목사. 교수진은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 3인..
수도생은 남자 5인 여자 6인이었습니다. 신학 공부와 기도와 노동을 하는 수도원식 신학원입니다.
이 신학원에서 가르친 신학이 스베덴보리의 새예루살렘과 그 천상적 교리라고 봅니다.
그런 까닭에 장로교인들이 신학산을 이단 사설을 가르친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특히 .성서 밖 별묵시를 인정한다. 계시의 연속 이사와 표적을 주장한다....
*이사와 표적은 신약시대 이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신비주의는 교회에서 이단시되는데
저들은 가짜 예언을 예수의 말씀이다 명령이다 주장하며 그것을 내세워 교회를 세웠다
*장로교인 김인서 장로가 발행하고 글을 쓰는 <신앙생활>지는 개인의 글이지만
그것이 장로교의 노선에 충실하게 따른 것입니다.
그 기준으로 볼 때 예수교회의 교리- 신론 기독론 성령론 삼위일체론 성서론 계시론 속죄론
재림론 내세론 구원론 등 기독교 전반적 교리와 다른 이단이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교회와 스베덴보리 신학의 관계도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부인하고 외면하려고 언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임마누엘 스베덴보리 신학을 지지한다 좋아한다고 하면
이단이라는 소리 들으니까 그런가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서와 그 사상은 1931년에 한국에 스즈키 다이세츠가 번역한
<천계와 지옥> <신지와 신애> <신려론>을 한준명 백남주 박승걸
그리고 33년 봄 원산으로 온 박계주 들이 열심히 읽었습니다.
1933년 이래 현재에도 원산여선지파= 신학산파와 연루되었다고 하면
신령파다 직통계시파다 하여 이단시되어
한국 개신교계에서 멸시 천대받는다고 겁을 먹은 것이 아닐까요?...
교회 관련 일을 하려는데 예수교회와 같은 작은 교파 이단 교회에 속하였다고 하면
불리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무엇이 창피하고 두려워 뒤에 숨는 것입니까..
이제 당당하게 의연하게 나갑시다..
2003.1. 3 예수교회 창립 70 주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