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 뺨친 조선시대의 요부 유감동
참 이씨조선녀들 문란했다. 정말 문란했다.
계유년 병자년에 婢(비)가 된
소위 양반집 여자들 중에 하나도
정조를 지킨여자는 없었다고 나온다.
최소 500명 이상은 된다고 보는데.
.최소..그렇게 문란했다.
근데 한국인 99.9%는 이씨조선녀가
정조 순결이 강한줄 세뇌 되어 있다.
날조사기, 하여튼 한국역사 날조는 치가 떨릴 정도다.
이도(세종)때 유감동 간통 사건
이씨조선 전기에 변계량의 누나 변씨,
어리가, 어우동 못지 않는
유감동 사건, 유명한 사건 이다.
다 반가(班家)의 여자들이다.
특히 유감동은 지금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검한성(檢漢城)을 지낸 유귀수의 딸이다.
그 당시 상당히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다.
후에 평강현감 최중기에게 시집을 간다.
기록에는 최중기가 무안군수 할때
유감동이 밤에 길을 가다가 '김여달'에게
강간을 당한후 변했다고 나온다.
이게 참 의문스럽다. 기록이라고 해서
곧이 곧대로 믿으면 단세포
암기형 앵무새를 벗어 날수가 없다.
왜냐하면 반가의 여인,
그것도 고을수령의 본처가 낮도 아니고
밤길에 혼자 나들이 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奴와 婢를 대동(帶同) 하고 움직인다.
근데도 강간 당했다?, 강간 당했으면
그것도 반가의 지체 높은 여인을 강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를리가 없을것이다.
노비가 있는데도 강간?..
이 기록은 도저히 의심을 안할수가 없다.
여자들의 본성은 뭐든지 피해자,
약자 코스프레 한다. 특히
性에 관한 부분이 제일 심하다.
페미撚들은 얼씨구나 하면서
잘도 이용해 처먹고 돌아서서는
그년 욕하고, 예외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강간 당했다고 하는데 김여달은
계속 유감동의 집에 들락날락 하면서 붕가붕가 한다.
이 사실을 안 최중기가 마음이
얼마나 좋았는지 아니면 쪽팔려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유감동을 내쫒고 이혼으로 끝을 낸다.
쫒겨난 유감동은 기생 행세 하면서
수많은 남자를 따먹고 돌아 다닌다.
그것도 관료들을 주로 대상으로 따먹는다.
관련자는 당시 유명인사 들이다.
심지어 정효문이라는 놈은
지네 숙부가 관계 한걸 알고도 붕가붕가,
또 이효랑이라는 놈은 최중기의
매형인데 유감동과 붕가붕가..
진짜 유감동은 요즘 말로 자동문(Auto Door)다.
그리고 성리학적 도덕을 이상(理想)으로
추구하는 이씨조선의
주희asslicker들 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감동 사건은 어우동이나 변계량 누나 사건 보다
훨신 구체적으로 기록 되어 있다.
인간의 섹에 대한 욕구는 남녀 차이가 없다.
남자는 직설적 과장적인 반면에
여자는 이중적 위선적 교활적이다.
특히 정조 순결은 남자를 위해 나온것이 아니다.
여자들을 위해 나온것이다.
페미撚들 말대로 갖다 버리면?..여자들이
좋은게 아니라 페미撚만 좋은꼴 만든다.
유감동에 대해 신하들은 죽여라고 하는데
이도(세종)은 양반들의 聖君이었기에
죽이지 않고 官婢로 처벌한다.
하지만 관비가 되고도 지버릇 개 못준다고
이도15년 12월5일 실록 보면
계속 붕가붕거 한것을 알수 있다.
재밌는건 유감동과 붕가붕가 한것들 중에
"황치신"이가 나온다.
이놈이 바로 그 유명한 황희의 嫡子다.
애비처럼 음서(蔭敍)로 관직에 진출해
이 사건 말고도 후에 판중추원사가 되고
남의 노비를 빼앗고 파직 되었지만 복직 된다.
그리고 죽어서는 우의정에 추서 된놈이다. 개판이다.
황희.. 어린이 위인전에는 청렴으로
상징으로 세뇌시키는 대표적인 놈이다.
알고 보면 처세술의 달인...
집구석은 적자놈,서자놈도 모자라
사위놈까지 미개한 이씨조선의
비리의 종합백화점인 집구석이다.
이런 놈을 공영방송인
캐빙신(kbs)에서 미화질 하고 있더라..
.
이도(세종) 9년 8월 18일 1427년 사헌부에서
유감동과 그의 간부들에 대해서 추국하기를 청하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평강 현감(平康縣監) 최중기(崔仲基)의 아내
유감동(兪甘同)이 남편을 배반하고
스스로 창기(倡妓)라 일컬으면서 서울과
외방(外方)에서 멋대로 행동하므로
간부(奸夫) 김여달(金如達)·이승(李升)·
황치신(黃致身)·전수생(田穗生)·이돈(李敦)이
여러 달 동안 간통했는데,
근각(根脚)을 알지 못하므로 수식(修飾)해서
통문에 답했으니 직첩을 회수하고,
감동과 함께 모두 형문(刑問)에 처하여
추국(推鞫)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유감동 명문집안에 태어 났음에도
정말 유감동은 날개를 단 듯 자유로웠다.
그녀는 한양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남자를 유혹하여 음욕을 채웠다.
상호군 이효량, 해주판관 오안로, 도사 이곡,
황희의 아들 황치신 등 유감동의 거미줄에 걸려
농락당한 사대부가 해마다 수십 명에 이르렀다.
그녀의 소문은 온 나라에 자자하게 퍼졌다.
그녀를 품어보지 못한 사대부는
양반 축에 끼지 못한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유감동의 음행은 세종에게까지 보고되었다.
“풍교가 땅에 떨어졌다. 사헌부는 즉시
그 음란한 여인을 잡아다가 철저하게 조사하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오래지 않아
유감동은 사헌부에 체포되었다.
소문의 진원지인 김여달도 잡혀왔다.
숱한 전․현직 벼슬아치들이 숨을 죽인 채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속 관리들이
유감동과 교접하지 않은 부처가 없었던 것이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형장에는 유감동과
김여달의 장혈(杖血)이 낭자했다.
장형(杖刑)이 진행될수록 유감동의 입에서는
교접한 관리들의 이름이 꼬리를 물었다.
전임 영의정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동서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중간보고를 받은 세종은 오즉하면
더 이상 조사하지 말라 일렀을까.
잘못하면 조정이 쑥대밭이 될 판이었다.
그때까지 유감동의 자백으로 거명된 관리들이
줄줄이 불려와 죄상에 따라 곤장을 맞거나
벼슬을 내놓고 귀양을 떠났다.
유감동의 아버지 유귀수도 끌려 나와 곤장을 맞았다.
유감동은 곤장을 맞은 뒤 변방에 유배되어
군막에서 평생 노비로 종사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혈기 방장한 군사들 틈에서 조신하게
노비로만 지냈을 턱이야 절대로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기록은 없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