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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맑스주의자로서 안톤 판네쿡: 비평
안톤 판네쿡, 「노동자 해방을 향한 길, 그 외 평의회 코뮤니스트 저술 (1935-1954)」, 편집 및 소개 : 로빈 윈터스 (PM Press/노동계급 역사), 2024 (303쪽. $24.95).
“미래는 노동자의 것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안톤 판네쿡, 1907)
우리는 러시아혁명에 관한 우리의 책1)을 저 노동계급의 경험에서 끌어낸, 잘못되었지만 대립하는 두 가지 견해를 대조함으로써 결론 내렸다. 첫 번째 견해는 노동계급은 당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당은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공격을 지도하는 노동계급의 무기일 뿐 아니라 그 공격 이후에도 계속해서 통치하게 될 차기 정부이기도 하다는 보르디가의 견해였다. 그와 대조하여 우리는 또한 정당 형태 자체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이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혁명과는 완전히 대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평의회주의자 오토 륄레(Otto Rühle)2)를 인용했다. 나중에 어떤 독자는 더 유명한 평의회주의자인 안톤 판네쿡의 글이 아니라 륄레의 글을 선택하여 돋보이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했다. 우리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지난 혁명적 파고로부터 출현한 당과 계급 문제에 관한 토론에서 양극단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판네쿡과 륄레 모두 독일 혁명의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지만 판네쿡의 견해는 륄레의 견해보다 훨씬 더 미묘하다.
안토니(또는 안톤) 판네쿡(1873-1960년)은 노동자 운동에서 엄청난 기복의 시대,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낸 혁명적 파고를 겪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그에 뒤따른 패배의 결과와 함께하고 있다. 첫 번째는 국제 노동계급이 그처럼 다시 조직된다면 그들의 존재가 위험에 진다고 자본가들에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기괴하게도 “사회주의”라고 자처하면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따르는 전체주의 국가들이 떨치고 일어난 것이다. 그것들의 존재만으로도 해방이라는 맑스주의의 본래 목적이 지니는 평판을 손상하기에 충분했으며, 따라서 새로운 계급 운동이 출현할 전망을 더욱더 어렵게 만든다. 자본주의 체제가 다시 한번 세계를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으로 이끄는 만큼, 그 혁명적 과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판네쿡이 그 사건들에 직접 참여한 기간은 비교적 짧았지만, 노동계급 역사에서 격동의 시기를 겪었던 판네쿡은 평생 맑스주의자로 남았고, 혁명적 변혁의 열쇠는 노동계급 대중의 계급의식 발전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저작 일부에 대한 이 최근 출간물을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투쟁에 그가 기여한 바를 (짧지만) 더욱 면밀하게 살필 기회를 얻는다.
판네쿡은 착취나 빈곤이나 억압을 통해 사회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신분 상승을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사업가 아버지처럼 네덜란드 자유당의 지지자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미 천문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에드워드 벨러미(Edward Bellamy)의 유토피아적 소설 「평등 」(Equality)을 우연히 마주했던 2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맑스주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아니 그가 썼듯이, “모든 이론이 사회적 토대와 사회적 의미를 지니며 추상적 추론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응하여 발전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3) 그러나 판네쿡은 맑스주의 경제 이론이 “지나치게 결정론적”4)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그로 하여금 더욱 “정신적인”5) 맑스주의를 찾도록 만들었다. 그는 19세기의 진귀한 노동자 이론가이자 맑스와 엥겔스가 모두 칭찬했던 요제프 디츠겐(Joseph Dietzgen)의 저작에서 그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가죽 무두장이였던 디츠겐은, 플레하노프가 그 문구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기 전에, 엥겔스로부터 맑스의 방법론을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말한 첫 번째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판네쿡의 사상에 끼친 디츠겐의 영향은 심대하며 그의 정치적 발전 과정의 모든 국면을 통해 지속되었다. 디츠겐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대단하여 “(맑스와 엥겔스가) 그의 주장 본질을 이해했는지 의심스럽다”6)고 말했을 정도였다. 판네쿡은 디츠겐이 맑스주의 역사적 유물론 사상을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맑스는 현실이 사유를 결정한다고 말했고, 디츠겐은 현실과 사유의 관계를 정립했다. 헤르만 호르터(Herman Gorter)의 말을 빌리면, 맑스는 세계가 정신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지적했고, 디츠겐은 정신이 그 자체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지적했다.”7)
이것은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며, 반대로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존재이다”8)고 하는 맑스의 유명한 진술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판네쿡은 맑스로부터 또 다른 인용구를 사용하여 반박한다.
“…… 그러나 이론도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 힘이 된다. 이론은 대인적으로(ad hominem: 특정인과 연결되거나 감정에 호소한다는 의미를 지닌 불어―옮긴이) 증명되는 순간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고, 급진적으로 되자마자 대인적으로 증명된다.”9)
판네쿡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 인용문을 몇 차례 언급하지만,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World Revolution and Communist Tactics)에 관한 1920년 그의 평론에서처럼10) 코뮤니스트좌파였던 시절에도, 그는 위의 인용문에서 앞부분의 “물질적”이라는 부분을 생략하고 다음과 같이 잘라낸 판본을 사용한다.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에 의한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으로 전복되어야 한다. ……”
판네쿡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맑스주의적 관점”은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그들의 물질적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라는 전제와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라는 전제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11) 이렇게 해야만 주의주의와 운명론이라는 한 쌍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판네쿡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두 명의 맑스주의자는 …… 자신들을 다르게 표현할 것인데, 한 사람은 주로 정신의 한정적인 본성을 강조하고 다른 사람은 정신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할 것이다. 둘 다 동일한 맑스주의 이론에 경의를 표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진리의 차이로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다.”12)
관념과 그것을 만들어낸 물질적 상황 사이의 균형이 판네쿡의 평생 활동의 중심이었지만, 그는 그 문제에서 항상 관념론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라는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고, 판네쿡은 곧 사회민주노동당(SDAP) 라이덴(Leiden) 지부에서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이후 그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 국제 맑스주의 급진 좌파의 주요 지식인 중 한 명이 된다. 이때는 저지대 국가들에서 대대적 파업이 일어나고 러시아 제국에서 1905년 혁명이 발발함으로써, 점점 더 개량주의적으로 변해가던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에 새로운 도전이 제기되던 시기였다. 네덜란드 안에서도 판네쿡은 “아직도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거대한 노동 쟁의에 해당하는” 1903년 대대적 파업의 물결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민주노동당의 한심한 행위를 목격했다.13) 사회민주노동당은 처음에는 파업을 지지했지만, 지도부는 파업이 너무 “정치적으로”[“정치”는 당 지도자인 트룰스트라(Troelstra)가 의회 그룹을 위해 마련한 용어였다] 변질하고 있는 것을 우려해 나중에는 파업을 방해했다. 판네쿡은 이러한 배신에 대해 트룰스트라에 대한 비난을 주도했다. “당신의 무기력하고 머뭇거리는 행위는 소유 계급과 정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14) 이는 이른바 사회주의 정당이 계급 행동을 지지하지 않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었다. 이는 훗날 카를 카우츠키와 논쟁할 때 그의 입장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경험이었다.
그런데도 1904년에 베를린에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당 학교에서 일하도록 그를 독일로 초청한 사람은 바로 카우츠키 자신이었다. 그는 [칼 라데크(Karl Radek)와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처럼] 경찰이 그들을 “외국인”으로 강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였기 때문에 곧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은 여전히 그의 글쓰기와 강연 활동에 대한 비용을 지불했고, 그는 요한 크니프(Johann Knief)와 파울 프뢸리히(Paul Fröhlich)와 함께 브레멘 좌파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며 매주 「브레멘 시민 신문」(Bremer Bürger-Zeitung: SPD 좌파를 대변하던 신문―옮긴이)에 글을 기고했다. 천문학자로서 그의 유망한 경력은 그가 전문 혁명가가 되는 동안 보류되었다. 이 시기에 판네쿡은 「새 시대」(De Nieuwe Tijd)와 「신시대」(Die Neue Zeit)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는데, 「신시대」는 카우츠키가 편집자로 있었다. 판네쿡과 그의 친구인 시인 헤르만 호르터(Herman Gorter)는 1910년까지 카우츠키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에 이르면 호르터와 판네쿡을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 좌파는 이미 네덜란드의 사회민주노동당에서 제명되고,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급진 좌파와 공동의 대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카우츠키와 논쟁은 1909년 카우츠키가 「권력에 이르는 길」(The Road to Power)을 출간하면서 시작되었다. 카우츠키는 앞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맞서 맑스주의 정통을 옹호하여 사회민주당 내 급진 좌파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맑스주의 정통”은 이제 사회주의에 관한 생각을 먼 미래로 미루고 노동계급에 국회의원 후보에 대한 투표 외에는 더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화석화된 도그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수백만 노동자의 막대한 자원을 확보한 세계 최대의 사회주의 정당이었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환에 대한 진정성 있고 적극적인 노동계급의 대응을 점점 더 가로막고 있었다. 판네쿡은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는 인식을 로자 룩셈부르크와 공유했다.15) 두 사람 모두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와 더욱 직접적인 갈등에 빠져들고 있다고 보았다. 두 사람 모두 20세기 초에 발전한 대중 파업에서 노동계급 의식의 기본적이고 조직적인 표현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이 시점에서 두 사람 모두 아직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설립된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를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았지만, 실질적이고 혁명적인 계급 운동의 표현으로서 노동자들의 자기 활동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 두 사람 모두 당의 역할은 대중 운동에 혁명적 표현을 부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카우츠키는 「권력에 이르는 길」에서 “무질서한 행동”의 위험―그는 당시의 노동계급 운동을 이렇게 보았다―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 트룰스트라와 마찬가지로 그는 당을 강조하고 계급 운동을 이끌고 규율하며 통제할 수 있는 당의 능력을 중시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그 자체 모순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져야만 실현된다는 운명론적 인식이 있었다. 그동안 노동계급에 요구되는 것은 투표를 통해 사회민주당을 의회에 진출시키고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뿐이었다. 판네쿡은 1912년 「신시대」에 기고한 카우츠키에 대한 논쟁, 「맑스주의 이론과 혁명적 전술」에서 이러한 가정 모두를 거부했다.
그는 이 논쟁에서 당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대의 레닌처럼 당이 맑스주의 혁명적 본질에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디츠겐이 발전시킨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서 출발하여, 다가오는 사회 혁명에서 계급의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자기 생각을 옹호했다. 이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그의 사고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자세히 인용할 가치가 있다.
“맑스주의는 인간의 모든 역사적·정치적 행동을 그들의 물질적 관계, 특히 경제적 관계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되풀이되는 부르주아적 오해는 우리가 여기서 인간 정신의 역할을 무시하고 인간을 죽은 도구, 경제적 힘의 꼭두각시로 만든다고 비난한다. 우리는 맑스주의가 정신을 제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정신을 통해 작동한다. 인간의 행동은 그들의 의지에 따라, 그리고 정신 속에 존재하는 모든 이상과 원칙과 동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인간 정신의 내용은 인간이 사는 물질세계의 산물일 뿐이며, 따라서 경제적 관계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경제적 관계가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과 의지에 미치는 영향에 의해서뿐이라고 주장한다. 사회 혁명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뒤따를 따름인데, 경제적 격변이 먼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을 변화시켜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의지를 지휘하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에 불어넣어지는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결의의 표현인 것처럼,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심오한 정신적 변화의 표현이자 결과이다. 이러한 정신적 변화는 경제 발전이 사회 혁명이라는 행위로 이어지는 매개 항목이다. 이것이 맑스주의가 정신에 부여하는 역할이라는 데에는 카우츠키와 우리 사이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16)
그는 계속해서 위에서 인용한 관념의 물질적 토대와 관념 자체가 동등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주장을 이어가다가 프롤레타리아트가 대중 행동을 취하면서 상황이 변하고 있고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도 변하고 있다는 또 다른 핵심 주장으로 결론을 내린다. “조건이 성숙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는 결정론적 사상 때문에, “맑스주의가 이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 이론이 되는” 시기에 사회민주당은 운동의 억제력이 되고 있었다. 카우츠키는 당이 투표함을 통해 권력을 잡는 날까지 “대중을 억제할” 필요성에 대해 꽤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따라서 대중과 당의 관계는 카우츠키가 제시한 것과 같을 수 없다. 당이 자신의 기능을 대중의 행동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당의 규율은 대중이 창의력과 자발적 행동의 잠재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에너지의 전환이 아니라 실질적인 손실이 될 것이다. 그러면 당의 존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역량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축소시킬 것이다. 당은 대중이 자율성 일부를 위임했음에도 대중이 자발적으로 일어날 때까지 그저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으며, 대중을 진정시키는 당 지도부에 대한 신뢰와 당의 규율은 당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적절한 순간에 대중에게 행동을 촉구할 의무를 당에 부여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주장했듯이, 당은 실제로 혁명적 행동을 선동할 의무가 있는데, 당은 대중의 행동 능력의 중요한 부분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체 의지를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에 군대처럼 명령할 수도 없다. 당은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중이 더는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가 아니라, 대중의 대규모 행동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느낌을 대중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될 때까지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은 경제발전에 따라 결정되고 추동되지만, 그들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맑스주의 이론이 실현되는 방식이다.”(강조는 필자)17)
“정통 맑스주의”의 “교황”이라는 카우츠키의 명성은 한동안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그 “정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여러 대회가 채택한 모든 반전 결의안에 반하여, 독일 사회민주주의 의회 분파는 1914년 8월 황제의 전쟁 예산에 대해 (대의원 중 약 1/6이 반대했기 때문에 당 규율에 따라)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다. 그들의 변명은 “러시아 전제주의”에 대한 전쟁을 위한 행위라는 것이었다. 카우츠키는 의회 의원이 아니었지만, 의회 그룹에 조언할 것을 요청받자, 차르 독재에 대한 전쟁일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대한 전쟁이라는 매우 비(非)맑스주의적인 전제하에 그들에게 기권할 것을 권했다. 사실 카우츠키는 전쟁을 선진 자본주의에 본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고,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 전쟁을 사회민주당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끌고 투표함을 통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평화적 조건을 방해하는 성가신 것으로 간주했다. 투표함을 통한 권력 장악이 그가 기대했던 유일한 계급전쟁이었다. 레닌이 “배신자 카우츠키”에 관한 일련의 문서에서 바로 지적했듯이, 전쟁에 관한 그의 견해는 궁극적으로 계급적 견해가 아니라 평화주의적 견해였다. 레닌에게 전쟁은 맑스주의가 의미하는 바를 재평가하도록 이끌 것이었는데,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이며 국가는 점령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파괴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판네쿡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네덜란드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네덜란드 트리뷴 그룹의 다른 회원들과 함께 방어주의와 평화주의를 모두 비난했다. 그는 브레멘 좌파 그리고 보르하르트(Borchardt)의 「리히트슈트랄렌」(Lichtstrahlen: 1913-1916년과 1918-1921년 사이에 보르하르트가 발행했던 사회주의 잡지로 ‘광선’이라는 의미이다―옮긴이)과 같은 다른 국제주의자들과 협력했는데 이들 모두 사민당을 탈퇴하고, 전쟁 반대 투쟁은 “자본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투쟁의 일부”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레닌과 침머발트 좌파18)에 동의했다.19) 제2 인터내셔널의 계급적 배신 이후에 그 역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설립을 고대했다. 1916년 1월, 판네쿡은 창간호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헨리에타 롤랑트-홀스트(Henrietta Roland-Holst) 덕분에 레닌, 지노비예프, 라덱과 함께 침머발트 좌파의 새롭지만 단명한 잡지 「보르보테」(Vorbote: The Herald)의 편집자로 임명되었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판네쿡은 이 출판물을 제국주의 전쟁에 계급전쟁으로 대항할 뿐만 아니라, 신뢰를 상실한 사회민주주의 제2 인터내셔널 대신에 새롭고 혁명적인 인터내셔널의 탄생을 위해 필요한 첫걸음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라덱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 바르샤바 위원회의 민족자결주의에 반대하는 테제들을 발표했을 때,20) 그것은 레닌과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래서 판네쿡과 롤랑트-홀스트는 다른 사람들을 “기고자”로 격하시켜버렸다. 이 잡지는 단 두 호 발행 후 자금 부족으로 폐간되었다.21)
나중에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카우츠키와 논쟁할 때, 이것이 판네쿡을 칭찬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레닌은 1916년 부하린과 벌인 논쟁에 자극받아 국가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저작들을 재검토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이 논쟁에서 맑스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은 카우츠키가 아니라 판네쿡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순히 낡은 국가기구가 새로운 수중으로 넘어간다는 의미에서 국가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구를 부수고 새로운 기구로 대체해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은 맑스였기 때문이다."22)
판네쿡은 볼셰비키 혁명을 자본주의의 족쇄를 떨쳐버리기 위한 세계 노동계급 투쟁의 첫 단계로서 열렬히 환영했으며,23) 브레멘으로 돌아온 후 1919년에 러시아 소비에트를 본받아 노동자평의회를 설립하는 데 참여했다. 그는 또한 새로 결성된 독일 코뮤니스트당(KPD)에 가입했지만, 1919년 1월의 재난으로 그들의 지도자인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잃으면서 의회와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것의 가치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판네쿡에게 이러한 활동은 1914년 독일 사회민주주의 붕괴의 핵심이 된 “기회주의”였다.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고 이러한 전술은 더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 논쟁은 독일 코뮤니스트당을 분열시키고 좌익의 축출로 이어졌는데, 이후 이들 좌파는 독일 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그 후 독일 코뮤니스트당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중도파들과 함께 제3 인터내셔널의 독일 조직인 독일 통합코뮤니스트당(VKPD)을 결성했다. 독일 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원래 제3 인터내셔널의 준회원이었지만, 독일 통합코뮤니스트당에 가입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자 이를 거부하고 코민테른을 탈퇴했다.
레닌이 국제 코뮤니스트좌파 전체를 비난한 유명한 글인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가 출간한 것은 바로 이 과정에서였다. 그것은 코민테른 2차 대회를 준비하면서 모든 나라의 모든 “좌익 코뮤니스트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3년 만에 맑스주의의 진정한 옹호자에서 “맑주의의 ABC를 이해하지 못하는 실패”24)를 드러낸 인물인 “K. Horner”(판네쿡)에 대한 특별한 형태의 욕설을 포함하고 있었다. 판네쿡의 대응이 레닌이 탐닉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인신공격으로 타락하지 않은 것은 그의 절대적인 특징이었다. 그 대신에 그는 레닌의 논쟁을 러시아에서 혁명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물질적 상황(백군에 대한 전쟁에서 입은 물질적 손실을 언급)과 연관시켰다. 그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들이 즉각적인 혁명의 생존을 위해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제3 인터내셔널의 정책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선견지명을 지니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모든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준비하는 코뮤니스트당들의 연합체로서, 러시아 정부의 정책에 공식적으로 구속되지 않는다. …… 우리는 이제 제3 인터내셔널의 전술들―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 동질적으로 적용하고 중앙의 지도를 받도록 대회가 규정되어 있다―이 왜 그 나라들에서 코뮤니즘을 선동할 필요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도 결정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25)
1921년부터 점점 더 새로운 러시아 국가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던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수많은 코뮤니스트를 살해한 당사자)과 연합전선을 강요했다. “볼셰비키화” 운동 속에서 결국 모든 좌파는 축출되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 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여러 분파로 분열되고 1927년에 붕괴하였다. 세계혁명의 전망이 사라진 이 시기 내내 판네쿡은 국제적 명성을 지닌 천문학자로서 그의 출중한 경력을 재개하면서 정치 무대에서는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따라서 1921년은 그가 혁명 정치에서 집단행동에 전업적으로 참여한 마지막 해였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헨크 칸-메이예르(Henk Canne-Meijer)가 이끄는 네덜란드 국제코뮤니스트 그룹(GIC)―그의 책 「철학자로서 레닌」과 「노동자평의회」를 출판했다―과 협력하고, 폴 매틱(Paul Mattick)의 「국제 평의회 통신」(International Council Correspondence)과 「살아 있는 맑스주의」(Living Marxism) 같은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반(反)혁명이 확산하여 스탈린주의에서 그 극에 달한 가운데 독일 좌파는 평의회 코뮤니즘을 탄생시켰다.
그러면 이제 검토 중인 책으로 넘어가 보자.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판네쿡이 혁명적 사고에 기여한 바를 다루기 시작한다. 판네쿡의 혁명적 경험의 형성 시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판네쿡의 사고 형성에서 디츠겐과 그의 결정적 역할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다. 보기를 들어, 이 책에 영감을 준 사람은 맑스주의자 출신으로 아나키즘과 맑스주의의 혁명적 측면을 종합하려 했던 다니엘 게랭(Daniel Guérin)이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편집자가 대상으로 삼은 독자는 아나키스트임이 분명하다.26) 미래의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게랭은 그의 짧은 에세이 「자유의지론적 코뮤니즘을 향하여」(Towards a Libertarian Communism)를 “그것(코뮤니즘―옮긴이)은 권위주의적이 아니라 자유의지론적이고 자주 관리적이며, 또는 원한다면 평의회주의적일 것이다”라는 말로 끝맺었다.27) 크로포트킨(Kropotkin)의 상호주의의 모호성에 반해, 게랭은 러시아 노동자평의회가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사회를 장악하고 계급 분화를 폐지하는 동시에, 판네쿡 자신이 지적했듯이,28) 국가의 폐지로 이어질 수 있는 조직 형태를 창출할 수 있을지 하는 것에 대해 역사적으로 발견한 형태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판네쿡의 저작에 헌신적인 아나키스트 웹사이트29)가 있다. 범위가 훨씬 더 넓어서 1912년 카우츠키에 반대한 그의 작품뿐 아니라 반전 관련 글들도 게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출판사가 이 “솜씨 좋은 컬렉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가 약간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출판사는 이 책의 전반부가 “이전에는 완간된 적이 없는 …… 원고를 필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24개의 장과 2개의 부록 중에서 실제로는 6개(전체 303쪽 중 60쪽에 해당)만이 이전에 출판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판네쿡이 거의 30년을 더 살았음에도 왜 이 자필 노트를 영어로 출판하지 않았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 것 같다. 판네쿡의 일반적인 글쓰기 스타일은 가설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단락을 시작한 다음에 그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편집자가 판네쿡 아카이브30)에서 발견한 수기 문서들은 매우 짧고 띄엄띄엄 끊기는 문장들과 추가적인 수식어도 거의 없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쓰여 있다. 마치 판네쿡이 영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문장 중에는 아마도 공개되길 원하지 않았을 것들로 있는데, 이를테면 다가오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과 유럽이 모두 경제적으로 파멸할 것이라는 잘못된 예측 같은 것이다.31) 실제로 1947년에 출간된 책 「노동자평의회」에서 그는 정반대의 글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은 “현재 미국 자본주의에 다가온 큰 기회”를 창출했다는 것이다.32)
판네쿡은 사후 그의 저작 출판에서 일반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의 저서 「노동자평의회」는 1970년 폴 매틱 주니어(Paul Mattick jr)의 ‘뿌리와 가지’(Root and Branch) 그룹에 의해 팸플릿으로 재출간되었지만, 1부와 2부만 실려 있었다(제3부, 제4부, 제5부의 전쟁과 전후 상황에 대한 판네쿡의 고찰은 제외되었다). 멀린 출판사(Merlin Press)는 그의 「철학자로서 레닌」을 재출간했지만, 코르쉬(Korsch)가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는 논문은 빠져 있고, PM 출판사가 최근에 내놓은 것은 훨씬 더 실망스럽다. 그의 명저33)인 「천문학의 역사」(A History of Astronomy)조차도 마지막 단락이 생략된 채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역사적 유물론과 “생산적 노동의 자유로운 자치 세계 공동체”34)라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판네쿡의 지속적인 전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선사 시대 야만의 단계에서 문명이 처음 출현한 이래로 천문학적 세계관의 성장을 따라왔다. 이러한 과학의 성장 속에서 우리는 문명 시대 내내 인류의 발전과 함께한 정신적 발전 과정의 매혹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과학이 가져다준 지식과 통찰이 아무리 경이롭다고 해도, 과학의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 세계인 달에서도 수동적인 관찰에 적극적인 실험이 추가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의문에 직면해 있다. 우주에서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인 태양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최근에야 일반적인 불확실성의 단계에서 벗어났으며 모든 면에서 여전히 불완전하다. 은하계와 별들 자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직 그 시작 단계에 있으며 외부에 국한되어 있다. 그 너머에 있는 끝없는 공간과 별들의 내부, 과거와 미래 그것들의 발전에 대해서는, 이해의 실마리도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여전히 의문이다. 모든 부분,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일련의 흥미로운 질문에 직면해 있다. 인류는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확보하기 위해 생산적 노동의 자유로운 자치 세계 공동체를 구축함으로써, 자연과 우주 과학에 대한 지식의 완성을 위해 모든 정신적 힘을 해방해야 할 때이다.”
「자유를 향한 노동자의 길」(The Workers’ Way to Freedom)은 그의 유산을 조잡하게 취급한 또 하나의 사례로 보인다. 편집자는 이 책이 “판네쿡의 「노동자평의회」와 그의 1938년 저서 「철학자로서 레닌」에서 제시되는 요점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는” “평의회 코뮤니즘 사상의 초기 설명본”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거의 인정하고 있다.35) 요컨대, 그것은 판네쿡의 유산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손상했다. 편집자는 우리가 판네콕 자신에 대해 배우게 되는 것보다 자신들이 판네쿡의 노트를 필사하게 된 경위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1960년 판네쿡이 사망한 지 2년 후에 폴 매틱이 판네쿡에 대해 쓴 평가 글인 부록 A―“맑스주의자 인터넷 아카이브(Marxists Internet Archive)에서 옮겨 적은”36) 것―가 추가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판네쿡의 맑스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배경지식을 전혀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 어디에서도 디츠겐이 판네쿡에게 미친 결정적인 영향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다. 요컨대, 이는 현대적 맥락에서 판네쿡의 저술이 지닌 타당성에 대해 논의할 기회를 낭비한 셈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현재 적어도 3개의 사이트에 모두 공개된 판네쿡의 원본을 비판적으로 읽는 것이 더 낫다.37)
우리가 “비판적으로”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정신에 의한 것이라는 점 이외에도, 60년도 더 전에 끝난 공헌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구성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60년 판네쿡이 사망했을 때는 그 구성이 그가 정치 활동을 시작한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는 여전히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규모 공장이 있는 포드주의적 산업 세계였는데, 이것은 오늘날에는 드문 유형이다. 나이 든 노동자들은 판네쿡이 평의회의 대표가 각 공장의 “작업장(shops)” 또는 부서들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할 때(여기서 “노조 대표(shop steward)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판네쿡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긴 장기 호황이 한창일 때 사망했다. 그는 1970년대 전후 호황이 끝나고 위기가 시작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위기에 대한 비용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려는 시도는 처음에는 전 세계 노동계급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모든 대륙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인플레이션을 통해 임금을 삭감하여 이윤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와일드캣(비공인) 파업, 공장 점거, 그리고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실패할 운명인) 노동자 자주관리의 시도가 있었지만, 국가에 통합된 노동조합의 통제로 인해 투쟁은 실제 혁명으로 폭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자, 자본가들은 자본을 상각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930년대 이래 볼 수 없었던 실업률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임금 삭감에 맞서 싸우는 것과 자본가들이 일자리에 신경 쓰지 않을 때 일자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계급 저항은 1980년대까지 영웅적으로 계속되었지만, 자본주의 재구조화의 잔혹한 과정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1990년대에 이르면 중공업이 자본과 함께 중국과 다른 지역의 새로운 경제특구(더 정확하게는 “특별 착취” 구역)로 옮겨가면서 대부분의 거대 생산 시설은 버려지거나 축소되었다. 여기에 더해 마이크로프로세서로 기술이 전환되고 낡은 산업들이 쇠퇴하면서, 오늘날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계급은 더욱 파편화되어 더 작은 생산 시설에서 일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혁명가들에게 판네쿡이 「노동자평의회」에서 예상했던 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도전 과제를 던져준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수반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하려 한다.
오늘날의 모든 진정한 노동계급 혁명가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평의회주의자들”이다. 판네쿡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역사적 발견은 소비에트였다. 이것은 이윤을 위한 자본주의 생산을, 오로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로 대체하려는 투쟁의 조직적 기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 알고 있었듯이, 그것은 국가 없고 계급 없는 미래 사회의 형태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경제적 생산의 성격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인류의 사회적 변혁이 일어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한데, 그곳에서는 “시민”의 정치적 참여가 5년에 한 번 투표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해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이 소환되거나 위임될 수 있다. 그러나 판네쿡은 러시아의 노동자평의회가 “자발적으로” 생겨났다고 생각했으며,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한다. 우선, “자발성”이라는 개념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연과학의 세계에서조차도 “자발적 연소”와 같은 것들은 외부 관찰자에게는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본적인 계급투쟁이 때때로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질서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종종 가장 준비된 혁명가들조차 놀라게 만들지만, 여기에는 항상 물질적 이유가 있으며, 이것은 투쟁이 전개될 때만 분명해진다. 그리고 (판네쿡이 몰랐을 수도 있지만) 자발성에 관한 주장은 역사적으로도 정확하지 않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의 첫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맨체스터”(산업혁명 당시 영국 면방적업의 중심지―옮긴이) 노동자들이 그 지역의 모든 파업을 통합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려는 물질적 필요에서 생겨났다. 몇 달 후 1905년 첫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 대한 제안은 거의 확실하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멘셰비키 당원에게서 나온 것이었고, 선거 형식은 차르의 조사위원회에서 빌려온 것이었다.38) 두 번째로, 오늘날에는 노동자의 집중도가 예전과 같지 않으며, 이는 판네쿡의 시대보다 계급 전체에서 의식이 더 분열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노동자를 자신들의 사고방식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결사체를 결성할 필요성을 증가시킬 뿐이다. 요컨대, 정당 같은 것.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의 후손인 대부분의 평의회 코뮤니스트에 이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다.
폴 매틱, 오토 륄레, 안톤 판네쿡 같은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 혁명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인터내셔널에 배신당하는 것을 목격한 공통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노동자들을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과 그 후 몇 년 동안 독일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혁명적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1919년에 제3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창설되었지만, 2년도 채 되지 않아 그것은 의회와 노동조합을 이용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을 채택했다. 그런데 이것은 판네쿡과 독일 코뮤니스트노동자당의 그의 동지들이, 많은 추종자를 신속하게 확보하기 위한 거짓된 “기회주의적” 조치로 간주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당들이 아무리 계급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더라도,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좌파가 정당을 단순히 소수에게 권력을 쥐여주는 기계로 간주하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등장한 평의회 코뮤니스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반(反)혁명이 스탈린주의로 발전하면서 폴 매틱 시니어는 결국 러시아혁명과 관련된 모든 것에 “볼셰비키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볼셰비키가 자기 당을 위해 권력을 잡으려고 노동자평의회 이념을 지지했을 뿐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했다.39) 반면 오토 륄레는 단순히 “모든 정당은 부르주아적이다”라고 결론 내렸다.40) 이미 살펴보았듯이, 언제나 과학자의 자세를 지녔던 판네쿡은 무익하고 개인적인 논쟁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실질적으로 반혁명을 초래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시도를 더 많이 했다. 그는 노동자평의회가 노동자들의 다른 많은 자주적 조직(공장위원회, 협동조합 등)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 치하에서 “약 6개월” 동안 광범위하게 기능했음을 인지했다. 판네쿡은 혁명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논의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실제로 소비에트를 그 자신이 평의회 제도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여긴 것과 더 가깝게 만든 것―볼셰비키가 대의원 소환제를 도입하면서―이 볼셰비키였다는 말은 생략한다.41) 그가 “레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조차도, 그것은 대부분의 논평가에게서 그렇듯이 칭찬도 욕설도 아닌 용어이지만, 처음에는 랴자노프(Riazanov)와 데보린(Deborin)이 이끌고 스탈린이 레닌 숭배를 고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조직했던 맑스-엥겔스 연구소(Marx-Engels Institute)의 창설과 특별히 연결되어 있다.42)
그의 전체적인 전망은 노동계급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의식을 획득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판네쿡은 다른 평의회주의자와 다르다. 그리고 의식은 조직적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판네쿡은 평의회를 이상적인 형태로 보지만, 혁명적 계급의식은 노동자들 사이의 논쟁과 토론 없이는 도달할 수 없으므로 그 과정에 기초한 “당”이라는 개념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위대한 시기는 당쟁의 소음으로 가득할 것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그룹을 형성하여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의 생각을 논의하고 동지들을 계몽하기 위해 그 생각을 선전한다. 이러한 공통된 의견 그룹을 당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성격은 이전 세계의 정당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의회주의 아래에서 이 당들은 서로 다르고 상반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지닌 기관이었다. 노동계급 운동에서는 이 당들은 계급을 선도하고, 그 대변자이자 대표로 활동하며, 지도와 지배를 열망하는 조직이었다. 이제 그들의 기능은 정신적 투쟁일 뿐이다. 노동계급은 실천적 행동을 위해 당이 필요하지 않다. 노동계급은 행동을 위한 새로운 조직, …… 즉 평의회 조직을 만들었고, 행동하는 것은 전체 노동자 자체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도 전체 노동자 자체이다.”43)
판네쿡에게 문제는 “당”이라기보다는 혁명 이후 누가 권력을 잡느냐의 문제이다. 네덜란드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의 후예들이 마지막 반(反)혁명의 교훈을 되새긴 유일한 희생자들은 아니다. 이탈리아 좌파의 전통에 따라 1943년 이탈리아에서 창당된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도 당이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필수 무기이기는 하지만 “이전 세계의 정당과는 다르다”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이 당을 창당하는 순간, 그들을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자로 만드는 속성을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미래를 위해 심각하고 위험한 오류가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대안으로 행동하고 그래서 계급적 적에 맞서 투쟁하고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할 필요성에 대해 노동계급과 같은 의식을 지닐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결코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투쟁적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적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지 않으며, 정당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권력을 넘겨주지 않는다.”44)
여기서 차이점은 판네쿡이 혁명 이전에 혁명적 계급의식에 이르는 길이 평탄하지 않다는 문제에 맞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의 강령은 노동자들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시기에 자본주의를 다르게 경험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혁명적 시기 이전에 계급이 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당(계급의 “일부”)의 존재가 불가피한 만큼, 당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역사적인 투쟁에서 얻은 통찰력을 유지하는 것은 당의 과제 중 하나일 뿐이다.45) 그것의 역할은 판네쿡의 교육과 선전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며, 계급 전체가 권력을 공격하는 조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판네쿡이 암시하듯, 이 “새로운 정당”은 차기 정부일 수 없다. 그것은 [소비에트 집행부에 의해 느슨하게 감독 되다가 소비에트 집행부를 대체했던 소브나콤(Sovnarkom), 즉 인민위원회의에서 1917년 볼셰비키가 그랬던 것처럼] 소비에트와 분리된 “노동자 정부”를 구성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구성원들은 평의회에 그리고 어떤 집행위원회가 설립되든 그것에도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판네쿡도 잘 알고 있듯이 평의회 설립 자체가 완전한 승리는 아니다. 우선 평의회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벌어질 수 있는 무대일 뿐이다. 당은 그 무대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벌여야 하며, 동시에 당이 준비하고 있는 다른 임무―전 세계 코뮤니스트 노동자들과 연결하여 세계혁명을 촉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평의회들이 점차 계급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폐지를 향해 나아감에 따라, 그것들은 또한 투쟁 기관에서 사회의 필요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기능을 변화시킨다. 요컨대 그것들은 국가 사멸을 위한 열쇠로, 역사적으로 계급투쟁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2024년 7월
조크(Jock)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 24호
옮긴이 │김종원
<주>
1. J. Dominie, Russia: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1905-1924: A View from the Communist Left, 276쪽. from leftcom.org.
2. 그것은 본래 초기 ‘혁명적 전망’ 그룹(‘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의 전신 중 하나)이 매혹되었던 견해였다. 륄레의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까지」(From the Bourgeois to the Proletarian Revolution)의 영어 번역은 ‘혁명적 전망’의 창시자인 플레이스(D.G. Place)에 의해 착수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작고한 데이브 그레이엄[Dave Graham(Graeme Imray), CWO와 그 이전 ‘노동자의 목소리’(Workers’ Voice)의 전 멤버]에 의해 옛 libcom 사이트에 게시되었고, 이제는 marxists.org에 다시 등장했다.
3. Quoted in J. Gerber’s introduction to Serge Bricianer’s Pannekoek and the Workers’ Councils, files.libcom.org.
4. 이것은 주3)에서 인용한 책에서 거버(Gerber)가 사용한 표현이다.
5. 판네쿡은 사고나 의식을 언급할 때 [디츠겐(Dietzgen)에게서 취한] “정신적”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
6. Lenin as Philosopher (Merlin, 1975) 35쪽. 맑스와 엥겔스는 디츠겐을 “우리의 철학자”라고 칭송했지만, 또한 사유 자체가 물질세계와 거의 동등한 요소라는 관념을 강조한 디츠겐에 대해서 회의적이기도 했다. 1868년 10월 4일에 맑스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원고를 꼼꼼히 읽어 보게. 내 생각에는 디츠겐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두 장으로 압축하여 그것을 무두장이로서 자신의 이름으로 인쇄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네. 그가 그것을 의도한 분량으로 출간한다면, 변증법적 발전이 부족하고 그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까닭에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말 것이네. 꼼꼼히 읽고 자네의 의견을 적게나.” web.archive.org.
7. 같은 책.
8. marxists.org.
9. Marx in The Introduction to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marxists.org.
10. Pannekoek and Gorter’s Marxism, edited by D. A Smart (Pluto Press, 1978), 93쪽을 볼 것.
11. Marxist Theory and Revolutionary Tactics, in Smart, 71쪽을 볼 것.
12. 앞에서 인용한 곳.
13. John Gerber, Anton Pannekoek and the Socialism of Workers’ Self-Emancipation (1873-1960), 36쪽 (Kluwer Academic Publishers and International Institute of Social History, 1989). 이에 대한 훌륭한 설명은, N. Harding, Lenin’s Political Thought, Volume 2 (Macmillan, 1977) 92-110쪽에서 볼 수 있다.
14. In Het Volk, 26 March 1903. Quoted in The Dutch and German Communist Left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01), 33쪽. It can also be found on line by the original author, Philippe Bourrinet (with additional footnotes) at files.libcom.org.
15. 그렇지만 판네쿡은 제국주의 기초를 설명한 룩셈부르크의 경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913년 「자본의 축적」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룩셈부르크는 「반(反)비판」을 통해 그에게 답했다. K. J. Tarbuck (ed) Imperialism and the Accumulation of Capital (Penguin 1972) 67쪽 onwards을 볼 것.
16. Smart, 70쪽을 볼 것.
17. Smart, 73쪽.
18. 침머발트 좌파의 결의안과 그 맥락에 대해서는, leftcom.org을 볼 것.
19. The Dutch and German Communist Left, 108쪽을 볼 것.
20. leftcom.org.
21. Warren Lerner, Karl Radek: The Last Internationalist (Stanford 1970), 44-47쪽, 그리고 R Craig Nation in his War on War (Haymarket 1989), 112-14쪽을 볼 것.
22. Lenin, Collected Works (Moscow 1974): Volume 25, 489쪽.
23.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World Revolution and Communist Tactics, 1920)에서 판네쿡은 “러시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Smart, 94쪽을 볼 것)고 적었으며, 같은 글에서 두 차례 더 이야기했다.
24. “Left-wing” Communism: and Infantile Disorder, in Lenin, Selected Works, Volume 3 (Moscow 1977) 309쪽.
25. Afterword to World Revolution and Communist Tactics in Smart, op. cit., 144쪽.
26. 이전에 이에 대해 그를 인용한 적이 있다. leftcom.org을 볼 것.
27. theanarchistlibrary.org.
28. World Revolution and Communist Tactics in Smart, op. cit., 117쪽을 볼 것.
29. theanarchistlibrary.org.
30. aaap.be.
31. The Workers’ Way to Freedom, 11쪽.
32. marxists.org.
33. 냉전 시대에는 흔하지 않은 협력을 통해, NASA는 「천문학의 역사」에 대한 1962년 러시아의 한 평론을 번역했는데, 이 평론은 판네쿡의 인류 해방에 대한 지속적인 전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러시아의 평론은 판네쿡이 이집트 천문학에 더 적은 시간을 할애한 이유가 이집트 천문학 작업이 사회 일반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권정치에 봉사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articles.adsabs.harvard.edu.
34. 판네쿡의 「천문학의 역사」(Een geschiedenis van de sterrekund)의 마지막 문구. 네덜란드어 원문과 번역문을 제공해 주신 Antonie Pannekoek Archives의 비코(Vico)에게 감사드린다.
35. The Workers’ Way to Freedom, 3쪽.
36. The Workers’ Way to Freedom, 225쪽. The link is marxists.org.
37. libcom.org에는 다양하게 엄선해 놓은 그의 저작들과 [이 글에서 인용한 브리키아너(Bricianer)와 거버(Gerber)의 글을 포함해서] 판네쿡 자신에 대한 논문들이 있다.
38. Oskar Anweiler, The Soviets (Merlin 1974) 53쪽을 볼 것.
39. 매틱의 Anti-Bolshevik Communism은 Revolutionary Perspectives, 14 (First Series)에서 검토되었다. files.libcom.org을 볼 것.
40. 그의 From the Bourgeois to the Proletarian Revolution, marxists.org와 The Revolution is not a Party Affair, marxists.org를 볼 것.
41. “Decree on the Right of Recall” in First Decrees of Soviet Power, edited by Y. Akhapkin (Lawrence and Wishart 1970), 42쪽을 볼 것
42. enin as Philosopher, 8쪽을 볼 것. 지면 관계상 「철학자로서 레닌」에 대한 분석은 여기서 다루지 못하지만, 1938년 소련에서 국가 자본주의의 출현 과정을 검토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레닌이 가담했던 논쟁을 언급함으로써, 판네쿡이 다시금 관념론자의 경향을 드러내고 있음을 지적해도 무방할 것이다.
43. 「노동자평의회」에서 “The Workers’ Revolution”절을 볼 것.
44. leftcom.org.
45. 계급의식과 혁명적 조직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완전한 내용은 우리의 팸플릿 「계급의식과 혁명 조직」(Class Consciousness and Revolutionary Organisation)을 참조할 것. 이 팸플릿은 leftcom.org에서 PDF로 제공된다.
<출처>