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중인 Tu-95
지난 2013년 7월 15일, 2기의 러시아 군용기가 동해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까지 왔다가 우리 공군기의 요격을 받고 되돌아갔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그러면서 해당 기체가 정찰기인지 폭격기인지의 여부를 놓고 당국과 언론사 간에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은 러시아의 심각한 군사적 도발로 생각하였지만 사실 그리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방공식별구역은 영공 외곽에 설치한 가상의 선이다. 유사시 안보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곳에 진입한 외국기에 퇴각을 요청하거나 경우에 따라 격추하겠다고 선포한 것이지만 영공이 아니므로 누구나 드나들 수는 있다. 따라서 러시아 군용기의 접근이 국제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고 또한 적대적인 행위를 보이지도 않아 경계만 유지하다가 상황이 종료되었다.
물론 영공 근처에 외국의 군용기가 예고도 없이 접근하는 것이 반가울 리 없다. 하지만 영공이 아닌 곳에서의 행동을 일일이 막을 수도 없으니 대응을 철저히 하여 만일의 위험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위의 사례도 사실 처음이 아니라 연례적이라 할 만큼 구 소련 당시부터 벌여왔던 일상적인 행동이었고 우리는 그때마다 적절하게 대응하여 왔다. 따라서 이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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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캐나다 방공 구역에 등장한 Tu-95MS를 요격하는 캐나다 공군의 CF-18. 세월에 따라 요격기가 바뀔 만큼 Tu-95는 장기간 일선에서 활동 중이다.
그런데 요격을 나간 우리의 전투기는 F-5, F-4, F-16, F-15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꾸준히 변해왔지만 툭하면 한반도 인근에 나타나 우리를 긴장시킨 소련-러시아의 군용기는 거의 매번 같았다. 주인공이 소련 최초로 대륙 간을 횡단 비행하여 핵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전략폭격기인 투폴레프(Tupolev) Tu-95인데, 탄생 이후 무려 60여 년 가까이 일선에서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더 강한 무기를 요구한 독재자
제2차 대전이 끝났을 때 가장 참혹한 피해를 입은 나라는 승전국인 소련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직접 사망한 사람만도 2,000만 명이 넘었고 물적 피해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쟁 말기부터 강력하고 새로운 무기에 대한 스탈린의 관심은 컸는데, 특히 서방측과 기술적 격차가 컸던 항공 무기가 그러하였다. 경우에 따라 이러한 관심과 독촉이 지나쳐 개발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후퇴익 구조와 특징적인 2중반전 프로펠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소련의 개발자들이 조속히 새로운 항공 무기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모방이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 개발하다 종전으로 제작이 중단 된 Ta-183이 유명한 MiG-15의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소련 최초의 전략폭격기인 Tu-4에 비하면 이것도 약과라 할 수 있다. 기술력이 부족하여 고민하던 차에 B-29가 우연히 굴러 들어오자 나사못 하나까지 복제하여 그대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미국은 B-29를 소련 인근에 위치한 동맹국에 배치하면 소련을 타격할 수 있지만 소련은 복제품인 Tu-4로 미국 본토를 때릴 수 없었다. 더구나 미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B-36처럼 미국 본토에서 발진하여 소련 중심부를 폭격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폭격기의 배치를 눈앞에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스탈린은 Tu-4의 배치가 이제 막 이루어지던 1950년에 새로운 폭격기의 개발을 직접 명령하였다.
러시아 공군 소속의 Tu-95
스탈린의 명령은 간단명료하였다. 핵폭탄을 탑재하고 소련 본토에서 발진하여 미국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고속의 장거리 폭격기였다. 원래 과학 기술에 대한 기반이 튼튼했던 소련에게 지난 B-29의 복제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Tu-4 제작 중 시행착오를 거치며 습득한 수많은 기술을 바탕으로 투폴레프 설계국은 즉시 새로운 폭격기 개발에 돌입하였다. 이처럼 냉전 초기에 미국 못지않게 소련의 발걸음도 빨랐다.
비슷하였던 후계자
Tu-95의 개발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는데 지시가 떨어진 지 불과 2년 만인 1952년 11월 시제기가 초도 비행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개발 과정이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만들고 있던 B-52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이후 이 둘은 6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운용되었고 앞으로도 20여 년 간 더 활약할 운명을 지닌 극적인 라이벌이 될 줄은 그 당시에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당시 투폴레프나 보잉(Boeing) 모두는 시대를 선도하였을 만큼 기계적 신뢰성이 뛰어난 B-29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B-52와 Tu-95는 배다른 형제라 할 수 있을 정도다. B-29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인 1940년대 기술로 만들어졌지만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B-52와 Tu-95가 지금도 현역에서 활동하고 2040년까지 운용할 예정인 것을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 박스데일 공군 기지를 방문하여 B-52H와 함께 주기한 Tu-95MC. 같은 시기에 태어나 함께 세기를 넘겨 운용할 예정인 폭격기의 살아있는 신화들이다.
양측 모두 처음에는 단지 기체의 크기를 키워 폭장량과 항속거리를 늘리는 것이 골자였다. 어쩌면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때 발발한 한국전쟁은 차기 폭격기에게 또 다른 능력을 요구하였다. B-29가 MiG-15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폭격기도 빠른 속도로 비행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 보잉과 투폴레프가 공통적으로 동원한 방법은 고속 비행에 적합한 후퇴익을 채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달랐던 라이벌
그런데 엔진에서 차이가 갈렸다. 여러 심장을 놓고 고민한 보잉은 대세를 쫓아 제트 엔진을 사용하였지만 투폴레프는 심사숙고 끝에 터보프롭엔진을 장착하였다. 비록 구닥다리 이미지가 물씬 풍기지만 Tu-95는 최고의 프로펠러 전투기인 P-51보다 빠른 속도로 날수 있었다. 더구나 연료 효율이 좋아 B-52보다 약 5,000km를 더 비행 할 수 있었고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더 많은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점만 갖춘 것은 아니다. 고속을 낼 수 있는 인상적인 2중반전 프로펠러는 비행에 많은 정비 요소와 시간이 필요하다. 더 큰 문제는 승무원들에게 난청을 유발할 정도의 엄청난 엔진 소음이다. 워낙 소리가 크다 보니 잠수함에서 수중음향 탐지기로 접근을 탐지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데 오죽하면 시끄러움이 Tu-95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미지 목록 엥겔스 기지에 주기 된 모습 | 엥겔스 기지에서 이륙 준비 중인 Tu-95MS |
Tu-95는 1956년부터 본격 배치되었는데 그 전해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퍼레이드에서 그 존재를 공개하였을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이제 소련도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할 진정한 전략폭격기 시대를 개막한 것이었다. B-29를 베끼기 급급하였던 소련이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미국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소련이 겪었던 본토 방공에 대한 고민을 미국도 똑같이 하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소련의 힘을 과시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기술을 바탕으로 소련의 전략폭격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폭격기 전력에서 소련은 미국에게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Tu-4를 시작으로 해서 Tu-95까지 일사천리로 대항마를 만들었지만 사실 미국을 쫓아가기에 급급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무한 것보다는 이 정도라도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고 그런 점에서 냉전시기에 Tu-95가 소련에서 차지한 비중은 대단하였다.
Tu-95는 장거리 비행능력과 뛰어난 탑재 능력을 발판 삼아 정찰기나 해상 초계기처럼 다양한 변형 기종이 제작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대표적 변형 기종이 다목적 해상초계기인 Tu-142다. 거대한 국토 때문에 연안이 긴 소련에게 장시간 체공하여 원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Tu-95는 해상초계기 플랫폼으로 안성맞춤이었다. Tu-142는 100여기가 제작되어 현재 러시아 해군은 물론 인도 해군도 사용 중이다.
이미지 목록 해군의 정찰 및 전자전기로 개조 된 Tu-95RTs | 오래전 설계 된 폭격기답게 방어용 후방사수석이 있다. |
이처럼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다 보니 해외 기지가 부족한 러시아는 소련 당시부터 Tu-95를 수시로 가상 적국의 영공 근처나 훈련 중인 함대에 접근시켜 다양한 작전을 펼쳐 왔다.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전략폭격기가 정확한 의도도 알 수 없는 상태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긴장하지 않을 나라는 없다. 이처럼 Tu-95는 냉전시기에 소련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고 상대에게 경고를 가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맨 처음 언급한 사례도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과 아시아 곳곳에서 반복되어 왔던 일상이다. Tu-95가 앞으로도 20여 년간을 더 날아다닐 예정이다 보니 앞으로도 그런 모습은 계속해서 보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를 요격하기 위해 출격 나갈 전투기들은 세대가 또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 Tu-95가 생명체이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어이 친구! 나는 당신 증조부와 놀았던 어른이야”
제원
전장 49.5m / 전폭 51.1m / 전고 12.12m / 최대이륙중량 188,000kg / 최대속도 925 km/h / 항속거리 15,000km / 작전고도 12,000m / 무장 23mm AM-23 기관포 2문, 각종 공대지 미사일을 포함한 15,000kg 폭장
- 글
- 남도현 | 군사 저술가
-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4.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